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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수필] '면학(勉學)의 서(書)' 양주동(梁柱東) (2021.11.16)

푸레택 2021. 11. 16. 11:36

■ 면학(勉學)의 서(書) / 양주동(梁柱東)

  독서(讀書)의 즐거움! 이에 대해서는 이미 동서(東西) 전배(前輩)들의 무수(無數)한 언급(言及)이 있으니, 다시 무엇을 덧붙이랴. 좀 과장(課長)하여 말한다면, 그야말로 맹자(孟子)의 인생 삼락(人生三樂)에 무름지기 '독서(讀書), 면학(勉學)'의 제 4일락(第四一樂)을 추가(追加)할 것이다. 진부(陳腐)한 인문(引文)이나 만인(萬人) 주지(周知)의 평범(平凡)한 일화(逸話) 따위는 일체 그만두고, 단적(端的)으로 나의 실감(實感) 하나를 피력(披瀝)하기로 하자.

  열 살 전후 때에 논어(論語)를 처음 보고, 그 첫머리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운운(云云)이 대성현(大聖賢)의 글의 모두(冒頭)로 너무나 평범한 데 놀랐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이런 말씀이면 공자(孔子) 아닌 소, 중학생도 넉넉히 말함직하였다. 첫 줄에서의 나의 실망(실망)은 그 밑의 정자(程子)인가의 약간 현학적(衒學的)인 주석(註釋)에 의하여 다소 그 도(度)를 완화(緩和)하였으나 논어의 허두(虛頭)가 너무나 평범하다는 인상(印象)은 오래 가시지 않았다. 그랬더니 그 후 배우고, 익히고, 또 무엇을 남에게 가르친다는 생활이 어느덧 2, 30년, 그 동안에 비록 대수로운 성취(成就)는 없었으나, 몸에 저리게 느껴지는 것은 다시금 평범한 그 말이 진리(眞理)이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정씨(程氏)의 주(註)는 워낙 군소리요, 공자의 당초(當初) 소박(素朴)한 표현이 그대로 고마운 말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현세(現世)와 같은 명리(名利)와 허화(虛華)의 와중(渦中)을 될 수 있는 한 초탈(超脫)하여, 하루에 단 몇 시, 몇 분이라도 오로지 진리와 구도(求道)에 고요히 침잠(沈潛)하는 여유(餘裕)를 가질 수 있음이, 부생백년(浮生百年), 더구나 현대인에게 얼마나 행복된 일인가! 하물며, 난후(亂後) 수복(收復)의 구차(苟且)한 생활 속에서 그래도 나에게 삼척 안두(三尺案頭)가 마련되어 있고, 일수(一穗)의 청등(靑燈)이 의미한 채로 빛을 내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일전(日前) 어느 문생(門生)이 내 저서(著書)에 제자(題字)를 청하기로, 나는 공자의 이 평범하고도 고마운 말을 실감(實感)으로 서증(書贈)하였다.

  독서란 즐거운 마음으로 할 것이다. 이것이 나의 지설(持說)이다. 세상에는 실제적(實際的) 목적을 가진, 실리실득(實利實得)을 위한 독서를 주장할 이가 많겠지마는 아무리 그것을 위한 독서라도, 기쁨 없이는 애초에 실효(實效)를 거둘 수 없다. 독서의 효과를 가지는 방법은 요컨대 그 즐거움을 양성(養成)함이다. 선천적(先天的)으로 그 즐거움에 민감(敏感)한 이야 그야말로 다생(多生)의 숙인(宿因)으로 다복(多福)한 사람이겠지만, 어렸을 적부터 독서에 재미를 붙여 그 습관을 잘 길러 놓은 이도, 그만 못지 않은 행복한 족속(族屬)이다.

  독서의 즐거움은 현실파(現實派)에게나 이상가(理想家)에게나, 다 공통(共通)히 발견의 기쁨에 있다. 콜럼버스적인 새로운 사실(事實)과 지식의 영역(領域)의 발견도 좋고, "하늘의 무지개를 바로 보면 내 가슴은 뛰노나." 식의 워즈워스적인 영감(靈感), 경건(敬虔)의 발견도 좋고, 더구나 나와 같이, 에머슨의 말에 따라, "천재(天才)의 작품에서 내버렸던 자아(自我)를 발견함"은 더 좋은 일이다. 요컨대, 부단(不斷)의 즐거움은 맨 처음 '경이감(驚異感)'에서 발원(發源)되어 진리의 바다에 흘러가는 것이다. 주지(周知)하는 대로 '채프먼의 호머를 처음 보았을 때'에서 키츠는 이미 우리의 느끼는 바를 대변(代辯)하였다.

