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화가의 멋진 우정 '시화환상간'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 시와 그림을 바꾸어 감상하다. “나의 시와 그대의 그림을 서로 바꾸어서 보니 그 둘의 가벼움과 무거움의 가치를 어찌 말로 논할 수 있으랴”
◇ 시는 그림이 되고 그림은 시가 되고
오늘은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을 주제로 꾸며진 도심 속 쉼터, 선두암공원을 찾아나섰다. 지난 토요일(21.08.14) 고교 친구들과 함께 겸재정선미술관과 궁산 소악루를 탐방했다. 그때 함께 들르지 못한 선두암공원을 오늘 산책도 할 겸 찾아가 보았다.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가 겸재 정선은 양천현령으로 근무하면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 궁산 소악루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소악루에서 내려다 보는 한강 주변의 풍광이 말 그대로 절경(絶景)이었다. 소악루에는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중 한강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린 그림 《소악후월》(小岳候月)과 《안현석봉》(鞍峴夕烽) 두 작품이 사천 이병연의 시와 함께 게시되어 있다.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재 정선(1676~1759년)과 진경시(眞景詩)의 거장인 사천 이병연(1671~1751년)은 어려서부터 서촌(西村)의 한 동네에 살면서 동문수학(同門修學)한 이래 평생지기로 지내온 사이였다. 이병연이 정선보다 5살 연상이지만 두 사람은 아주 가깝게 사귀고 정이 두터운 절친(切親)이었다. ‘그림이 가면 시가 오고, 시가 가면 그림이 오는’ 마음이 통하는 친구였다. 당시 “시는 사천, 그림은 겸재 아니면 쳐주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의 시와 그림이 유명하였다고 한다.
◇ 살아 숨쉬는 작품 ‘시화환상간 미디어월’
양천향교역(9호선)에서 내려 7번 출구로 나와서 조금 걸어가니 선두암공원이 나온다. 전통마당과 정자 그리고 강서의 모습을 표현한 겸재 정선의 작품이 어우러진 전통문화공원이다. 전통기와로 담장을 둘렀고 시화정(詩畵亭)이라는 정자 앞에 넓은 전통마당이 펼쳐져 있다. 시화정이라는 정자 이름은 화가 정선과 시인 이병연의 ‘시화환상간’에서 따온 듯하다. 도로변를 따라 겸재의 진경산수화와 이병연의 제화시가 전시되어 있다. 조형물에 새겨진, 옛 시인과 화가의 멋진 우정이 깃든 ‘시화환상간’이라는 글귀가 내 가슴을 뛰게 한다.
‘시화환상간 미디어월(Media Wall)’에는 《경교명승첩》 33폭 중 양수리에서 양천에 이르는 한강 주변의 풍경을 담은 작품 10편을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양천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을 담은 그림 《양천팔경》(陽川八景)이 펼쳐져 있고, 어린이들이 그린 산수화 그림들이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정자 시화정은 코로나19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입구를 테이프로 막아 놓았다.
‘선두암공원’이라는 이름은 세종대왕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년)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효령대군은 개국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숭상하며, 궁산 서쪽 양천 후포리 산줄기에 ‘춘조정’에서 수도(修道)하였다고 한다. 당시 춘조정 정자가 있던 곳이 궁산 ‘선두암’이다. 선두암은 88올림픽 고속도로 개설공사로 사라졌지만, 마곡의 공원 이름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오늘은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을 주제로 꾸며진 도심속 쾌적한 전통문화의 공간인 선두암공원을 찾아 《경교명승첩》의 진경산수화와 《양천팔경》을 감상하며 겸재 정선과 사천 이병연의 ‘우정’을 마음에 담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 보이는 만큼 느낀다”고 했던가. 시와 그림의 세계를 알아가는 기쁨과 즐거움이 크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볍다.
선두암공원은 양천향교역(9호선) 7번 출구로 나와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다. 마곡나루역 서울식물원에서 산책 삼아 걸어갈 수도 있다.
