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협한 이타성/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우리는 대개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종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기독교인의 절반 이상이 어머니로부터 종교를 물려받는다. 열 명 중 여덟 명의 불교인이 어머니와 종교가 같다. 종교는 어느 정도 ‘초깃값’이다. 종교의 선택을 유보하다가, 19세가 되어서야 여러 종교 중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라는 문화는 없다. 역사적으로 종교는 가족의 전통이자 집단의 의무였다. 개종은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광장에 목이 내걸리거나 황야로 추방될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지금도 일부 문화에서는 여전히 그렇다.
하지만 이제 대부분의 사회에서 종교는 개인의 자유다. 조금 옛날 자료이지만, 2005년 한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종교인의 16.2%가 개종한 종교인이었다. 지금은 훨씬 높을 것이다. 기존 종교의 입장에서는 배교요, 새 종교의 입장에서는 회심이다. 교세가 약화하는 입장에서는 배교자를 간단히 화형에 처하던 과거를 추억할지도 모르지만, 이제 그럴 수 없다. 종교는 개인적 선택이 되었다.
국적도 그렇다. 매년 1만명이 한국 국적을 얻는다. 국적을 잃는 사람은 매년 2만명이 넘는다. 국적 규정이 까다롭다는 우리나라가 이 정도다. 미국이나 유럽연합에서는 매년 7만~80만명이 새로 국적을 얻는다. 종교도, 국적도 쉽게 바꾸는 세상이다. 이들을 배교자 혹은 반역자라고 비난하면 곤란하다.
그런데 정당이라면 어떨까? 정치는 자원 할당에 관한 집단적 결정 과정이다. 따라서 진화인류학적으로 자신과 친족, 집단에 가장 이득이 되는 정책을 가진 정당을 그때그때 지지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종종 우리는 특정 정파를 ‘무조건’ 지지한다. 종종 명백하게 잘못된 정책을 펴거나 심지어 자국민에게 심각한 손해를 끼치어도 말이다. 아니, 일반인이 정당에 충성해서 도대체 뭘 얻는가? 막상 국회의원도 맨날 정당을 바꾸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임 향한 일편단심’이다.
만약 지지하던 정당이 기존 정책을 정반대로 바꾸면, 지지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바꿀까? 아니면 지지 정당을 바꿀까? 플로리다대 토머스 카시의 연구 결과가 놀랍다. 대개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바꾸고, 지지 정당에는 변함없는 박수를 보냈다.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갑자기 목탁을 두드리는데, 신자들은 이제 절이 된 교회에 여전히 출석하는 꼴이다. 정책의 실질적 이득보다는 정치적 동맹 집단의 결속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 이런 이상한 일이 발생할까? 인류는 오랜 세월 동안 작은 규모의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군 복무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소부대 전투의 핵심 원칙은 ‘무조건 단결’이다. 소대장이 영 미흡해도, 소대 작전이 영 허술해도 말이다. 전투가 한창인데, 소대원이 소대장을 배반한다면 필경 전멸할 것이다. 인류학자 리처드 랭엄의 《침팬지 모델》에 의하면, 인간은 작은 소속 집단을 위해 자신이나 가족의 이득을 희생하는 본성이 있다. 게다가 더 큰 집단, 즉 국가나 인류 전체의 이득도 기꺼이 희생한다. 이른바 ‘편협한 이타성’ 이론이다.
편협한 이타성은 ‘변절’을 막는 원시적 본성이다. 작은 무리를 이루고 살던 때에는 유용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국가의 운영은 소대의 운영과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소집단에 편협한 이타성을 보인다. 스탠퍼드대 제프리 코헨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는 ‘지지 정당의 정책은 무조건 지지하고, 반대 정당의 정책은 무조건 반대’한다. 사실 반대 정당의 지지자보다 더 미운 녀석은 바로 ‘변절자’다. 화형까지 당하지는 않겠지만, 오랜 벗들은 떠나고 삶은 무척 외로워질 것이다.
한때는 종교도, 국가도 바꿀 수 없었다. 이제는 아니다. 뭔들 못 바꾸겠는가? 자신과 가족이 정파보다 중요하고, 국가와 인류 전체가 정당보다 중요하지 않은가? 편협한 이타성은 좋아하는 야구팀을 응원할 때나 발휘하자.
글=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출처] 경향신문 & 경향닷컴 2021.07.20
/ 2021.09.06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