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졸업 시즌 / 오은
더 이상 들을 수업이 없는데도
학교에 남아 있었다
갈 데가 없었다
빛나는 졸업장은 곧장 서랍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서랍 속에서 나날이 빚이 날 것이다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뭉쳤다
갈 데가 있는 친구들은
옷을 사고 차를 사고
이성의 환심을 사고
갈 데가 없는 우리는
양심을 파는 대신
쌀을 팔기 위해
사서 고생하기로 마음먹었다
안 될 걸 알면서도 하는 일이란
몸과 마음을 다 주어야 한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투명인간이 되어간다
어제는 미래를 상상했고
오늘은 오늘을 경험했고
내일은 어제를 후회했다
시간은
빛의 속도처럼 빠르거나
빚의 속도처럼 더 빨랐다
졸업 직전, 친구 중 하나가 휴학했다
졸업 직후, 친구 중 하나가 대학원에 갔다
학교에 발붙일 틈이라도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갈 데가 없어서
우리는 구내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다
밥을 먹으려고 입을 벌렸는데 말이 튀어나왔다
우리, 나중에 이런 식당 하나 차리자
꿈보다 해몽이 좋구나
꿈이라도 꿀 수 있다면
ㅡ 시집 『유에서 유』 (문학과지성사, 2016)
[감상]
2월에 예정되었던 대학을 비롯한 각 학교 졸업식이 코로나19 확산 우려로 결국 전면 취소되거나 기념사진 한 장 달랑 남기는 것으로 간소화되었다. 3월 입학식도 일주일씩 연기했다지만 제대로 열릴 수 있을지 현재로서는 불투명하다. ‘빛나는 졸업장은 곧장 서랍 속으로 들어가’ ‘서랍 속에서 나날이 빚이 날 것’이지만 졸업생들의 마음은 이래저래 불안하고 착잡하다. 비단 올해만 그런 게 아니라 대학가 졸업식의 예전 같지 않은 썰렁한 분위기는 오래전부터다. 관심이 없다는 분위기가 역력하여 졸업식에 가지 않는 졸업생들의 숫자가 크게 늘었다.
많은 학생들이 취업을 못해서 눈치 보이거나 취업에 성공한 경우라도 굳이 가서 염장을 지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직장에 눈치가 보인다는 졸업생도 있다. 학사모를 쓰고 가족들의 축하를 받던 떠들썩한 대학 졸업식은 이제 옛이야기가 되었다. 학교에서 준비한 졸업장도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아예 졸업장을 찾아가지 않는 경우도 많다. 졸업생들이 택배로 졸업장을 보내달라고 요구하지만 대부분의 대학은 본인이 직접 졸업장을 찾아가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올해는 도리 없이 많은 학교에서 택배로 졸업장을 발송했다.
졸업생 가운데는 ‘더 이상 들을 수업이 없는데도’ ‘학교에 남아 있다’ ‘갈 데가 없다’ 극심한 취업난에 아예 졸업을 포기하는 청년도 있다. 무작정 졸업하기보다 졸업을 미루고 토익 점수를 더 올리려는가 하면 인턴 등의 스펙을 좀 더 쌓으려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기업에서 모셔가던 호시절은 옛날 옛적에 끝났다. 놀고 마시고 데모만 하던 선배도 졸업할 때가 되면 척척 취직을 하더라는 얘기는 전설에 가깝다. ‘학교에 발붙일 틈이라도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대졸 실업자가 매년 30여만 명씩 늘고 있다.
사회적 생애주기의 뼈대가 이토록 취약하다. 대학을 나와서 취업해 돈을 벌어야 사람 구실하고 존중받는데 그러지 못해 ‘존중 불안’에 휩싸여있다. 서바이벌 게임하듯 살아남는 것이 관건이다. 생애주기의 변곡점에서 삐쭉 솟아오른 무한경쟁의 장벽 앞에서 각자도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와중에 코로나19와 같은 뜻하지 않은 사회적 시그널은 큰 영향을 미친다. 미세먼지가 많다거나, 아파트 값이 턱없이 올랐다는 뉴스 하나에도 민감하고 불안한 시대이거늘 ‘졸업 시즌’에 덮친 코로나19는 그들에게 유난히 혹독하게 감각될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엄혹한 바깥세상으로 발을 내딛기 두려워 오들오들 떨고 있다. 졸업이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인생관이 형성되는 과정을 묘사한 괴테의 장편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 나오는 말이다. 졸업은 당연히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그 시작이 늘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는 환히 웃지만 그러지 못한 사람이 더 많다. 다만 학사모를 하늘 향해 높게 날린 모든 젊은이들의 앞길이 출렁이는 바다처럼 역동적이길 바랄 뿐. (글=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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