■ 아버지의 마음 / 김현승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 시집 『절대 고독』 (성문각, 1970)
[감상]
프로이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심리학적으로 경쟁의 관계라고 했다. 무슨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이 있나 싶지만 생각해 보면 일면 수긍이 간다. 자식에게 존경을 받으려면 스스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교훈을 잘 알면서도 그게 생각대로 안 된다. 아버지로서는 자신이 아비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늘 불안해하고 긴장한다. 그리고 자식은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닮아가지만 그 아버지를 뛰어 넘고자 한다. 이런 것들로 인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에 비해 확실히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래서 아들만 가진 아버지는 딸이 있는 아버지보다도 스트레스를 더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 딸 상관없이, 그리고 밖에서 어떤 일을 하건 집에 돌아오면 누구나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사람이 아버지다. 현대 질병의 가장 큰 원인인 피로와 스트레스를 껴안고 살지만 아버지는 울 장소가 마땅히 없다. 자식 앞에서는 잠시도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도저히 울 수 없는 존재다. 항상 말없이 사랑하고 말없이 걱정하는 사람이 아버지다. 자식의 늦은 귀가에 엄마는 열 번 걱정의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본다.
아버지가 무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 그리고 미안함이 어우러져 그 마음을 쉬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리며, 좋은 일에는 헛기침을 하고 황당한 일에는 너털웃음을 짓는 고독한 존재가 아버지다. 훗날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의 올곧은 성장을 확인하는 순간 ‘헛기침’ 한번으로 그 모든 고독과 노고를 깨끗이 보상받는 큰 바위 같은 존재가 아버지다. 그러나 지금의 젊은 아빠들에겐 구시대 아이콘인 헛기침이나 너털웃음과는 거리가 좀 멀어 보인다.
좀 더 구체화 되었고 직설적이다. 아마 같은 자식사랑이라도 그 씻김의 방식이 달라진 탓이리라. 얼마 전 한 대학교수가 서울시에 거주하는 대학생을 상대로 “아버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란 설문 조사에서 약 40%가 “돈”이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또한 서울대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부모가 언제쯤 죽으면 가장 적절할 것 같은가?”하는 설문에서는 “63세”라고 답한 학생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그 이유가 은퇴 후 남겨놓은 퇴직금을 안 건드리고 사망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기 때문이라니 가슴이 철렁한다. 이제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는 그야말로 ‘아버지의 마음’에만 존재하는 것인지... (글=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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