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의 독서에세이] 임길택에게
겨울방학이 되어 시골집에 왔다. 어머님은 하루 종일 무슨 일인가를 하신다. 한데 걸린 솥에다가 불을 때고 물을 데워 걸레도 빨고 머리도 감는다. 금방 마당에 계신가하면 회관에 가 계시고 회관에 가 계신가 하면 금방 한수 형님네 집에 가 계신다. 우리 마을 산에서 벌목 차가 지나다 수도관이 터져서 아침부터 오후까지 동네가 시끄럽더니 점심 때는 느닷없이 마을 회관에서 국수를 삶아 놓았으니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국수 먹으러 오란다.
겨울 산천은 참으로 썰렁하다. 앞산에 참나무들은 잎을 다 떨군 채 하루 종일 서 있다. 산꼭대기 밑에는 소나무들이 베어져 넘어져 있다. 하루 종일 산에 나무를 베는지 기계톱 돌아가는 소리가 산을 울리고 나무를 실어가는 차 소리가 끊기지 않는다. 베어다가 강가에 쌓아 놓은 나무들이 많은 상처를 입은 채 강바람 속에 실려간다.
이부자리 펴놓은 곳만
따뜻하게 불지피고
그 속에 발 묻고서
책을 봅니다
책을 읽다 눈 시려
고개 들면
바람소리
방 밖에 가득합니다
― 「겨울밤」 전문
어찌 그리 일찍 가 부렀냐. 길택아, 나는 다른 인간들은 믿지 않았어도 너는 믿었다. 한 번밖에 보지 않았지만 나는 너를 믿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들떠 지내지만 넌 그럴 재주가 없어 보였다. 참 사는 게 별거 아닌지는 알지만 그렇게 일찍 가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네 책을 읽으며 서럽다.
네 책을 읽으며 가만히 누워 있으니 누군가 어머니를 부른다. 누구쇼? 하니 소쿠리장수란다. 어머니 안 계신데요. 했더니 어디 갔간디 집집이 아무도 없다요. 글씨요 나도 몰르겄구만요.
몇 시인지 묻는 이 없고
며칠인지 알고 싶어하는 이 없어요
이름 누구 묻지도 않고
나이 알아갈 이도 없어요
일하다 배고프면 밥 먹고
일하다 해 떨어지면 잠들고
― 「해 떨어지면」 전문
길택아, 해 진다. 해 져도 너는 오지 않겠지? 어른들이 모인 회관에 가 보았다. 평생 일로 늙으신 어른들이 무슨 일인가를 놓고 떠들고 계시는데, 얼라려, 그 속에 너무도 어린 농부 얼굴을 한 아기가 하나 있었다. 요즘 어디에서 보기 힘든 햇빛에 오래 그슬린 건강한 진짜 아기였다. 나는 얼른 아기 손을 잡고 너 몇 살이니 했더니, 그 시끄러움 속에서도 내 말을 들었는지 요놈이 나를 빤히 올려다보며 손가락 네 개를 쫙 펴 보이는구나. 이 때 나는 네가 생각나서 집으로 달려와 엎드려 이 글을 쓴다.
길택아, 산중 하루해가 이리 짧구나. 나는 네 무덤도, 네가 죽은 후 행사에도, 네 아내와 네 아이들에게도 아무런 할 일을 못했구나.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너는 “괜찮여, 형” 이렇게 말하겠지. 길택아, 해가 지고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 동네 사람들이 힘모아 무엇인가 뽑는 소리가 들린다. 길택아, 때로 덧없다, 삶은. 네 책을 놓고 나는 해지는 앞산을 보러 간다.
