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 하늘 날고 땅 굴러가는 열매들 “다 계획이 있단다”
ㅣ 우리 주변 식물들의 비밀 이야기 6 열매와 가을
긴 장마가 끝나고 태풍이 몇 번 지나가는 사이 계절은 멈추지 않고 변해 갑니다. 어느새 스치는 바람에서 가을 냄새가 묻어나죠. 하늘도 나날이 푸르고 높아져 갑니다. 자연의 생명들도 저마다 겨울 준비를 시작해요. 특히 열매는 여름에 통통하게 살지고 커졌다가 가을을 맞아 익어갑니다.
풀은 생애 주기가 짧고 열매 크기도 크지 않아서 이른 봄에 익기도 하고 일 년에 두 번 자라기도 합니다. 나무의 경우 벚나무·산딸기·뽕나무 등 늦봄~초여름에 익는 열매도 몇몇 있습니다만 주로 가을에 익죠. 동물과 달리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은 이 시기에 유일하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익은 열매와 씨앗을 멀리멀리 이동하려고 하는데, 이를 관찰하다 보면 아주 신비롭기까지 하죠.
◇ 씨앗들은 왜 멀리 갈까
식물에게 열매는 사람으로 치면 마치 ‘자식’과 같습니다. 그냥 엄마 나무 곁에서 옹기종기 사이좋게 살면 되는데 굳이 왜 멀리 가는 걸까요? 얼핏 엄마 나무 곁에 있으면 그 그늘에 가려 햇빛을 받기가 어렵고, 형제들끼리 모여 있으면 햇빛·양분 경쟁을 해야겠죠. 하지만 더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도 않아요. 엄마 나무를 벗어나 멀리 가더라도 다른 나무 그늘에 떨어질 수도 있죠. 그래서 어린나무는 그늘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부분 그늘에서 잘 견디는 성질(내음성·耐陰性)을 가져요. 또 땅에 떨어진 씨앗들은 자라기 좋은 환경이 제공될 때 돋아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양분의 경우도 식물 종류마다 양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성분이 크게 다르지 않아요. 주로 질소·인산·칼륨 3가지 거름 성분을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형제간이 아니라도 어딜 가더라도 양분 경쟁은 할 수밖에 없죠. 씨앗이 멀리 가려고 하는 주요 원인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식물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서 위기가 닥쳤을 때 동물처럼 움직이거나 피할 수 없죠. 만약 한곳에 있다 산불이 나거나 병충해가 발생하면 모두 한꺼번에 죽게 됩니다. 그래서 움직일 수 있을 때 최대한 멀리 간격을 벌려 놓아야 해요. 환경적으로 살아남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을 때 종족이 전부 죽지 않게 하기 위해 최대한 멀리 갈 수 있게 열매 모양을 디자인합니다.
◇ 다양한 방법으로 세상에 나가는 씨앗들
가을이 되면 초록색이던 열매가 붉게 혹은 검게 익어갑니다. 색깔이 선명하지 않고 그냥 갈색으로 건조되는 열매들도 많아요.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이동 방법에 따라 열매들이 모두 다른 모양을 한 거죠. 크게 스스로 이동하는 것, 바람·비·물 등 자연을 이용하는 것, 사람·동물을 이용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어떻게 다른 것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이동하냐고요. 봉숭아·괭이밥처럼 ‘톡’ 터져서 씨앗이 멀리 날아가기도 하고, 콩·등나무처럼 꼬투리가 ‘팡’ 뒤틀려 터지면서 날아가기도 하죠. 도토리·밤처럼 딱딱하고 동글동글해서 데굴데굴 굴러 이동하는 것도 있어요. 하지만 스스로 이동하는 열매들은 멀리 가지 못한다는 한계도 있습니다. 그래서 빗물이나 태풍 같은 자연현상의 도움을 2차적으로 받아야 해요.
자연현상은 주로 바람을 이용합니다. 민들레처럼 솜털이 있거나 단풍나무처럼 날개가 있는 경우, 느티나무·피나무처럼 신체의 일부를 날개처럼 이용해 날아가는 것도 있죠. 씨앗의 이동거리로 보면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래서인지 아주 많은 식물이 바람을 이용하죠. 도토리도 주로 스스로 떨어져 굴러가지만 태풍이 불 때면 수십m를 날아가기도 합니다. 코코넛·마름처럼 물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죠.
동물을 이용하는 것도 여러 종류가 있어요. 도꼬마리처럼 갈고리로 동물의 털에 붙어서 이동, 겨우살이·진득찰처럼 끈적거려서 몸에 붙어 이동, 보리수·산수유 열매처럼 빨간색을 띠고 있어 주로 새에게 먹힌 뒤 배설돼 이동, 달콤한 향과 맛으로 후각·미각이 민감한 포유류를 유인해 먹힌 뒤 배설돼 이동하기 등이죠.
애기똥풀·제비꽃의 씨앗은 엘라이오좀(elaiosome)이란 지방체를 갖고 있어요. 종침(種枕)이라고도 하는 지방체로 개미를 유인합니다. 개미가 씨앗을 갖고 가서 지방체는 유충을 먹이고 씨앗은 밖에 버리는 과정에서 번식이 가능하게 되죠. 도토리·밤은 청설모나 어치 등 동물들이 저장했다가 미처 못 먹은 열매에서 싹이 돋아나기도 해요.
이렇게 열매들은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생명체가 이유 없이 디자인되었을까요? 저마다 자기에게 맞는 삶의 방식이 있는 것이죠.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다양한 모양의 씨앗들에게서 그 지혜를 빌려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글·그림=황경택 작가
[출처] 중앙일보 2020.09.21
/ 2021.09.29 옮겨 적음
https://news.v.daum.net/v/20200921090125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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