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송과 나, 우리는 서로 지기 / 박희진 시인
나는 소나무를 좋아한다. 싫은 나무가 사실은 없지만, 어떤 나무도 소나무와는 비교가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소나무는 나무 중의 귀공자인 것이다. 왜 잘 생긴 소나무에겐 속인이 함부로 대하기 힘든 기품이 있는 걸까? 일가풍을 이룬 철학자, 초탈한 신선, 또는 풍류를 즐기는 도인과도 같다. 소나무가 자아내는 분위기에는 그런 고매한 품위와 아취를 감득하게 하는 무엇이 분명 있다.
내가 그 중 좋아하는 소나무는 노송이다. 수령 이삼백 년은 거뜬히 넘긴 소나무라야 누가 보든지 노송답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노송답다는 말은 노송으로서 갖추어야 할 격, 송격松格을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격을 갖추어야 운치가 생긴다. 이른바 명품송이란 이 격과 운치가 각별히 뛰어난 소나무인 것이다.
소나무만큼 그 이름과 빛깔과 모양새가 다양한 나무는 별로 없으리라. 바닷가의 소나무는 해송이고 내륙의 그것은 육송이다. 빛깔이 흰 것은 백송이고 붉은 것은 적송이요 검은 것은 흑송이다. 누워있는 소나무는 와송臥松이고 가지가 축 늘어져 있는 것은 처진 소나무이다. 지면에서부터 줄기가 여러 개로 갈라져 자라는 건 반송盤松이고 허리 꼿꼿이 죽죽 뻗어가는 소나무는 강송剛松이다. 요즈음 그것을 금강소나무라 부르고 있다. 춘향목, 황장목도 다 강송의 별칭인 것이다.
소나무는 이렇듯 그 빛깔과 모양새 따라 다양하게 나뉘지만, 명품송이라 불리는 나무들은 그것과는 상관없이 다음과 같은 미질美質을 지니고 있다.
① 강력한 주체성, 또는 자기동일성을 늘 어디서나 굳건히 지킨다. 다른 소나무와 자기를 비교하여 뽐내지 않는다. 부러워하거나 주눅 드는 일이 없다. 오로지 자기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② 만고상청萬古常靑의 고매한 지조, 불굴의 기상, 왕성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시공의 도전을 소나무만큼 의연히 감내하고 극복하는 나무가 있을까. 무려 근 반만년의 수령을 지닌, 지구상 최고最高의 생명체인 소나무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백산white mountain에 있다.
③ 생명의 본질에서 일탈하는 법이 없다. 소나무에겐 현상과 본질이, 강인성과 유연성이 하나로 되어있는 때문이기도 하다. 정중동 동중정의 제자리 춤을 부단히 추고 있다. 유유자적의 풍류가 바로 소나무의 본질이자 현상인 것이다. 소나무는 생명의 본질 수호자다. 철저한 긍정과 찬미의 화신이다.
④ 소나무는 공간구성의 천재다. 소나무 하면 흔히 떠올리는 구부정한 소나무의 경우를 살펴보자. 대개 볼만한 잘 생긴 노송은, 반드시 천연기념물이 아니라도, 그 줄기나 가지의 뻗음새가 대단히 흥미로운 천태만상을 이루고 있다. T자, S자, V자 모양 등은 차라리 흔한 유형에 속하지만, 꼭 대기에서 줄기가 45 〬로 꺾인다거나 리을(ㄹ)자 모양이 잇따라 이어지는 묘기를 보게 되면, 혹은 완연히 이응(ㅇ)자 모양 동그라미를 이루고 있는 가지를 발견할 땐 저절로 탄성을 지르게 된다. 참으로 이런 일은 소나무 특유의 독창적 공간구성의 능력이요 감각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그러면 서도 그 부분이 특별히 튄다거나 전체와의 균형과 조화를 깨는 일은 없다. 그 기기묘묘한 가지들 뻗음새가 추호도 우발적 변덕스러움의 소치는 아니고 다 필유곡절의, 유일회적唯一回的 표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⑤ 운명과 사명의 완벽한 일치. 그 씨앗이 어디에 떨어지건, 옥토이건 암 벽이건 아랑곳 않는다. 묵묵히 수용한다. 소나무에겐 주어진 운명을 사명으로 바꿀 줄 아는 천부의 지혜와 능력이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인고와 극복의 세월이 걸릴까? 필시 소나무는 단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한결같은 자기추구, 부단한 자기혁신의 노력으 로 그 시련을 감내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달한 경지가 운명과 사 명의 일치일진데, 그때 비로소 소나무에겐 최고의 격과 운치가 주어질 것이다.
이상 열거한 미질들 말고도 소나무에겐 많은 덕목들이 있을 줄 알지만 이 쯤에서 줄이련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일 일이 있다. 여기서 언급된 바는 모두가 다 소나무의 의인화를 통해 추리, 유추, 상상, 사색된 내용임을 독자제현은 양찰해주시기를.
