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 곳에의 그리움 / 전혜린(田惠麟)
그것이 헛된 일임을 안다.
그러나 동경과 기대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무너져 버린 뒤에도 그리움은 슬픈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나는 새해가 올 때마다 기도 드린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어떤 엄청난 일, 무시무시하도록 나를 압도시키는 일, 매혹하는 일, 한마디로 ‘기적’이 일어날 것을 나는 기대하고 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모험 끝에는 허망이, 여행 끝에는 피곤만이 기다리고 있는 줄은 잘 안다.
그리움과 먼 곳으로 훌훌 떠나 버리고 싶은 갈망, 비하만의 시구(詩句)처럼 ‘식탁을 털고 나부끼는 머리를 하고’ 아무 곳이나 떠나고 싶은 것이다.
먼 곳에의 그리움(Fernweh)!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혼자이고 싶은 마음! 텅 빈 위(胃)와 향수를 안고 돌로 포장된 음습한 길을 거닐고 싶은 욕망, 아무튼 낯익은 곳이 아닌 다른 곳, 모르는 곳에 존재하고 싶은 욕구가 항상 나에게는 있다.
포장마차를 타고 일생을 전전하고 사는 집시의 생활이 나에게는 가끔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노래와 모닥불가의 춤과 사랑과 점치는 일로 보내는 짧은 생활, 짧은 생, 내 혈관 속에서 어쩌면 집시의 피가 한 방울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고 혼자 공상해 보고 웃기도 한다.
내 영혼에 언제나 고여 있는 이 그리움의 샘을 올해는 몇 개월 아니, 몇 주일 동안만이라도 채우고 싶다. 너무나 막연한 설계―아니 오히려 ‘반설계(反設計)’라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플랜은 그것이 미래의 불확실한 신비에 속해 있을 때만 찬란한 것이 아닐까? 이루어짐 같은 게 무슨 상관 있으리요? 동경의 지속 속에서 나는 내 생명의 연소를 보고 그 불길이 타오르는 순간만으로 메워진 삶을 내년에도 설계하려는 것이다.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는 특권이야말로 언제나 새해가 우리에게 주는 아마 유일의 선물이 아닌가 나는 생각해 본다.
◇ 전혜린(田惠麟, 1934~1965)
수필가·번역문학가. 평안남도 순천 출생. 법률가인 전봉덕(田鳳德)의 1남 7녀 중 장녀. 1953년 경기여고 졸업, 같은 해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 1955년 3학년 재학 중 전공을 독문학으로 바꾸어 독일로 유학. 1959년 독일 뮌헨대학 독문학과를 졸업. 이 학교 조교로 근무. 유학 중 1955년 가톨릭에 귀의하여 막달레나(Magdalena)라는 영세명으로 영세를 받음. 독일 유학시절부터 헤르만 헤세 등 독일작가들의 작품을 수 권 번역. 사망 후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발간되었다.
◇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새해를 맞아 소망을 기도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소망이 헛된 것임을 알면서도 속물적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고, 찰나적이지만 환상적인 기성의 관계와 단절된 세계에 몰입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현실에 안주하기를 부정하며 끊임없이 낯선 세계, 새로운 일들을 꿈꾸는 작자의 삶의 자세는 작자의 다른 글에서도 발견되며, 작자의 삶 또한 그러했다.
작자가 가고자 하는 ‘먼 곳’은 일상인들의 동경과 기대와는 차원이 다른, ‘모르는 얼굴과 마음과 언어 사이’에서 철저하게 혼자인 곳이다. 작자는 그 소망에의 그리움을 간결하고 압축적인 문장으로 표현하여, 지적이고 세련된 정서를 표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소망은 성취 여부와 관계없으며,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중요한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
- ‘먼 곳에의 그리움’에서 ‘먼 곳’의 의미
이 글에서 ‘먼 곳’은 어느 특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작자가 존재하는, 숱한 이해 관계로 가득한 ‘이 곳’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곳을 말한다.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난 곳이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된 작자 혼자만의 공간을 의미한다. 세속적인 이해 관계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혼자만의 새롭고 완벽한 체험이 가능한 곳이다.
- ‘슬픈 아름다움’이 의미하는 것
일상의 속된 삶을 벗어나고 싶은 동경과 기대는 비록 이루어지지 못한다 해도, 그것에 대한 그리움이 슬프지만 아름답게 남아 있다는 역설적 표현이다. 인생의 아름다움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꿈꾸는 것’에 있다는 생각이다.
- 독일어 ‘Fernweh(페른베흐)’의 의미
독일어로 ‘Fern’은 ‘먼, 먼 곳의, 낯선 곳의’라는 뜻이며, ‘weh’는 ‘슬픔, 고통’ 또는 그러한 감정을 나타내는 감탄사이다. 따라서 ‘Fernweh’는 낯선 먼 곳으로 가고 싶지만 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의 고통을 나타내며, 이를 ‘먼 곳에의 그리움’으로 표현하였다.
/ 2021.11.12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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