  그 때 나는 마치 어떤 천체(天體)의 감시자(監視者)가 시계(視界) 안에 한 새 유성(遊星)의 허엄침을 본 듯, 또는 장대(壯大)한 코르테스가 독수리 같은 눈으로 태평양(太平洋)을 응시(凝視)하고―모든 그의 부하(部下)들은 미친 듯 놀라 피차에 바라보는 듯―말없이 다리엔의 한 봉우리를.

  혹은 이미 정평(定評)있는 고전(古典)을 읽으라, 혹은 가장 새로운 세대(세대(世代)를 호흡(呼吸)한 신서(新書)를 더 읽으라, 각인(各人)에게는 각양(各樣)의 견해(見解)와 각자(各自)의 권설(勸說)이 있다. 전자는 가로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후자(後者)는 말한다.

  "생동(生動)하는 세대(世代)를 호흡(呼吸)하라."

  그러나 아무래도 한편으로만 기울어질 수 없는 일이요,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지식인(知識人)으로서 동서(東西)의 대표적인 고전은 필경(畢竟) 섭렵(涉獵)하여야 할 터이요, 문화인(文化人)으로서 초현대적(超現代的)인 교양(敎養)에 일보(一步)라도 낙오(落伍)될 수는 없다. 문제는 각자의 취미와 성격과 목적과 교양에 의한 비율(比率)뿐인데, 그것 역시 강요하거나 일률(一律)로 규정(規定)할 것은 못된다. 누구는 '고칠현삼제(古七現三制)'를 취하는 버릇이 있으나, 그것도 오히려 치우친 생각이요, 중용(中庸)이 좋다고나 할까?

  다독(多讀)이냐 정독(精讀)이냐가 또한 물음의 대상(對象)이 된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 는 전자의 주장이나, '박이부정(博而不精)'이 그 통폐(通弊)요,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함'이 또한 그 약점(弱點)이다. 아무튼, 독서의 목적이 '모래를 헤쳐 금을 캐어 냄'에 있다면, 필경(畢竟) '다(多)'와 '정(精)'을 겸(겸)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 역시 평범(平凡)하나마 '박이정(博而精)' 석 자를 표어(標語)로 삼아야 하겠다. '박(博)'과 '정(精)'은 차라리 변증법적(辨證法的)으로 통일되어야 할 것―아니, 우리는 양자(兩者)의 개념(槪念)을 궁극적(窮極的)으로 초극(超克)하여야 할 것이다. 송인(宋人)의 다음 시구는 면학(勉學)에 대해서도 그대로 알맞은 경계(境界)이다.

  벌판 다한 곳이 청산인데, (平蕪盡處是靑山)
  행인은 다시 청산 밖에 있네 (行人更在靑山外)

  나는 이 글에서 독서의 즐거움을 종시(終始) 역설(力說)하여 왔거니와, 그 즐거움의 흐름은 왕양(汪洋)한 심충(深衷)의 바다에 도달(到達)하기 전에, 우선 기구(崎嶇), 간난(艱難), 칠전팔도(七顚八倒)의 괴로움의 협곡(峽谷)을 수없이 경과(經過)함을 요함이 무론(毋論)이다. 깊디깊은 진리의 탐구(探究)나 구도적(求道的)인 독서는 말할 것도 없겠으나, 심상(尋常)한 학습(學習)에서도 서늘한 즐거움은 항시 '애씀의 땀'을 씻은 뒤에 배가(倍加)된다. 비근(卑近)한 일례(一例)로, 요새는 그래도 스승도 많고 서적(書籍)도 흔하여 면학의 초보적(初步的)인 애로(隘路)는 적으니, 학생 제군(學生諸君)은 나의 소년 시절(少年時節)보다는 덜 애쓴다고 본다. 나는 어렸을 때에 그야말로 한적(漢籍) 수백 권을 모조리 남에게 빌어다가 철야(徹夜), 종일(終日) 베껴서 읽었고, 한문(漢文)은 워낙 무사독학(無師獨學), 수학(數學)조차도 혼자 애써서 깨쳤다. 그 괴로움이 얼마나 하였을까마는, 독서 연진(硏眞)의 취미와 즐거움은 그 속에서 터득, 양성되었음을 솔직(率直)이 고백한다.

  끝으로 소화 일편(笑話一片)―내가 12, 3세 때이니, 거금(距今) 50년 전의 일이다. 영어(英語)를 독학(獨學)하는데, 그 즐거움이야말로 한문만 일과(日課)로 삼던 나에게는 칼라일의 이른바 '새로운 하늘과 땅(new heaven and earth)'이었다. 그런데 그 독학서(獨學書) 문법 설명의 '삼인칭 단수(三人稱單數)'란 말의 뜻을 나는 몰라, '독서 백편 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란 고언(古諺)만 믿고 밤낮 며칠을 그 항목(項目)만 자꾸 염독(念讀)하였으나, 종시 '의자현(義自見)'이 안 되어, 마침내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 눈길 30리를 걸어 읍내(邑內)에 들어가 보통 학교(普通學校) 교장을 찾아 물어 보았으나, 그분 역시 모르겠노라 한다. 다행히 젊은 신임 교원(新任敎員)에게 그 말뜻을 설명(說明) 받아 알았을 때의 그 기쁨이란! 나는 그 날, 왕복(往復) 60리의 피곤한 몸으로 집으로 돌아와, 하도 기뻐서 저녁도 안 먹고 밤새도록 책상에 마주 앉아, 적어 가지고 온 그 말뜻의 메모를 독서하였다. 가로되,

  "내가 일인칭(一人稱), 너는 이인칭(二人稱), 나와 너 외엔 우수마발(牛杏馬勃)이 다 삼인칭야(三人稱也)라."

