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나의 붓꽃 - 손광성
시집가기 싫다고 누나가 말했다. 시집은 가야 한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 사람이 싫다고 조그만 소리로 누나가 말했다. 그 사람이어야 한다고 큰 소리로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먹기 싫은 밥은 먹어도 살기 싫은 사람하고는 못 사는 법이라고 말한 것은 어머니였다.
나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그날 어머니는 평소의 어머니보다 훨씬 커 보였고, 그래서 그날은 어머니가 이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보다 더 큰 소리로 아버지가 고함을 질렀다. 그건 목소리가 아니라 무슨 천둥소리 같은 것이었다.
그 위세에 눌려 어머니는 다시 평소처럼 조그만 헝겊인형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열일곱 살 누나는 가망 없는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누나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 하지만 열 살짜리 나는 너무나 작았고 아버지는 너무나 컸다. 사람이 작으면 힘이 없다는 것과,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과,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은 얼마나 오래오래 가슴이 아파야 하는가를 나는 그때 알아버리고 말았다.
함이 들어오던 날 밤 누나는 이불을 쓰고 누워 버렸다. 누나의 울음은 깊은 밤 강물이었다. 누나의 강물은 내 가슴속으로 이어져서 흘렀다.
의사가 몇 차례나 다녀갔다. 그래도 누나의 병은 낫지 않았다. 의사는 누나가 왜 아픈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저러다 누나가 죽을 것이라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이상한 소리에 나는 잠이 깼다. 어머니는 누나를 안고 우시면서 들릴까 말까 한 소리로 말씀하셨다. 정녕 어미를 두고 죽을 작정이냐고...
나는 도로 눈을 감고 자는 체했다. 갑자기 목이 아팠고. 그리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낮이었다면 나는 눈물을 몰래 닦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둠 때문에 그러지 않아도 되었다.
분명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나는 며칠이 지나서 병석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예쁘던 그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내가 아무리 웃겨도 누나는 웃지 않았다. 표정없는 얼굴처럼 슬픈 것은 다시 없다는 사실을 그때 알아버리고 말았다.
그런 누나가 어느 날부터인가 수를 놓기 시작했다. 수틀에는 청보라색 붓꽃 한 송이가 조금씩 피기 시작했다. 하얀 비단 위에 꽃이 먼저 피더니 다음에는 꽃대가 나오고 그리고 잎이 돋았다. 개울가에서 피는 붓꽃은 잎이 먼저 나고 다음에 꽃대가 자라고 그다음에 꽃이 피는데 누나의 것은 거꾸로 피었다. 묻고 싶었지만 누나 앞에서는 입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나마 꽃이 다 피었는가 싶으면 누나는 그것을 뜯어냈다. 잎을 뜯어내고 그 다음에 줄기를 뜯고 그리고 꽃을 뜯어내었다. 실밥 하나 없이 뜯어낸 다음 처음부터 다시 수를 놓기 시작했다. 이제 다 놓았는가 싶으면 또 뜯어내는 것이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리했는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슬픔을 잊으려고 그리 하였을까? 아니면 세상 모든 것을 다 뜯어버리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을까?
시집가던 날 비가 오지 않았다. 누나도 울지 않았다. 웃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말했다. 여자란 시집갈 때는 다 그리하는 법이라고. 한두 해만 지나면 아들딸 낳고 잘 살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누나는 아기를 낳지 않을 것이고, 웃지 않을 것이고, 그리고 오래오래 앓을 것이라는 것을.
며칠이 지난 후 누나가 보고 싶어서 몰래 누나네 집에 갔다. 수를 놓고 있던 누나가 붓꽃처럼 수척한 얼굴로 나를 보고 웃었다. 나는 오래는 마주 볼 수 없고, 얼굴을 떨구고 수틀 속의 붓꽃을 보는 체했다. 그리고 세상에는 눈물보다 더 슬픈 웃음도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아버리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다짐했다. 내가 자라서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되어서 힘이 세어지면, 누나를 도로 찾아올 것이라고. 꼭 도로 찾아올 것이라고...
◇ 손광성: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동양화 전공. 계성여고·서울고등학교·동남대학에서 교편을 잡음.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시민대학 문예창작 강사. 현대수필문학상 수상. 저서 《달팽이》 《한 송이 수련 위에 부는 바람처럼》. 편역서 《한국 고전 명수필선》 《한국의 명수필》 《세계의 명수필》.
/ 2021.11.17(수)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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