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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공원산책] (6) 국궁장 석호정, 이한응 열사비, 이준 열사 동상,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 (2022.09.11)

푸레택 2021. 9. 11. 19:52

[남산공원산책] (6) 국궁장 석호정, 이한응열사비, 이준열사상,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

△ 일시: 2021.09.11(토) 12:00~17:00

한양도성 성곽길 남산(목멱산) 구간 걷기

집 출발~마곡나루역(공항철도)~서울역~강우규 동상~서울로 7017~서울역옥상공원~회현동~한양도성 남산(목멱산)길~이시영 선생 동상~백범 김구 선생 동상~백범광장~호현당~안중근 의사 동상~안중근의사기념관~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한양도성 현장 유적박물관~조선신궁 배전터~방공호~각자성석~잠두봉전망대~한양도성~중앙계단길~남산케이블카~팔각정~목멱산(남산)봉수대~전망데크~팔각광장~남산 N서울타워~서울의중심점~남산서울타워버스종점~사잇길~실개천~황톳길~석호정(국궁장)~동국대학교 입구~장충어린이야구장~이한응 열사 동상~이준 열사 동상~사명대사 동상~수표교~생태연못~장충단비~동대입구역(6호선)~마곡나루역~집 도착

/ 사진 촬영 2021.09.11(토)


◇ 석호정(石虎亭)

남산 중턱에 위치하며 남산국립극장 뒤쪽에 자리 잡고 있다.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황학정이 조선시대의 왕들과 문무백관들이 활을 쏘던 곳이었던 것에 반해 민간인들이 주로 활을 쏘던 곳이었다. 역사가 아주 오래되어 정확한 시초를 짐작할 수는 없다. 6·25전쟁 때 건물과 모든 자료가 없어졌으나 1956년 이곳에 있던 노인정을 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고쳤다. 지금도 활쏘기를 하려는 사람들이 찾는다. ㅡ 다음백과 《두산백과》

◇ 이한응(1874년 9월 21일 ~ 1905년 5월 12일)은 순국열사이다. 본관은 전의, 자는 경천, 호는 국은이다.

경기 용인 군수였던 이경호의 아들인 그는 1892년 한성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고 1894년 진사시에 합격했다. 아버지 이경호가 동학 농민 운동에서 농민군을 진압하던 도중 황토현 전투에서 전사한 뒤 1899년 한성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선출됐다. 1901년 3월 영국·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 참사관으로 임명되어 영국 런던에 공사 민영돈과 함께 부임했다. 1903년 통정대부에 오르고 1904년 주영공사 민영돈의 귀국으로 서리공사가 됐다,

1904년 1월 13일 이한응은 영국 대외사무소(Foreign Office)를 방문해 한반도 정세분석에 관한 10쪽의 서한과 메모를 전달하는 것으로 공사 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서한에서 극동정세가 급속도로 변하고 있다고 지적했으며, 영국 정부에게 극동지역 특히,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요망했다. 한국의 독립과 주권 그리고 영토보존 보장 등 5개항을 영국 정부가 보장해 주도록 요청했다.

1904년 8월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자 각국에 주재하는 한국 공사들에게 연락해 재외한국공관이 공동으로 노력해 주권 수호에 힘쓸 것을 호소했다. 1905년 일본이 한국에서의 지도·감독·보호를 인정하는 새로운 영일동맹(제2차 영일동맹)을 맺으려는 영국과 일본 간의 비밀외교가 진행되자, 이 조약이 동양 평화를 침해하는 것이라 하여 영국정부에 항의했다. 그러나 영국정부는 냉담했고 오히려 일본과 비밀리에 연락해 그를 축출하려 했다. 그는 약소국의 대표였고 예상대로 영국 정부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나라의 외교권이 빼앗기는 을사늑약을 앞두고 1905년 5월 12일 이한응은 영국 런던에서 음독자살로 순국했다. 이한응의 자결은 국권 박탈에 대한 최초의 자결이었으며 ‘대한매일신보’ 등 국내 언론기관에 상세히 보도되어 일제침략에 반대하는 민족운동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계기가 됐다. 당시 고종의 특명으로 시신은 용인으로 옮겨져 안장되고 장충단 배향 및 내부협판에 추증됐다. 1962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ㅡ 다음백과 《위키백과》 中에서 발췌

◇ 이준(李儁)

한말의 항일애국지사. 독립협회에 참여하고, 개혁당, 대한보안회, 공진회,헌정연구회 등을 조직했다. 보광,오성학교를 세웠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위종 등과 합류했으나, 일본측의 방해로 참석 못하고 순국했다.

