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부 장수 / 최현배(崔鉉培)
서울의 명물―아니 진경의 하나는 확실히 행상들의 외치는 소리이다. 조석으로, 이 골목 저 골목에는 혹은 곧은 목소리로, 혹은 타목으로, 또 남성으로, 혹은 여성으로 제가끔 제 가진 물건들을 사 달라고 외친다. 이 소리에 귀가 닳은 서울 사람에게는 아무 신기할 것 없겠지만, 처음으로 서울로 올라온 시골 사람의 귀에는 이 행상들의 외는 소리처럼 이상야릇한 서울의 진풍경은 없을 것이다.
오늘에서 돌이켜 생각하면 꼭 13년 전의 일이다. 내가 시골서 백여 리를 걸어 겨우 경부선 물금역에 가서 생전 처음 보는 기차를 타고 공부차로 서울에 와 잡은 주인집은 관훈방 청석골 정 소사의 집이었다.
같이 온 동무도 있거니와 이 주인집에 묵는 학생들은 고향 친척도 있고, 또 영남 학생들이기 때문에 오늘 날 당장에는 그리 설다는 느낌이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하룻밤을 자고 나서 그 이튿날 이른 아침에 들창 밖에서 들려오는 각종 행상들의 외치는 소리는 참으로 어린 시골내기의 귀를 찔러 놀라게 하였다.
“생선 미웃들 사려!”
“무 드렁 사려!”
“맛있는 새우젓 사오!”
어느 소리가 하나 귀에 익은 게 없다. 모두 신기 그것이다. 갓 온 시골내기는 먼저 온 영남 친구더러 그 외침의 뜻을 물으며 서로 보고 웃었다. 이것은 다 지난 옛날 이야기의 한 토막이거니와 서울 거리의 도붓장수의 외치는 소리는 예나 이제나 별로 다름이 없이 아침마다 저녁마다 거리거리의 공기를 울려난다.
나는 서울로 이사 온 뒤로부터 열 해가 넘도록 이 행촌동에 살아온다. 우리 집이 이 동네로 이사 온 때로부터 이 행촌동 거리에는 아침저녁으로 여러 가지 식료품 파는 도붓장수가 가지가지의 음색으로 가지가지의 어법으로 외치고 지나간다.
그 중에도 두부 장수가 있어 남다른 어법으로 또 남다른 어조로 특색 있게 아침저녁으로 외치며 도부 친다 한다. 여느 두부 장수들은, “두부 사려오!” 하거나 그렇잖으면, “두부나 비지 살려오!” 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특색 있는 한 두부 장수는 반드시, “두―부 사이 주오!” 하고 외친다. 듣는 사람마다 이상히 여겨 불러서 사 준다.
우리 집에서 한 번 두 번 사 주다가 나중에는 아주 붙박이 단골이 되었다. 그래서 그 외침이 들리기만 하면 아이들이, “어머니! ‘사 주오’가 가아요!” 하고 두부 사기를 묻던 것이 버릇이 되다시피 되었다.
이 ‘사 주오’는 거의 날마다 우리 집 문 앞에 지게를 받치고서 두부 한 모, 두 모를 주고는 분필로 판장에다 한 금 두 금씩 긋고 가는 터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저 지나게 되는 때에는 그 두부 장수 자신도 섭섭하려니와 ‘사 주오’를 부르지 못하고 만 아이들의 마음은 더욱 섭섭한 느낌이 생기는 것이었다. ‘사 주오’까지 하는데, 그것 하나 못 사 주다니!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모양 같았다.
그래서 월말에는 그 판장에 그어 놓은 분필의 흔적을 따라 두붓값을 갚는데, 그 ‘사 주오’는 거저로 두부를 한 모나 두 모를 주는 것은 상례였다. 더구나 세말 같은 때에는 더 많이 거저 두고 가는 것이었다. 그럴 적마다 그 두부 받은 사람은 그만두라 하고 주는 장수를 들여가시라고 서로 세우는 것이 예사였다.