◇ 임길택
1952년 전라남도 무안 출생. 목포교육대학 졸업. 강원도 사북의 탄광 마을과 경상남도 거창 등에서 교사로 어린이들과 생활함. 1997년 폐암으로 사망. 1998년 유고 시집 《똥누고 가는 새》(실천문학사), 유고 동화집 《수경이》(우리교육) 출간
● 저녁 한때 / 임길택
뒤뜰 어둠 속에
나뭇짐을 부려 놓고
아버지가 돌아오셨을 때
어머니는 무 한 쪽을 예쁘게 깎아 내셨다
말할 힘 조차 없는지
무쪽을 받아 든 채
아궁이 앞에 털썩 주저앉으시는데
환히 드러난 아버지 이마에
흘러난 진땀 마르지 않고 있었다
어두워진 산길에서
후들거리는 발끝걸음으로
어둠길 가늠하셨겠지
불 타는 소리
물 끓는 소리
다시 이어지는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
그 모든 소리들 한데 어울려
아버지를 감싸고 있었다
(중3 교과서 수록작품)
● 엄마 무릎 / 임길택
귀이개를 가지고 엄마한테 가면
엄마는 귀찮다 하면서도
햇볕 잘 드는 쪽을 가려 앉아
무릎에 나를 뉘여 줍니다
그리고선 내 귓바퀴를 잡아 늘이며
갈그락 갈그락 귓밥을 파냅니다
아이고, 니가 이러니까 말을 안 듣지
엄마는 들어 낸 귓밥을
내 눈 앞에 내보입니다
그러고는
뜯어 놓은 휴지 조각에 귓밥을 털어 놓고
다시 귓속을 간질입니다
고개를 돌려 누울 때에
나는 다시 엄마 무릎내를 맡습니다
스르르 잠결에 빠져듭니다
● 겨울밤 / 임길택
이부자리 펴놓은 곳만
따뜻하게 불지피고
그 속에 발 묻고서
책을 봅니다
책을 읽다 눈 시려
고개 들면
바람소리
방 밖에 가득합니다
● 누나 / 임길택
눈 내리는 날 시집을 가면서
포근한 눈 같은 마음도 가지고 갔어요
그런데도 어쩌다 찾아가 보면
매형이 신던 양말 기워 신고
누나는 입던 옷뿐이었지요
누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학이 되고 싶다 했어요
고향 학골에 날아와
어릴 적 뛰놀던 길 돌아보는
그런 학이 되고 싶다 했어요
● 나 혼자 자라겠어요 / 임길택
길러지는 것은 신비하지 않아요
소나 돼지나 염소나 닭
모두 시시해요
그러나, 다람쥐는
볼수록 신기해요
어디서 죽는 줄 모르는
하늘의 새
바라볼수록 신기해요
길러지는 것은
아무리 덩치가 커도
볼품없어요
나는
아무도 나를
기르지 못하게 하겠어요
나는 나 혼자 자라겠어요
● 거미와 거미줄 / 임길택
무심코 똥을 누다가
변소 모서리에 쳐진
거미줄을 보았어요
거미는 보이지 않는데
그 거미줄에도
석탄가루 내려앉아
까맣게 되어 있었어요
거미도
아버지처럼 규폐에 걸렸을까
규폐 걸린 거미는 어디로 갈까
똥을 누다 말고
나는 한참이나 생각해 보았어요
● 아버지의 겨울 / 임길택
부엌에서
아버지가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탄 묻은 판자쪽을
주워다 놓고
온 집안 울리도록
바람구멍을 막고 있었다
산 너머 어디쯤에
겨울이 오고 있었다
● 해 떨어지면 / 임길택
몇 시인지 묻는 이 없고
며칠인지 알고 싶어하는 이 없어요
이름 누구 묻지도 않고
나이 알아갈 이도 없어요
일하다 배고프면 밥 먹고
일하다 해 떨어지면 잠들고
● 고마움 / 임길택
이따금 집 떠나
밥 사먹을 때
밥상 앞에 두곤
주인 다시 쳐다봐요
날 위해
이처럼 차려주시나
고마운 마음에
남김없이 먹고서
빈 그릇들 가득
마음 담아 두어요
● 스님 재산 / 임길택
장작더미에
기대어 놓은
지게와
작대기 하나
그리고
녹다 만 눈 조금
● 양말 / 임길택
색이 다 바래기도 전에
먼저 닳고 말아
흰 실로 누덕누덕 뒤꿈치 기운
양말 한 켤레
장독 옆 잔디 위에서도
서로의 짝이 되어
소롯이 봄햇살 쬐고 있는
짝짝이 스님 양말 한 켤레
● 완행 버스 / 임길택
아버지가 손을 흔들어도
내가 손을 들어도
가던 길 스르르 멈추어 선다
언덕길 힘들게 오르다가도
손드는 우리들 보고는
그냥 지나치질 않는다
우리 마을 지붕들처럼
흙먼지 뒤집어 쓰고 다니지만
이 다음에 나도
그런 완행 버스 같은 사람이
되고만 싶다
길 가기 힘든 이들 모두 태우고
언덕길 함께
오르고만 싶다
● 삼월 / 임길택
볕바른 울타리 가
어미닭 품 속으로 살며시 찾아든 삼월
우리에겐 한 해의 시작
난로불 끄며
뿔뿔이 흩어졌던 아이들
다시 걸어나온 골목길마다
우듬지 끝 새싹들 꿈틀대고
아이들 작은 발자국 소리에
새로워지는 운동장
설날, 깨끗이 단장하고
세배 올리던 아이
가던 길 마다며
염소처럼 뻐팅기던 아이
볼 붉도록 자전거 위에 앉아
들판길 내달리던 아이
모두 나와
얼굴 마주하고 속살거리게 되는
삼월, 우리에겐 한 해의 시작
● 똥누고 가는 새 / 임길택
물들어가는 앞산바라기하며
마루에 앉아 있노라니
