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살다가 문득' 김경훈, '봄날 피고 진 꽃에 대한 기억' 신동호, '안부가 그리운 날' 양현근 (2021.04.14)

푸레택 2021. 5. 14. 20:20

■ 살다가 문득 / 김경훈

살다가 보면 문득
안부가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
어쩔 수 없이 비켜간 사람
다 읽지도 못하고 접어버린 신문처럼
그 마음을 다 읽지도 못하고 접어버린 인연

살다가 보면 문득
그 사람을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은 순간이 있다
산다는 것이 그런 거야
혼자만의 넋두리처럼 흥얼거리다가
다시 펼쳐보는 앨범속 사진처럼
다시 걸어보고 싶은 그 때 그 길 그 사람

붉은 노을에 기대어
조용히 물들어가는 저녁 무렵
그 어깨 그 가슴에 다시 기대어
한번 울어보고 싶은
살다가 보면 문득
그런 기막힌 순간이 있다

■ 봄날 피고 진 꽃에 대한 기억 / 신동호

나의 어머니에게도 추억이 있다는 걸
참으로 오래 되어서야 느꼈습니다

마당에 앉아 봄나물을 다듬으시면서
구슬픈 콧노래로 들려오는 하얀 찔레꽃

나의 어머니에게도
그리운 어머니가 계시다는 걸
참으로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시며 부르는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손은 나물을 다듬으시지만 마음은 저편
상고머리 빛바랜 사진 속의 어린 어머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아
어머니의 둥근 등을 바라보다 울었습니다

추억은 어머니에게도 소중하건만
자식들을 키우며
그 추억을 빼앗긴 건 아닌가 하고
마당의 봄 때문에 울었습니다

■ 안부가 그리운 날 / 양현근

사는 일이 쓸쓸할수록
두어 줄의 안부가 그립습니다
마음 안에 추절추절 비 내리던 날
실개천의 황토빛 사연들
그 여름의 무심한 강역에 지줄대며
마음을 허물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완전하게 벗는 일이라는 걸
나를 허물어 너를 기다릴 수 있다면
기꺼이 죽으리라고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내릴 거라고

사는 일보다 꿈꾸는 일이
더욱 두려웠던 날들
목발을 짚고 서 있던 설익은 시간조차도
사랑할 줄 모르면서 무엇인가
담아낼 수 있으리라 무작정 믿었던 시절들
그 또한 사는 일이라고

눈길이 어두워질수록
지나온 것들이 그립습니다
터진 구름 사이로 며칠 째
먹가슴을 통째로 쓸어내리던 비가
여름 샛강의 허리춤을 넓히며
몇 마디 부질없는 안부를 묻고 있습니다

잘 있느냐고...

/ 2021.05.14 편집 택

https://youtu.be/Y1tu3NL9RZY

https://youtu.be/CDU5okmLKC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