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작수필] '노인 예찬' 서태수 (2021.10.26)

푸레택 2021. 10. 26. 18:26

노인 예찬 / 서태수

   봄은 꽃으로 아름답고 가을은 잎으로 아름답다. 봄과 가을은 모두 붉게 번지는 꽃불의 계절이다. 봄꽃은 낱낱의 송이마다 꽃으로 피어나고, 가을잎은 삼삼오오 벗을 모아 단풍으로 번져난다. 청춘靑春의 피부처럼 싱그러운 꽃은 혼자서도 꽃이지만, 노년老年의 피부처럼 까칠한 낙엽은 어울려서 꽃이 된다.

   청춘은 화병에 꽂아놓고 감상하는 꽃이고, 노년은 책갈피에 끼워두고 사색하는 단풍이다. 화사한 꽃같이 아름다운 청춘은 꽃봄花春의 계절이고, 메마른 단풍같이 아름다운 노년은 잎봄葉春의 계절이다.


   꽃봄 인생이 잉걸불이라면 잎봄 인생은 잿불이다. 꿈꾸는 미래를 장작더미로 불태우는 청춘은 오늘의 향기로 벌과 나비를 불러 모으지만, 이미 헌신한 제 몸의 찌꺼기를 불태우는 노년은 지난날의 향기로 인생의 상념想念을 불러 모은다.

   꽃봄 인생은 현재의 아름다움에 도취하고 잎봄 인생은 지난날의 아름다움에 도취한다. 화려한 빛깔과 부드러운 살결을 뽐내는 꽃은 가까이서 보면 더 향기롭고 아름답지만, 까칠한 피부에 검버섯 돋아난 단풍은 멀리서 보아야 아름답다. 손거울을 들고 다니는 청춘은 꽃밭 속에 꽃이 되어 사진을 찍고, 집에 거울을 두고 다니는 노년은 아름다운 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꽃봄 인생이 생명의 확산이라면 잎봄 인생은 불티의 확산이다. 대지의 열기를 모은 봄꽃은 부드러운 숨소리를 아지랑이로 내뿜고, 하늘의 냉기를 받은 낙엽은 힘겨운 숨소리를 기침으로 내뱉는다. 강둑에서 피어오른 봄꽃은 따뜻한 햇볕 쏟아지는 산등성이로 타오르고, 산꼭대기에서 번져 내려온 단풍은 마을 어귀를 굽이치는 강물 위로 젖어든다.

   꽃은 씨방을 키우기 위해 붉은 교태를 부리고, 잎은 자양분을 공급하기 위해 푸른 노동을 한다. 꽃이 촉촉한 입술을 은밀하게 오므리고 펴면서 화사한 몸짓으로 삶의 영속永續을 위한 새 생명의 잉태를 꿈꾸는 동안, 잎은 좌우심실左右心室로 나뉜 심장에서 벋어 나온 굵고 가는 엽맥葉脈 핏줄을 통해 온몸에 피돌기를 계속한다. 밤낮 숨고르기를 하며 넉넉한 그늘로 덮어주는 잎은 어머니의 심장박동처럼 제 품에 안겨드는 곤고困苦한 세상사를 포근하게 품어준다.

   잎봄 인생이 치아가 다 빠진 채 마른 입술로 오므라든 것은 제 몸의 수정受精을 끝냈기 때문이요, 검붉은 핏줄이 온몸으로 불거져 나오는 것은 꽃봄 인생이 남긴 열매를 위해 마지막으로 내뿜는 힘겨운 심장의 펌프질 때문이다.

   꽃잎은 황홀한 수정으로 제 몫을 다하지만 나뭇잎은 거친 제 살갗이 다 헤질 때까지 잎맥을 통해 내보내는 따뜻한 호흡을 멈추지 않는다. 이는 곧 허리 굽은 부모님이 제 씨방에서 터져 나간 먼 곳의 자식들에게 보내는 한결같은 마음이다. 그것이 때로는 아파트 발코니에서 하염없이 허공을 바라보며 두 손 모으는 시름겨운 마음일 수도 있고, 때로는 먹거리를 위해 해종일 논밭의 김을 매는 애틋한 마음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마음의 고향에는 이글거리는 햇살 아래 백로 한 마리가 엎드린 푸른 밭고랑이 있는 것이다.


   꽃이 먼동빛이라면 단풍은 석양빛이다. 동산 너머에서 발돋움한 팽팽한 얼굴의 꽃봄 인생은 풋풋한 몸으로 파란 하늘의 흰구름을 향해 더 높이 훨훨 날아오르며 진한 꽃향기를 내뿜는다. 그때 허연 머리 이고, 굽어진 허리 부여잡고, 무릎 휘청거리는 잎봄 인생은 서산 너머로 사위어가는 제 그림자 허위허위 끌고 가면서도, 세월의 연륜 담아 짙게 팬 굵은 주름, 검버섯 듬성듬성한 얼굴에서 향수어린 흙내음을 풍긴다.

   당唐 시인 두목杜牧이 「산행山行」에서 ‘서리 맞은 단풍이 봄꽃보다 더 붉다霜葉紅於二月花.’고 한 것이 어디 꽃으로 아름다운 겉모습만 보고 읊은 시구詩句이겠는가.

   가을은 이미 제 몸의 모든 기운을 다 소진한 탓에 본바탕은 노인의 빛깔인 은빛silver이다. 조락凋落의 계절이 지나 단풍잎마저 다 떠나보낸 앙상한 나무들이 탄탄한 몸으로 겨울을 맞을 즈음, 살얼음 지피는 강둑이나 찬 서리 흩뿌리는 산기슭으로 올라보라. 온몸으로 부대끼며 강과 산을 푸른 바람으로 비질하던 갈대숲, 억새숲이 어느덧 세월의 겨울바람 되어 은빛 물결로 일렁이고 있음을 본다.

   이때는 휘몰이로 굽이지던 도도한 물길도 긴 생애의 하류下流에 이르러 유유한 은빛으로 반짝이고, 어쩌면 금세라도 하얀 눈 몇 송이를 겨울꽃으로 피워 내릴 것 같은 하늘도 은빛이다. 그래서 잎봄 인생 인 노년은 ‘silver spring’으로 의역意譯함이 좋다.


   꽃은 떨어질 때도 꽃비가 되어 아름답지만 잎은 떨어지면 우수수 처량하다. 낙화洛花는 이내 녹아버려 화려했던 한때의 젊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꿈속에다 아련히 묻지만, 낙엽落葉은 겨우내 제 뿌리를 덮고 있다가 봄비를 맞으면 그때야 다 헤져 버린 제 육신을 흙 속에 묻어 거름으로 마지막 봉사를 한다.

   꽃은 떨어져 씨앗을 남기고 잎은 떨어져 눈牙을 남긴다. 지는 날까지 붉은 빛을 잃지 않는 꽃봄花春 인생은 열매를 잉태해서 행복하지만, 연둣빛으로 태어나 푸르른 삶을 살다 붉게 어우러지는 단풍 되어 한 줌 부엽토腐葉土로 돌아가는 잎봄葉春 인생은 다 주고 가는 껍데기라서 행복하다.

/ 2021.10.26 옮겨 적음

https://youtu.be/FJQMWSiVmcg

https://youtu.be/npy6XK4986w

https://youtu.be/6g7ij2hh0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