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숲] 삶의 지혜

[김나미 조명탄]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그리움이 되고' 김나미 교수 (2021.10.21)

푸레택 2021. 10. 21. 21:54

 

[김나미 조명탄] 기억은 추억이 되고 추억은 그리움이 되고 / 김나미 삼육대 스미스학부대학 부교수

나에게 인생숙제가 있었다. 책을 쓰는 일이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만나는 상담자이자 심리학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20여 년을 살아오며 내면에 쌓이는 기억들이 있었다. 마음에 간직하고 있고 말로 나누기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내 삶에 쌓여온 많은 이야기를 글로 풀어 내려놓아야 한다는 마음의 짐이 커져 갔다.

올해 초 그 인생숙제가 ‘행복한 사람은 이렇게 삽니다’라는 표제를 달고 세상에 나오게 됐다. 그런데 글로 내려놓으면 완성될 것 같았던 인생숙제였던 책을 통해 새로운 사람과 세상을 만나고 있는 요즘이다.

얼마 전 책을 읽은 한 독자가 책에 언급한 ‘빨간노트’에 관한 질문을 했다. ‘빨간노트’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울컥했다. 박사과정으로 고군분투하던 학생이자, 서툰 초보 교수였고 첫 아이를 키우는 미숙한 엄마였던 2000년대 초반의 추억이 한순간에 되살아났다. 시간의 여유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던 그 시절 왠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힘든 시간이었기에 긍정적인 기억들이 더 소중해서 순간의 기쁨과 감사를 놓치기 싫어 빨간노트를 사서 글로 남기기 시작했었다.

연구실 책장 깊은 곳에 먼지를 쓰고 있던 노트를 오랜만에 꺼내 조심스레 펼쳐보았다. 나의 30대 시절의 치열하면서도 따뜻했던 기억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이가 무심코 전해준 감동적인 말, 실패와 아픔을 극복하려 노력했던 추억,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에 대한 감회, 작지만 소박한 성취의 기록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기록하지 않았다면 남아있지 않았을 추억들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처럼 추억에 잠겨 행복한 경험을 하는 것과 연관된 증후군이 있다. 힘든 현실이 과거의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리게 해 현재의 어려움에서 도피하려는 심리증상인 ‘무드셀라 증훈군’이다.

성경에 나타난 최장수 인물인 무드셀라의 이름을 붙인 이 증후군은 과거에는 잘 나갔지만, 현재는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증후군은 괴로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도피심리이기 때문에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심리 상태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2006년 영국의 사우샘프턴대 심리학과에서 무드셀라 증후군에 관련해 진행한 실험은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는 무드셀라 증후군 집단과 냉철하며 매사를 비관적으로 보는 집단인 두 집단을 구성하고 인간의 능력 밖인 자연재해와 관련 책을 동일하게 읽게 한 후 심리적 반응을 비교 분석했다.

그 결과 무드셀라 증후군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의 사람들에 비해 미래를 보다 희망적으로 보고 주변 사람들과 유대감을 유지하며 정서적으로 더 안정적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 결과에 대해 연구 책임자였던 콘스탄틴 세디키데스(Constantine Sedikides) 교수는 과거의 행복하고 즐거웠던 추억을 자주 떠올리는 것의 강점을 강조하며 과거에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긍정적인 추억을 활용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50대에 들어서니 기억하는 것보다 잊어버리는 일이 더 많다. 이런 처지가 되고 보니 젊은 시절 행복한 순간들과 긍정적인 기억들을 기록하기로 한 나의 빨간노트는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빨간 노트에 기록한 기억은 추억이 됐고 그 추억은 삶의 의미가 실린 그리움이 됐다.

기억은 한계가 있다! 기록이 중요하다! 행복을 스케치한 기록은 소중한 인생 보물이다!

글=김나미 삼육대 스미스학부대학 부교수

[출처] 국방일보 2021.08.25

/ 2021.10.21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