그러다가 어느 새 섣달 대목쯤 해서 그 ‘사 주오’ 두부 장수가 그만 오지 아니하게 되었다. 대목이 다 되어도 종내 두붓값 받으러 오지도 않았다. 그 두붓값을 못 갚은 우리 집에서는 온 식구가 처음에는 이상히 생각하다가 나중에는 걱정하기 시작하였다.
식구들이 저녁을 먹고 앉으면,
“그 ‘사 주오’가 왜 안 오는가?”
“아마도 그 찬바람 쐬면서 외치고 다니다가 아마도 감기가 들었는 게지.”
하고 서로 문답하는 것이 종종이었다. 그러면서도 얼마 지나면 설마 오겠지 하고 기다리는 마음을 놓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 ‘사 주오’ 두부 장수는 정월이 가고, 2월이 다 가고, 봄철이 지나 여름이 지나도록 종내 그 특색 있는 외침의 소리는 행촌동 골목에 다시 울리지 않았다.
이렇게 날이 가고 달이 가고 또 드디어 해가 가도, 우리 내외는 그 두붓값 갚지 못한 ‘사 주오’ 두부 장수를 잊어버리지 못하고, 간간이 조용할 때에는 무슨 글티기를 타서 그 '사 주오' 두부 장수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참 그 두부 장수가 그만 죽었는가 봐요?”
“글쎄요. 아마 그렇기에 도무지 오지 않는 게지요.”
이러한 문답이 우리 집의 밥상 물린 자리에 일어나는 것이었다. 두붓값을 못 갚으니 속이 꺼림도 하고 그 두부 장수가 그만 죽었는가 하니 가엾기도 하였다.
어느 날 저녁, 저자였다. 내가 독립문 밖 푸성귀 장에서 배추를 사려고 하니까 어떤 사람이 나를 보고서 그저 머리를 꾸벅하면서 목례를 하고 간다. 나는 머리로 그의 인사를 받았으나 그가 누구인지 확실히 깨치지 못하였다. 나중에야 생각하니 아무래도 그가 바로 죽었다고 생각하던 ‘사 주오’ 두부 장수인 것 같았다. 의복은 깨끗이 입었고 그 누런 얼굴도 훨씬 부(富)해졌지만 그 전형의 ‘사 주오’ 두부 장수임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나는 집에 오자 곧 마누라를 보고 그 이야기를 하였다. 마누라는 나의 말을 듣고 그 두부 장수가 살아 있는 것―더구나 우리 집 가까이 살아 있다는 것을 믿으려 하면서도 참 내 믿기 어려워하였다. 그래서 이 ‘사 주오’가 오랜만에 다시 우리 집 식구들의 화제가 되었으며, 나는 그 때에 그에게 “당신이 바로 그 두부 장수 하던 이요?” 하고 다져보지 못한 것만을 유감으로 생각하였다.
그 뒤에 여러 달이 지나서 우리 마누라가 관동에 갔다가 오더니 내가 그 두부 장수를 만났다고 반가이 시원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 얘기의 내용인즉 대략 이러하다.
ㅡ 그가 관동에서 그 사람을 만났는데 분명히 그 ‘사 주오’ 두부 장수라, 어디 살며 무엇을 하고 사는가를 물으니 그는 옛날부터 살아오던 관동에 여전히 사는데 두부를 쑤어 도매만 하고 거리로 도부치는 일은 바빠서 못한다고 대답하였다 한다. 그래서 마누라가 왜 두붓값은 안 받으러 오는가 하니 그는 다만 “예, 인제 받으러 가지요” 하였다 한다. 그래서 마누라는 오라고 여러 번 부탁을 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 주오’는 종내 오지 아니하여 우리도 아직 그 두붓값을 갚지 못하고 지낸다.
◇ 최현배(崔鉉培, 1894~1970): 국어학자ㆍ국어 운동가ㆍ교육자. 호는 외솔. 일본 교토(京都)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42년에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겪었다. 한글 학회 이사장, 연세 대학교 교수ㆍ학장ㆍ부총장을 지냈으며 국어 연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저서에 《우리 말본》, 《한글갈》, 《나라 사랑의 길》, 《글자의 혁명》 등이 있다.
/ 2021.11.19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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