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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공원산책] (7) 수표교, 사명대사상, 장충단비 (2021.09.11)

푸레택 2021. 9. 11. 19:56

[남산공원산책] (7) 수표교, 사명대사상, 장충단비

△ 일시: 2021.09.11(토) 12:00~17:00

◇ 한양도성 성곽길 남산(목멱산) 구간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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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촬영 2021.09.11(토)

◇수표교(水標橋)

길이 27m, 너비 7m.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원래는 현재의 청계천 2가에 있었으나 1959년에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북악산쪽 신영동으로 옮겨졌다가 1965년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 놓았다. 이때 다리의 서쪽에 있었던 수표석(水標石)은 홍릉의 세종대왕기념관에 옮겨졌다.

1441년(세종 23) 수표(水標)를 만들어 마전교(馬廛橋) 서쪽에 세워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여 홍수에 대비하였다. 수표가 세워지기 이전에 이곳에 우마시전(牛馬市廛)이 있어 마전교라 불리었는데, 그뒤 수표교라 바뀌었고 이 일대 동네를 수표동이라 하였다. 마전교는 1420년(세종 2)에 놓아졌는데 《동국여지승람》 교량조(橋梁條)에는 수표교로 되어 있다. 화강석을 깎아 만든 석재(石材)를 가구식(架構式)으로 짜맞추어 세운 돌다리이다.

기둥의 아래는 거칠게 다듬질 된 네모난 돌로, 위는 고르게 다듬은 네모난 돌로 만들어 2단으로 포개어 쌓았다. 이 가운데 위 4각주(四角柱)는 물의 흐름이 유연하도록 모서리를 물의 방향에 맞추어 배열하였다. 모두 9줄 5열로 배열한 돌기둥 위에는 양 끝을 반원형으로 다듬은 굵고 긴 석재를 세로로 걸쳐놓았고, 그 위에 바닥돌을 가로·세로로 짜맞추어 바닥면을 구성하였다.

바닥의 양쪽 언저리에 돌난간을 세웠는데, 한쪽마다 엄지기둥 11개를 세우고, 그 사이에 동자기둥 1개씩을 세워 6모로 된 난간석을 받쳤다. 난간을 구성하고 있는 부재는 연꽃봉오리·연잎 등을 모티프로 하여 설계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돌난간의 전형적인 형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1760년(영조 36)에 수리되었는데, 이때 다리 앞쪽 하천 바닥에 눈금을 새긴 돌기둥을 세웠다. 이 기둥에는 10척(尺)까지 눈금을 그어 불어나는 물의 양을 측정하게 하였다고 한다.

한편 교각(橋脚)에도 ‘庚辰地平(경진지평)’이라는 글씨를 새겨 수준(水準)으로 삼았다. 1406년(태종 6)에 인공으로 물길을 뚫어 만든 개천 위에는 돌다리 7개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수표교만이 남아 있다. 다리 곳곳에는 ‘丁亥改造(정해개조)’·‘戊子禁營改造(무자금영개조)’ 등의 글씨가 남아 있어서 500여년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수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물길을 건너는 통로로서뿐만 아니라 홍수의 조절을 위하여 수량(水量)을 재는 구실도 하였던 중요한 다리이다. ㅡ 다음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中에서 발췌

◇ 사명대사 유정(四溟大師 惟政) (1544~1610)

조선 중기의 고승. 풍천 임씨. 속명은 응규(應奎). 자는 이환(離幻), 호는 사명당(四溟堂). 또는 송운(松雲), 별호는 종봉(鍾峯). 경상남도 밀양출신. 수성(守成)의 아들이다. 1558년(명종 13)에 어머니가 죽고, 1559년에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

그뒤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1575년(선조 8) 선종의 중망(衆望)에 의하여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를 참구하였다. 1578년부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으며, 1586년 옥천산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하였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의승병 2, 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中和) 사이의 길을 차단하여 평양성 탈환의 전초 역할을 담당하였다. 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

그뒤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가토(加藤淸正)와 회담을 갖고, 특히 2차의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그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討賊保民事疏)를 올렸는데, 이 상소문은 문장이 웅려하고 그 논조가 정연하여 보민토적(保民討賊)의 이론을 전개함은 물론, 그 실천방도를 제시하였다.

그는 국방에 있어서도 깊은 관심을 표현하여 산성수축에 착안하였으며, 항상 산성개축에 힘을 다하였다. 그가 수축한 산성은 팔공산성(八公山城) · 금오산성(金烏山城)·용기산성 (龍起山城) · 악견산성(岳堅山城) · 이숭산성(李崇山城) · 부산성(釜山城) 및 남한산성 등이다. 그리고 군기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부근의 야로(冶爐)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고,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하여 화약제조법과 조총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하였다.

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가서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1604년 8월 일본으로 가서 8개월 동안 노력하여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하였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하였다. 그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 26일 설법하고 결가부좌한 채 입적하였다. 제자들이 다비하여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 7권과 《분충서난록(奮忠서難錄)》 1권 등이 있다. ㅡ 다음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中에서 발췌

◇ 장충단(奬忠壇)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는 대한제국기 을미사변·임오군란으로 순사(殉死)한 충신·열사를 제사지내던 제단. 공원.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가 살해된 지 5년 뒤인 1900년 9월, 고종은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장충단을 꾸며 사전(祠殿)과 부속건물을 건립, 을미사변 때 순사한 장졸들의 영혼을 배향하여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처음에는 을미사변 때 전사한 시위대장 홍계훈(洪啓薰), 갑오년에 순직한 영관(領官) 염도희(廉道希)·이경호(李璟鎬)를 주신으로 제향하고 대관(隊官) 김홍제(金鴻濟)·이학승(李學承)·이종구(李鍾九) 등 장병들을 배향하여 제사지냈다. 그러나 ‘창선(彰善)·표충(表忠)의 일이 어찌 군인에게만 한할 것이랴.’는 육군법원장(陸軍法院長) 백성기(白性基)의 제청에 의해 다음해부터 을미사변 때 순국한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을 비롯해 임오군란·갑신정변 당시에 순의(殉義), 사절(死節)한 문신들도 추가되어 문무의 많은 열사들이 장충단제향신위(奬忠壇祭享神位)에 포함되었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군악을 연주하고 군인들이 조총(弔銃)을 쏘았다. 그러나 1910년 8월 장충단은 일제에 의해 폐사되고 말았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이곳 일대를 장충단공원으로 이름하여 벚꽃을 심고 공원시설을 설치하였으며, 상해사변(上海事變) 당시 일본군인 결사대로 전사한 육탄삼용사의 동상과 이토(伊藤博文)의 보리사(菩提寺)인 박문사(博文寺)를 건립하였다.

광복 후 육탄삼용사의 동상과 박문사는 철거되었다. 6·25전쟁으로 장충단 사전과 부속 건물은 파손되었으나 장충단비(奬忠壇碑: 서울특별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호)는 남아 있다. 이 비는 원래 영빈관 내에 있었는데, 1969년 지금의 수표교(水標橋: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서편으로 옮겼다. 비의 ‘奬忠壇(장충단)’ 세 글자는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쓴 글씨이며, 뒷면에는 민영환(閔泳煥)이 쓴 143자의 찬문(撰文)이 새겨져 있다. 정부수립 후 장충단공원 경내에는 여러 공원시설이 들어섰다. ㅡ 다음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中에서 발췌

https://youtu.be/dTYv3OvttbA

https://youtu.be/tM6taVktplM

https://youtu.be/NWv6aEYDcd8

https://youtu.be/siKFnQV1ydI

https://youtu.be/6-7C_HMhRc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