날아가던 새 한 마리
마당에 똥을 싸며 지나갔다
무슨 그리 급한 일이 있나
처음엔 웃고 말았는데
허허 웃고만 말았는데
여기저기 구르는 돌들 주워 쌓아
울타리 된 곳을
이제껏 당신 마당이라 여겼건만
오늘에야 다시 보니
산 언덕 한 모퉁이에 지나지 않았다
떠나가는 곳 미처 물을 틈도 없이
지나가는 자리마저 지워버리고 가는 새
금 그을 줄 모르고 사는
그 새
● 산골 아이 / 임길택
나는 산골아이
동네 골목 마을 골짜기
안 가 본 데 없는
나는 산골 아이
아직 바다도 모르고
사람 많다는 서울에도 가 본 적이 없는
나는 산골 아이
하지만 이 다음
온 세상 둘러보고 싶은 꿈으로
가득 차 있는
나는 산골 아이
어느 골에 다래나무가 많고
어느 골에 메토끼, 노루가 많이 내려오는지
맑은 샘물은 어디서 솟는지
누구네 밭에 멧돼지가 잘 내려오는지
샅샅이 알고 있어요
그러나 아직 기차를 타 보지 않았고
바닷가에 서 보지도 않은
나는 산골 아이
먼 뒷날 나라 안 돌아 볼 수 있다면
이 세상 구경 다닐 수 있다면
우리 산골 마을보다 더 좋은 데
어디 있나 찾아보겠어요
● 아버지를 죽이면서 / 임길택
쉰도 못되었는데
우리 아버지 이제
병원에만 계셔야 한대요
우리 선생님은
열심히 일해야
잘산다 하시었는데
만근만 하셨던 우리 아버지
이제
죽는 날까지
병원에만 계셔야 한대요
폐에 박힌 석탄가루들이
아버지의 숨을 가쁘게 하고
우리 식구들은
조금씩 나오는 보상금으로
쌀도 사고
우리들 학교도 가야 한대요
아버지를 죽이면서
우리 식구
살아가야 한대요
● 아버지 자랑 / 임길택
새로 오신 선생님께서
아버지 자랑을 해보자 하셨다
우리들은
아버지 자랑이 무엇일까 하고
오늘에야 생각해보면서
그러나
탄 캐는 일이 자랑 같아 보이지는 않고
누가 먼저 나서나
몰래 친구들 눈치만 살폈다
그때
영호가 손을 들고 일어났다
술 잡수신 다음 날
일 안 가려 떼쓰시다
어머니께 혼나는 일입니다
교실 안은 갑자기
웃음소리로 넘쳐 흘렀다
[감상]
장소는 탄광촌. 정확히 말하자면 그곳에 위치한 초등학교의 교실이다. 어느 날, 새 선생님이 오셔서 아버지 자랑을 해보자 말했다. 여기서 잠깐, 부디 이 선생님의 의도를 오해하지 말자. 그는 아이들의 배경과 재력을 알아보려는 것이 아니다. 선생님은 착하디착한 시인 선생님, 아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광부의 아이들이다.
난생처음 아버지 자랑을 해야 하는 아이들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대체 우리 아버지는 뭐가 잘났을까. 요새 초등학생들 같으면 남한테 질세라, 사실에 허풍을 보태서 목청껏 떠들 텐데 이 아이들은 주저주저했다. 내 아버지의 잘남이 네 아버지의 잘남을 이겨야 한다는 생각, 아버지 자랑이 곧 내 자랑이 된다는 생각 자체가 아예 없는 아이들이다. 금방 떠올리지 못하는 이 아이들은 너무나도 순수하다.
영호가 내놓은 대답이 특히 엉뚱하고 귀엽다. 숙취에 시달리며 바가지 긁히는 일이 아버지가 잘하시는 일이란다. 이 아이는 얼마나 진지한지, “떼쓰시”는 아버님 자랑에 꼬박꼬박 높임법까지 사용하고 있다.
시의 제목만을 보았을 때는 오해하기 쉽다. 직책 높고 돈 많은 아버지가 있다는 말일까. 대단한 아버지와 귀한 자식의 집안 자랑을 들어야 한다는 말일까. 그런데 읽어 가다 보면 굳었던 마음이 풀리고 입가에는 미소가 번진다.
‘아버지’와 ‘자랑’. 이 두 단어의 조합에 왜 우리는 지레 움츠러들었던 것일까.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버지 자랑도 있는데 말이다. (글=나민애 문학평론가)
● 막장(원제 : 아버지 걸으시는 길을) / 임길택 시 백창우 곡 박경하 노래
《막장》은 시노래 가수 박경하의 2집 '사북늦봄'에 수록된 곡입니다. 박경하 가수가 사북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이었던 임길택 시인의 시에 가수이자 작곡가인 백창우가 곡을 붙인 노래입니다.
막장(원제: 아버지 걸으시는 길을) 임길택 시
빗물에 패인 자국 따라
까만 물 흐르는 길을
하느님도 걸어오실까요
골목길 돌고 돌아 산과 맞닿는 곳
앉은뱅이 두 칸 반 우리 집까지
하느님도 걸어오실까요
한밤중,
라면 두 개 싸들고
막장까지 가야하는 아버지 길에
하느님은 정말로 함께 하실까요
/ 2021.12.18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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