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작수필] '콩' 김산옥 (2021.11.07)

푸레택 2021. 11. 7. 21:34

?? [명작수필] 콩 / 김산옥

나는 순덕이 아줌마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

양구 대암산 깊은 계곡을 흐르는 두타연 일급수를 먹고, 부지런한 농부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키가 큰다. 때때로 찾아와 보듬어주는 넉넉한 순덕이 아줌마 사랑을 먹으면 한여름 불볕더위도 견딜 수 있다.

나는 대암산이 붉게 물들 즈음, 순덕이 아줌마 입꼬리가 귀에 걸리도록 통통하게 살이 오른다. 내 작은 몸은 땅의 온기와, 햇빛과 달빛, 산소와 비, 바람과 농부의 땀으로 완성된다. 온 우주가 담겨진다.

대암산 아래 넓은 벌판에 희끗희끗 서리꽃이 피면, 나는 순덕이 아줌마 곡간에 둥지를 튼다. 봄, 여름, 가을이 총총히 내 곁을 지나가는 동안, 나도 분주했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제때 열매 맺기 위해 숨 가쁘게 달려왔다. 이제 고단함을 내려놓고 잠시 침묵의 시간을 보낸다.

초겨울 짧은 볕이 창가에 드리우자, 순덕이 아줌마는 우리를 벅벅 문질러 목욕을 시킨다. 아궁이에는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가마솥에는 물이 설설 끓어난다. 아줌마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가마솥 끓는 물에 우리를 와르르 쏟아 붓는다. 지금부터 우리는 아주 뜨거운 맛을 보아야 한다. 화탕지옥 같은 고통을 서너 시간 견뎌내야 한다. 이것은 무엇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의식이자 혹독한 과정이다.

순덕이 아줌마는 우리를 비벼도 보고 씹어보기도 한다. 우리가 무엇이 되기 위한 중요한 가늠이다. 비릿한 비린내가 가시고 손가락으로 비벼 뭉그러질 때쯤, 드디어 불꽃이 잦아들고 우리는 퉁퉁 부은 몸을 서로 기대며 한소끔 더 뜸들이 선잠을 잔다.

드디어 화산 같은 김을 토해내며 솥뚜껑이 열린다.

우리는 몸이 식기 전에 방망이질을 당해야 하는 또 하나의 아픈 의식을 거쳐야 한다. 포대자루 속에서 힘 센 농부에게 지지 밟히기도 하고, 온몸이 형체도 없이 뭉그러지도록 매를 맞아야 한다. 이제 ‘나’라는 한 알은 없어지고, ‘우리’라는 한 덩어리가 될 차례다.

순덕이 아줌마는 우리를 뭉쳐서 덩어리로 만들어 낸다. 그녀의 투박한 손바닥이 수도 없이 온몸을 토닥여 준다. 그동안의 고통을 위로하듯 어루만진다. 못생긴 덩어리로 다시 태어난 나는, 대암산 푸른 바람이 불어오는 처마 끝에 박쥐처럼 내걸린다. 햇빛과 바람은 속속들이 젖어있는 내 몸에 물기를 거둬낸다. 한동안 처마 끝에 풍경처럼 매달려서 그렇게 흠뻑 외로움에 젖는다.

가뭄에 논바닥 갈라지듯 내 몸에 실금이 갈 즈음, 순덕 아줌마는 뜨거운 아랫목에 짚으로 요를 깔아 우리를 포개 눕힌다. 깊은 잠을 자라고 포대기를 꼭꼭 눌러 덮어준다. 온몸에서 열꽃이 필 때까지 족히 몇 주 동안은 납죽 엎드려 있어야 한다.

순덕이 아줌마는 우리를 조근조근 흔들어 깨운다. 제대로 열꽃이 피었다며 입가에 웃음꽃이 가득하다. 온 집안에 꼬릿꼬릿한 냄새가 떠돌아도 그저 좋아한다.

나는 알고 있다 이제 훌훌 털고 길 떠나야 한다는 것을.

나는 어느 택배기사 어깨 힘을 빌려 안양에 사는 허름한 집 아주머니 댁으로 왔다. 그녀는 양자를 들이듯 어색하고 반가운 얼굴로 우리를 맞는다. 얼른 흐르는 물에 내 못생기고 지저분한 몸을 샅샅이 닦는다.

입춘이 지난 도시의 날씨는 미세먼지와 함께 칙칙하고 까칠하다. 탁한 공기가 윙윙거리는 도시의 옥상에서 벌거벗고 누워 있자니 울컥 눈물이 난다. 대암산 맑고 푸른 공기가 한없이 그립다. 마을마다 계곡마다 꽃잔치 준비하고 있을 아늑한 그곳, 내가 자란 그 텃밭에는 꽃다지, 달래, 냉이가 고개를 밀고 올라와 아지랑이와 속삭이고 있겠지. 텃밭에 다시 뿌리를 내리는 씨앗이 되고 싶었던 꿈은 사라지고, 이 낯선 곳에 누워 있으려니 슬픔이 안개처럼 밀려온다.

무심한 바람은 어느 결에 내 몸의 물기를 털어낸다. 도시 아주머니는 몇 번이고 내 몸을 뒤집으며 슬픈 내 마음을 매만진다. 사춘기 맞은 자식 달래듯 말없이 그렇게 어루만진다.

오늘은 십이지(十二支) 중 말(午)날. 음력 정월 10일. 손 없는 날.

햇살이 쏟아지는 허름한 집 옥상에서 도시 아주머니는 분주하다. 봄바람에 흙먼지를 뽀얗게 뒤집어 쓴 항아리마다 물행주 치고, 넓은 대야에 생수를 붓고 서해바다 천일염을 찰방찰방 풀어헤친다.

시어머니 적부터 내려왔다는 커다란 항아리 속에는 서해 바닷물이 농도 짙은 짠 내를 풍기며 나늘 기다린다. 나는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퐁당 빠져 있는 작은 우주 속에 고요히 잠겨서 40일 간 도시 아주머니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단꿈을 꿀 것이다.

봄볕이 촘촘히 내리쬐는 옥상에서 긴 침묵이 끝나면, 나는 당당하게 된장으로 태어나, 도시 아주머니의 밥상에서 자랑스러운 무엇이 될 것이다.

/ 《좋은 수필》에서 옮겨 적음 2021.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