[작자] 양주동(梁柱東, 1903~1977): 시인, 대학교수

형식 : 수필
성격 : 예화적
주제 : 독서의 참된 맛과 면학의 즐거움

◇ 이해와 감상

자칭 국보급이라고 했다는 필자가 독서의 즐거움을 논한 글로 유장한 한자어와 길고 리드미컬한 문장이 매력을 품는 글이다. 옛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우수마발이 다 삼인칭야’라는 유행어를 낳기도 했고 「체프먼의 호머를 처음 보았을 때」라는 키이츠의 시 원문을 구하려고 당시 고교생들을 책방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했던 유명한 수필이다. 다소 현학적이기조차하는 이 글에서 작자는 시종 독서의 즐거움을 논하고, 독서를 통해 느끼는 발견의 기쁨을 필자는 난해한 한자어를 적적한 곳에 구사하는 맛도 요즘 글들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매력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고, ‘온고이지신’, ‘남아수독오거서‘, ‘안광이 지배를 철함’, ‘박이정’, ‘독서백편의자현’ 등의 뜻을 음미하면서 읽으면 독서의 무궁한 즐거움과 면학의 기쁨에 빠질 수 있는 안내를 받을 수 있을 듯하다.

■ 우수마발(牛溲馬勃)
- 쇠오줌과 말똥, 가치 없는 존재

[소 우(牛/0) 오줌 수(氵/10) 말 마(馬/0) 노할 발(力/7)]

특출한 것이 없이 그렇고 그런 사람을 甲男乙女(갑남을녀), 張三李四(장삼이사)라 한다. 하지만 세상은 이들에 의해 유지되고 바뀐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쓸모없는 어중이떠중이 같은 존재를 가리킬 때 쇠오줌(牛溲)과 말똥(馬勃)이란 말로 흔히 사용된다. 동양의 천재로 자칭한 국문학자 梁柱東(양주동)이 쓴 명수필 ‘면학의 서’에서 삼인칭을 공부하며 ‘나는 일인칭, 너는 이인칭, 그 외 우수마발이 다 삼인칭’이란 표현으로 유명해졌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같은 뜻이라며 가치 없는 말이나 글, 품질이 나빠 쓸 수 없는 약재 따위를 이르는 말이라고 실려 있다.

그러나 다르게 해석하는 견해도 많다. 牛溲(우수)는 쇠오줌이란 뜻 외에 한약재로 쓰이는 車前草(차전초) 즉 질경이를 가리키고, 馬勃(마발)도 먹지 못하는 약재 馬屁菌(마비균) 즉 먼지버섯을 말한다고 한다. 勃(발)에는 ‘노하다, 일어나다, 갑자기‘의 뜻은 있어도 말똥의 뜻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흔하고 가치가 없는 약초, 하지만 언젠가는 꼭 쓰이는 재료를 가리킨다고 했다.

唐宋八大家(당송팔대가)에 들어가는 唐(당)나라의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韓愈(한유, 768~824)는 ‘進學解(진학해)’라는 글에서 이 성어를 사용했다. 여기서 학자는 오로지 자기수양과 학문 탐구에 전념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재주와 덕이 뛰어난 인재가 크게 쓰이지 못하는데 대한 울분도 토로하고 있다. 성어가 나오는 부분을 보자. ‘쇠오줌과 말의 똥이나, 찢어진 북의 가죽이라도, 모두 거두어 갖춰놓고, 쓰일 때를 기다리며, 버리지 않는 것이 의사의 현명함이다(牛溲馬勃 敗鼓之皮 俱收並蓄 待用無遺者 醫師之良也/ 우수마발 패고지피 구수병축 대용무유자 의사지량야).’ 이때까지의 새김으로 옮겼지만 어떻든 쇠오줌과 말똥이 약재로 쓰이기도 한단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속담이 있다. 평시에는 흔해서 가치 없다고 거들떠보지 않다가도 막상 필요해서 쓰려면 없다. 약재뿐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다.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사람도 자기만의 재주는 다 있다. 능력에 맞게 일을 맡기고, 겉보기로만 판단하지 말고 사람 귀한 줄 알아야 한다.

제공: 안병화(前언론인,한국어문한자회)

/ 2021.11.16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