호 일성(一醒)·해사(海史)·청하(靑霞)·해옥(海玉). 본명 순칠(舜七). 초명 성재(性在)·여천(汝天)·선재(璿在). 함경남도 북청(北靑)에서 출생하였다. 29세에 북청에서 초시(初試)에 합격, 1894년(고종 31) 함흥 순릉참봉(純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상경, 이듬해 신설된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에 들어가 6개월 후에 졸업하고, 1896년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 검사보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조신(朝臣)들의 불법과 비행을 들추어 파헤치다가 그들의 면관(免官) 운동 때문에 취임 1개월 만에 면직되고 곧 독립협회에 가담, 평의장(評議長)으로 활약하다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7년(광무 1)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에 들어가 이듬해 졸업하고 귀국, 다시 독립협회 일을 보다가 무고로 간부 17명과 함께 피체, 수개월 후 석방되었다.

1899년 독립협회가 강제해산되자 민영환(閔泳煥)·이동휘(李東輝)·이상재(李商在) 등과 비밀결사 개혁당을 조직, 러일전쟁 후 일제의 한국침략과 친일 주구(走狗)들의 활동이 노골화하자 대한보안회(大韓保安會)를 조직하여 황무지 개척권을 얻으려는 일제의 음모를 폭로하고 일진회(一進會)와 대항하여 공진회(共進會)를 조직, 회장에 추대되었다. 친일대신(親日大臣) 5명을 성토하다가 피체, 철도(鐵島)로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민영환·이용익(李容翊)의 주선으로 석방된 후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여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로 발전시켰다.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하여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세웠고 함경도 출신 유학생 장학회인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 뒤에 이를 서우학회(西友學會)로 발전시켜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세웠다. 그 해 평리원(評理院)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검사가 되어 상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재판하다가 미움을 받아 8개월 만에 평리원에 피검, 고종의 특명으로 석방되어 검사에 복직되었으나 법무대신의 책동으로 곧 파면되었다.

1907년 6월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밀령(密令)으로 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 등과 합류, 헤이그에 도착했으나 일본측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그동안 헤이그에 묻혀 있던 유해는 1963년 서울 수유리 묘지로 이장되었다. ㅡ 다음백과 《두산백과》 中에서 발췌

◇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한국 유림은 파리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제출해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떨친 공헌을 한 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통령희사금과 국민의 성금 등으로 1972년 10월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에 비를 건립하였다.파리 장서(長書)는 일제의 한국 주권 찬탈 과정을 폭로하고 식민 지배의 불법성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여 한국의 모든 계층과 사회 집단이 독립을 열망하고 있음을 국내외에 널리 알렸던 서한이다.곽종석, 김복한을 비롯하여 유림 대표 137명이 연서한 이 장서를 김창숙으로 하여금 상해로 가져가도록 하였고 이를 다시 김규식을 통하여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되었으며 또한, 각국 대표와 외국 공관과 국내 각지의 향교에도 배포되었다.일본은 파리장서 운동에 참가한 유림들은 체포 투옥하는 등 가혹하게 탄압하였으며(제1차 유림단 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유림계는 한말 구국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ㅡ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협회(1973.10.03. 건립)

https://youtu.be/dTYv3OvttbA

https://youtu.be/tM6taVktplM

https://youtu.be/NWv6aEYDcd8

https://youtu.be/siKFnQV1ydI

https://youtu.be/6-7C_HMhRcg

https://youtu.be/iMJUPv_JUL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