/ 2021.08.18(수) 글=김영택
◇ 불교의 수호자, 효령대군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년)은 조선의 3대왕인 태종(太宗)의 둘째 아들이다.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동생이자 충녕대군(忠寧大君)의 형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하여 30세 전에 이미 학문과 덕성을 이룩하였고 붓글씨에도 능해 명필이었다고 전해진다. 활쏘기에도 능숙하였고, 우애가 깊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왕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그는 불교를 숭상하여 승도를 모아 불경을 강의하였다. 조정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하에서도 불교 보호의 방패 역할을 감당하였다. 많은 사찰을 순회하면서 신도들을 온후하게 계도하였다.
효령대군은 아버지 태종의 의중을 헤아려 아우인 충녕대군(세종대왕)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왕위를 양보한 효령은 전국을 떠돌며 불교(佛敎)에 심취하였다. 91세로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났다. 현재 서초구 방배동에 예장되었다. 묘소는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슬하에 7남을 두었으며 생전에 손자 33명, 증손자 109명으로 후손이 번성하였다. 자손이 가장 번창한 가문이라고 한다. (다음백과 위키백과 참고)
‘시화환상간’의 이해를 돕는 좋은 글이 있어 그대로 옮겨 실어본다. 이인숙 미술연구가의 칼럼 ‘옛그림 예찬 정선의 시화환상간’이다.
◇ 옛그림 예찬, 정선의 ‘시화환상간’
맨 머리를 드러낸 소탈한 차림의 두 노인이 두루마리를 펴 놓고 냇가 소나무 아래 풀밭에 마주 앉아 있다. 한 사람은 화가 정선이고 한 사람은 다섯 살 위인 시인 이병연이다. 두 분은 한 동네에 살았는데 정선이 경기도 양천 현령으로 떠나게 되자 두 노대가는 서로의 소식을 시와 그림으로 전하기로 한다. 30대부터 그림으로 명성을 얻은 정선이 66세, 이병연이 71세 때인 1741년(영조 17년)이었다.
정선은 한강 주변의 명승지를 화폭에 담아 이병연에게 보냈고, 이병연은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보냈다. 두 분은 시중유화(詩中有畵) 화중유시(畵中有詩)의 이상을 공유하며 서로의 실력을 겨루었다. 그림이 가면 시가 오고, 시가 가면 그림이 오는 ‘시거화래’(詩去畵來)의 왕복에서 탄생한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첫 머리에 이병연이 아래의 시를 써서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아시군화환상간(我詩君畵換相看)
경중하언논가간(輕重何言論價間)
시출간장화휘수(詩出肝腸畵揮手)
부지수이갱수난(不知雖易更雖難)
나의 시와 그대 그림을 서로 바꿔보는데
경중을 어떻게 말로 할 수 있으며 값으로 따질 수 있겠는가
시는 마음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으로 휘두르는데
어느 것이 쉽고 어느 것이 어려운지 알 수 없다네
정선이 ‘시화환상간’에 써 넣은 화제(畵題)는 위의 이병연 시 중 앞 두 구절이다. 정선은 자연과 인생에 대한 철학적 세계관을 나타내는 중국풍 관념산수가 주류를 이루며 실제의 경치인 실경(實景), 진경(眞景) 그리기가 약했던 조선 산수화에서 우리 산천을 그림으로 옮긴 ‘진경산수’로 한국회화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정선이 진경산수라는 새로운 모델을 창안할 수 있었던 것은 공력의 지극함은 붓이 무덤을 이룰 정도였던 평생의 노력과 이병연을 비롯한 문인, 사대부 지식층과 교류하며 당대의 문예흐름과 시대정신을 흡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선이 부임했던 양천현은 지금의 서울 강서구 가양동 일대인데 2009년 겸재정선미술관이 강서구 궁산 자락에 개관했다.
글=이인숙 미술연구가(매일신문)
https://blog.daum.net/mulpure/15856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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