어쨌거나 소나무가 마침내 자기의 운명과 사명을 일치시킨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지 않겠는가. 완벽한 자기실현! 더는 뺄 것도 보탤 것도 없는 완숙完熟한 노송은 완미完美한 소나무가 아닐 수 없다. 노송의 아름다움, 그것도 완벽한 아름다움이라니! 그런 아름다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거듭 말하지만 노송을 노송답게 만드는 것은 그 노송의 드높은 격과 운치라 할 수 있다. 격과 운치는 일조일석의 산물이 아니다. 수백년을 두고두고 소나무의 자기실현을 위한 부단한 자기추구가 있었기에, 그리고 주변의 해와 달을 비롯하여 삼라만상의 협력이 있었기에 한 그루의 멋진 노송이 탄생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우주적 예술이 만든 걸작품인 것이다. 외경의 감정 없이 그런 노송앞에 설 수는 없으리라. 노송의 아름다움,거기엔 물론 진眞 선善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겠으나, 거기서 끝이고 있는게 아니라 성聖의 지경至境에 이르러 있다. 그런 노송을 두고 나는 감히 신송神松이라 부르는 것이다.
소나무에겐 분명 영성靈性이 깃들어 있다. 안 그러면 어떻게 노송의 온몸에 그런 거룩한 영기가 떠도는가? 영성은 인간만의 독점물이라고 단정하지 말일이다. 신이 당신의 모습을 본 떠 인간을 만든 것이 사실이라 해도, 천지만물이 다 신의 피조물일진대 거기엔 나름대로 당신의 흔적이 미미하게나마 남겨졌을 터이다. 동식물은 물론 광물에까지 신의 입김과 손길의 흔적, 즉 영성은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깃들어 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그중에서는 물론 인간이 만물의 영장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렇게 상상하고 유추할순 없을까? 새 중의 영물은 학이요. 산짐승 중의 영물은 사슴이며, 돌 중의 영물은 다이아몬드이고, 나무 중의 영물은 소나무이라고.
영물은 영물끼리 통하는 법이다. 나는 내 안의 영성을 통해 소나무에겐 영성이 있음을 믿고 있다. 저만치 운치있는 노송을 보게되면 나는 그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자석에 이끌리는 쇳가루처럼 가까이 다가가서 노송 앞에 선다. 아연 온 몸에 생기에 넘치는 건 이미 노송의 기를 받아서 일 것이다. 두 팔을 벌려 소나무의 가슴 높이 둘레를 재본다. 소나무 줄기의 껍질 빛깔과 무늬를 아주 유심히 살핀다. 그것만으로도 소나무의 연륜과 건강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굵은 몸통에 귀를 갖다대기도 한다. 노송의 들숨 날숨, 그 은밀한 생명의 리듬, 수액의 흐름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노송의 전우 좌우 상하를 두루두루 살피기 위해 서서히 주위를 맴돌기도 하고 전체상이 한눈에 들어오는 지점을 찾아 멀리 떨어져서 보기도 한다. 다시 소나무 곁으로 다가간다. 줄기나 곁가지 잔가지들의 기기묘묘한 뻗음새를 유심히 관찰하는 일이 그렇게 흥미진진할 수가 없다. 나는 거의 무아경의 흥분상태에 빠지는 모양이다. 필름 한두 통쯤은 순식간에 동이나니 말이다.
소나무와 이렇듯 상종하다 보면 심신이 더없이 쇄락해져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게 된다. 언제까지나 소나무 곁에서 소나무와 대화하며 어슬렁거리거나 또는 그 아래 풀밭에 단좌하여 깊은 명상에 잠기고 싶다. 이미 나의 머릿속은 가을의 벽공처럼 맑고 깊어졌다. 들숨 날숨에선 필시 솔향기를 풍기고 있으리라. 소나무 미학, 소나무와 정자亭子, 소나무와 십장생, 소나무와 산수화, 소나무와 풍류도, 소나무와 우주...... 한 마디로 ‘소나무 화두’에 이끌려서깊이 그것을 참구하다 보면 홀연 온우주가 투명해지고 작을 대로 작아져서 솔잎 끝 한 방울 이슬 속으로 들어가 앉고 만다.
