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그 사람' 허홍구,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기철, '냉이 꽃 한 송이 때문에' 손택수 (2021.08.18)

푸레택 2021. 8. 18. 14:33

■ 냉이 꽃 한 송이 때문에 / 손택수

골목 담벼락 아래 어제 못 본 냉이꽃이 피었다
사람들은 꽃이 핀 걸 모르고 그냥 지나간다

애써 피었는데 섭섭하지 않을까
냉이 꽃 때문에 저 무뚝뚝한 담벼락도 조금은 향긋해져서
나비가 날아올 것 같고,
나비 따라 벌도 붕붕거릴 것 같은데

탐험가들이 꼭 이런 마음이겠지
새로 발견한 풍경 앞에서 절로 가슴이 뛰겠지
오늘은 꽃이 나를 탐험가로 만들어주어서
여기가 나의 신대륙, 꿈에만 그린 오지

매일같이 지나치던 골목이 처음 가는 길처럼 두근거린다
저 째그만 냉이 꽃 한 송이 때문에

ㅡ 시집 《나의 첫 소년》 (창비교육, 2017)

■ 그렇게 하겠습니다 / 이기철

내 걸어온 길 뒤돌아보며
나로 하여 슬퍼진 사람에게 사죄합니다
내 밟고 온 길
발에 밟힌 풀벌레에게 사죄합니다
내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상처받은 이
내 길 건너며 무표정했던 이웃들에
사죄합니다
내 작은 앎 크게 전하지 못한 교실에
내 짧은 지식 신념 없는 말로
강요했던 학생들에 사죄합니다

또 내일을 맞기 위해선
초원의 소와 순한 닭을 먹어야 하고
들판의 배추와 상추를 먹어야 합니다

내 한 포기 꽃나무도 심지 않고
풀꽃의 향기로움만 탐한 일
사죄합니다
저 많은 햇빛 공으로 쏘이면서도
그 햇빛에 고마워하지 않은 일
사죄합니다

살면서 사죄하면서 사랑하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ㅡ 시집 《가장 따뜻한 책》 (민음사, 2005)

■ 그 사람 / 허홍구  

급하다고 - 꼭 갚겠다고- 날 못 믿으시냐고  
그래서 가져간 내 돈 2천만 원
자식들에게도 내가 돈이 어딨노 했고
마누라도 모르는 내 쌈짓돈 그 돈 그만 떼이고 말았다

애타게 찾던 그 사람
몇 개월 만에 전화가 왔다
제가 그 돈은 꼭 갚아야 한다며
은행 통장번호를 알려 달란다
자기 식당 말아먹고 남의 집에서  
하루 일당 5만원을 받아
어떤 날은 3만원을 
또 어떤 날은 2만원을 통장으로 넣어준다   

오늘도 그 사람 행방은 모르고
눈물 3만원어치를 받았다  
기쁨도 3만원어치 받았다
돈보다 귀한 눈물을 받았다  

내게 그 눈물은 행복이다
나도 눈물 3만원어치를 보낸다   

ㅡ 시집 《시로 그린 인물화》 (북랜드2012)

/ 2021.08.18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