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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조] (95) 나무도 아닌 것이 - 윤선도(尹善道) (2021.11.30)

푸레택 2021. 11. 30. 21:37

나무도 아닌 것이 - 윤선도(尹善道)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는다
저렇고 四時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산중신곡(山中新曲)》 오우가(五友歌) 죽시(竹詩)

[뜻풀이]

*뉘 시키며: 누가 그렇게 시켰으며.
*어이: ‘어찌’의 옛말.
*비었는다: 비었는가? ‘~는다’는 ‘~는가?, ~느냐?’의 옛말씨로 의문형을 나타내는 어미(語尾)이다.
*사시(四時): 봄·여름·가을·겨울의 네 시절. 일년, 사계절을 통칭한다.

[풀이]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그렇게 시켰으며, 또한 속은 어째서 비었느냐? 저렇듯 속이 비었건만도 사시사철 푸른 빛을 띠고 있으므로, 나는 바로 그것이 좋을 따름이다.

[지은이]

윤선도(尹善道: 1587~1671): 이조(李祖) 시조작가(詩調作家)로서, 자(字)는 약이(約而), 호(號)는 고산(孤山) 이라 불렀다. 정철·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詩歌人)의 한 사람으로, 서인(西人) 송시열에게 정치적으로 패해 유배생활을 했다.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 부정공(副正公) 유심(唯深)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8세 때 백부인 관찰공(觀察公) 유기(唯幾)의 양자로 가서 해남윤씨의 대종(大宗)을 이었다. 11세부터 절에 들어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여 26세 때 진사에 급제했다. 1616년(광해군 8) 이이첨의 난정(亂政)과 박승종·유희분의 망군(忘君)의 죄를 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당해, 경원(慶源)·기장(機張)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고향인 해남에서 조용히 지내던 중 1628년(인조 6) 봉림(鳳林)·인평(麟坪) 두 대군의 사부가 되면서, 인조의 신임을 얻어 호조좌랑에서부터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에 이르기까지 주요요직을 맡았다. 그러나 조정 내 노론파의 질시가 심해져 1635년 고향에 돌아와 은거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 나자 가복(家僕) 수백 명을 배에 태워 강화로 떠났으나,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남한산성을 향해 가다가 이번에는 환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상을 등질결심을 하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해가던 중 보길도의 경치를 보고 반해,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1638년 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죄로 영덕(盈德)으로 유배를 당해 다음해 풀려 났다. 보길도로 돌아와 정자를 짓고 시(詩)·가(歌)·무(舞)를 즐기며 살았으며, 효종이 즉위한 이래 여러 차례 부름이 있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무민거(無憫居)·정성당(靜成堂) 등 집을 짓고, 정자를 증축하며, 큰못을 파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산릉(山陵) 문제와 조대비복제(趙大妃服制) 문제가 대두되었다. 남인파인 윤선도는 송시열·송준길 등 노론파에 맞서 상소로써 항쟁했으나 과격하다고 하여 삼수(三水)로 유배를 당했다. 1667년(현종 9) 그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된 뒤 여생을 한적히 보내다가 1671년(현종12) 낙서재(樂書齋)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자주 유배를 당했다. 한편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풍류인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남긴 시조 75수는 국문학사상 시조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시문집으로는 정조 15년에 왕의 특명으로 발간된 〈고산유고〉가 있다. 이 시문집의 하별집(下別集)에 시조 및 단가 75수가, 〈산중신곡 山中新曲〉 18수, 〈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 2수, 기타 6수,〈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 40수, 〈몽천요 夢天謠〉 5수, 〈우후요 雨後謠〉 1수 순서로 실려 전한다. 〈산중신곡〉 18수 가운데, 〈오우가 五友歌〉는 물·돌·소나무·대나무·달을 읊은 시조로 널리 애송되었다. 〈어부사시사〉는 효종 때 부용동에 들어가 은거할 무렵에 지은 것으로, 봄·여름·가을·겨울을 각각 10수씩 읊었다. 그의 시조는 시조의 일반적 주제인 자연과의 화합을 주제로 담았다. 우리말을 쉽고 간소하며 자연스럽게 구사하여 한국어의 예술적 가치를 발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숙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 되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참고]

대나무는 얼른 보면 나무 같기도 하고, 또 풀 같기도 한 것이다. 형태상으로 관찰한 대나무의 모습을 있는 대로 그려내고 그러면서도 저렇게 곧게 솟았음은 무슨 조화인가 하고, 경이의 눈을 크게 뜨고 있다. 게다가 사시에 푸르니, 대나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나무도 소나무와 같이 옛 사람의 글에 자주 오르내리며 선비들이 즐겨 벗하던 매(梅)·난(蘭)·국(菊)과 함께 사군자의 하나로 꼽히는 것이다. 특히 대나무에 있어 곧은 것은 강직한 심성이요, 속이 빈 것은 허심탄회한 태도요, 사시에 푸름은 지사라 하여 찬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대나무를 노래하되 대나무라는 말은 한 마디도 사용하지 않고, 형태와 습성등을 의인화하여 대나무의 모습을 그려낸 기묘한 수법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오우가(五友歌) 중 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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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소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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