흉무기자막음시胸無奇字莫吟詩라는 말이 있다. ‘가슴속에 기자奇字가 없을진대 시詩를 읊지말라’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만사가 범용할 뿐이어서 다 그렇고 그렇다는 느낌밖에 드는 게 없다면, 어떻게 시를 쓸 수 있겠는가? 시인이 어떤 대상을 접할 때 우선 새롭다거나 매력적이라거나 또는 기이하다는 느낌이 든다면 이미 그 순간에 시의 씨앗은 시인의 가슴 속에 잉태되는 것이리라. 시인의 가슴 속에 전광석화처럼 영감이 스쳐가는 것이라 해도, 기자가 각인되는 순간이라 해도 좋다. 내게 있어서는 이 기자가 소나무인 것이다. 왜 소나무를 나의 시의 원천이라고 말하는지 이제 조금은 납득되시리라. 사실 소나무에는 기자처럼 생긴 것이 많다. 아니 모든 운치 있는 묘송에는 이 기송적 요소가 어우러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의 나이도 이순쯤 되면 누구나 가슴 속에 이 기자같은 소나무 한 그루를 심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먼저 내 안에 소나무가 있어야 밖에 있는 소나무를 볼 수 있고, 만나서 하나 되는 기쁨을 누릴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소나무 사라이 남달리 강한 사람들을 보면 확실히 보통 사람들보다 영성적 감각이 뛰어난 분들이다. 그런 분들은 평소 자신의 영성을 갈고 닦아 맑은 거울 같은 심미안審美眼을 지녔기에 소나무 안에 깃든 영성을 알아보고, 거기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소나무한테서는 정말 배울 것이 무궁무진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 소나무 보면 한결 느긋해지고 정화되며 행복해진다.
그런데 전혀 소나무 좋은 줄을 모르는 분들도 적지않다. 자기 안의 오욕칠정에는 민감해도 영성엔 도무지 관심이 없어, 있거나 말거나라는 사람의 눈엔 아무래도 소나무가 보일 리 없다. 그렇다면 이것은 얼마나 안타깝고 애석한 노릇인가. 우리의 삼천리 금수강산에는 좋은 소나무들, 묘송, 기송, 노송, 거송, 초송, 신송神松들이 구석구석 널려 있는데 말이다. 소나무의 격과 운치를 알아보고 그 아름다움에 눈뜨게 되면. 소나무가 갖고 있는 갖가지 미질과 미덕도 환히 보이게 되어, 소나무를 인생의 둘도 없는 위대한 벗이자 스승으로 모실 수도 있는데 말이다.
소나무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여 찬미할 줄도 알게 되는 방법은 없을까? 그러자면 우선 소나무 보는 사람의 품성과 지기志氣가 문제되지 않을 수 없다. 삶에 대한 확고한 긍정과 향상에의 의욕, 찬미의 정신, 겸허한 마음, 심미감각등이 선행되어야할 줄 안다. 영성 진화의 지표를 좀 더 고차원에 설정하고 기꺼이 자신의 영성적 계발에 힘써야한다. 그러한 사람에겐 마침내 혜안慧眼 이 열리게 되고 사물의 진상을 꿰뚫어 보게 된다. 소나무를 보더라도 겉모습 뿐 아니라 그 안의 약동하는 생명력이 어떻게 소나무다운 절묘한 표현을 얻게 되는지를 감득하게 되리라 본다.
소나무 보는 사람이 얼마나 마음을 비우고 있는가, 소나무에 대해서 얼마나 순수한 애정을 품고 있는가, 거기에 비례해서 소나무는 다가온다. 자기의 은밀한 속내까지 드러낸다. 그렇다고 인간과 소나무가 서로 아무것도 더는 알아볼 것이 없어질 만큼 빤히 들여다보이게는 안 된다. 마치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아무리 가까워지더라도 미지수가 남듯이 말이다.
내게 있어 소나무는 여전히 신비로운 매혹적 존재다. 매일 대하는 동일한 소나무가 볼 때마다 다르다. 보면 볼수록 새록새록 생동하는 솔빛깔과 솔향과 기기묘묘한 가지들의 뽇음새, 온몸으로 하는 독창적 춤사위를 어떻게 무슨 말로 얼마나 찬미해야 직성이 풀릴까.
도대체 내가 소나무를 사랑하듯 소나무도 나를 알아주고 있는 걸까? 소나무는 늘 그렇다고 대답한다. 내가 좋은 노송을 보노라면 어김없이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고 생채에 넘치듯, 노송도 나를 보면 아연 한 꺼풀 베일을 벗고 기운생동하는 온몸을 드러낸다. 비췻빛 솔바람을 보내오기도 한다.「옳지, 저기 나의 지기가 오는구먼, 백발의 노시인, 산신각 안 송하석상松下石上에 호랑이를 띠처럼 두르고 앉아 있는 산신령이 방금 문을 열고 이리로 나온 것 같다. 너무 반가워 어쩔 줄을 모르겠네. 하지만 이 몸이야 의젓하기 짝이 없는 노송 아닌가. 있는 그대로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필시 그분에겐 최선의 대접이 아닐 수 없지」
이 어지럽고 혼탁하기 짝이 없는 세상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소나무를 알아주고, 소나무는 여전히 나를 알아주니, 우리는 서로 둘도 없는 지기간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 미지수를 남겨두고 있다고 하는 것이 진실일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나의 소나무 사랑은 오히려 이제부터인 것이다.
글=박희진 (1931년~2015년)
경기 연천 출신. 시인. 수필가. 보성고(普成高), 고려대 영문과 졸업. 1955년 《문학예술》 추천으로 데뷔.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1991년 한국시협상, 2000년 상화시인상, 2011년 펜문학상, 2012년 녹색문학상 수상
/ 2021.10.30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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