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추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 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비가 내린다. 비 한 번 내릴 때마다 봄은 십 리씩 깊어진다는데 이 비 그치고 나면 서울에도 봄빛이 가득 차서 출렁일 것이다. 100년 만에 제일 빠르게 꽃을 피웠다는 벚꽃은 서울에도 이미 피기 시작했다. 그 중엔 벌써 내리는 비에 꽃잎을 흩어놓는 성질 급한 녀석들도 있다. 이젠 일부러 꽃을 찾아 나서지 않아도 문밖만 나서면 세상이 온통 꽃 대궐 속이다. 새로 피어나는 꽃을 볼 때마다 휴대폰을 꺼내어 사진을 찍다 보니 휴대폰 속엔 예쁜 꽃 사진들로 넘쳐난다. 틈틈이 찍은 꽃 사진들을 친구들과 문자를 주고받을 때 함께 보내주면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좋아들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만남도 쉽지 않고 꽃구경을 나서기도 쉽지 않은 수상한 시절이라 그런 것이리라.
눈길 닿는 곳마다 꽃이 보이는 요즘에는 천지간이 온통 꽃으로 채워진 듯하다. 일일이 이름을 부를 수 없을 만큼 수많은 꽃이 소리 없이 피어나 칙칙한 세상을 환하게 밝히고 있다. 마냥 어여쁘고 환한 낯빛으로 우리의 마음까지 환하게 해주는 봄꽃들을 보고 있으면 세상의 근심쯤은 저만치 미뤄두고 나도 한 그루 꽃나무가 되어 그 곁에 서 있고 싶어진다. 하지만 열흘 붉은 꽃은 없다는 말처럼 꽃 시절은 한순간이다. 우리가 꽃나무라 지칭하는 나무들도 가지에 꽃을 달고 있는 시간은 일 년 중 고작 열흘 남짓에 불과하다. 그 화려한 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꽃필 때까지 묵묵히 비바람을 견디며 인내해야만 하는 것이다.
화르르 피어났다가 비바람에 속수무책으로 흩날리는 꽃잎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꽃이 져야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오랜 시간을 꽃을 보며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세상의 모든 꽃은 열매를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보다 튼실한 열매를 맺기 위해 꽃은 피어나고, 열매를 통해 다음 세대를 이어가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꽃을 피우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아무리 화려한 꽃도 결과물이 아니라 열매에 이르기 위한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열매보다 꽃에 더 매료되는 것은 꽃이 지닌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 때문이다.
담배를 피우려고 문밖을 나섰다가 비를 맞고 서 있는 대추나무를 보았다. 백목련과 살구나무, 앵두나무. 명자나무 등 모든 나무가 저마다 자랑처럼 꽃을 내어 달기 시작했는데 유독 대추나무 혼자만이 겨울을 품고 있는 듯 꿈쩍도 하지 않는다. 언뜻 보면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대추나무는 아직도 느긋하게 겨울잠을 자고 있는 늦잠꾸러기일 뿐이다. 세상의 속도에 휘둘리지 않고 남들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포기할 때쯤 그제야 싹을 틔운다. 연두의 시간을 지나 신록이 초록으로 짙어질 즈음에서야 꽃을 피운다. 꽃도 작고 잎과 비슷한 연두색이라서 잘 눈에 띄지도 않는다. 남들이 보기엔 답답하리만큼 마냥 게을러 보이는 대추나무지만 과일나무 중 가장 늦게 잎과 꽃을 피우지만, 가을이면 누구보다 풍성하게 열매를 내어달고 감이나 밤보다 먼저 익는다.
흔히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한다. 빨리 피는 꽃을 부러워하지도 않고 화려한 꽃을 보고도 주눅 드는 법도 없이 묵묵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대추나무를 생각하며 나의 사람을 되돌아본다. 세상의 모든 식물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우리도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빨강머리 앤'을 쓴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인생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근사하다. 왜냐면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니까."라고 말했다. 살다보면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수많은 난관을 만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주위에 휘둘림 없이 자신을 신뢰하고 대추나무처럼 자신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글=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
[출처] 글로벌이코노믹 2021-03-31
/ 2021.07.28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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