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억- '감자 먹는 사람들' 빈센트
반 고흐 / 정진규
식구들은 둘러앉아
삶은 감자를 말없이 먹었다
신발의 진흙도 털지 않은 채
흐린 불빛 속에서
늘 저녁을 그렇게 때웠다
저녁 식탁이
누구의 손 하나가 잘못 놓여도
삐걱거렸다
다만 세째 형만이
언제고 떠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된 나날이었다
잠만은 편하게 잤다
잘 삶아진 굵은 감자알들처럼
마디 굵은 우리 식구들의 손처럼
서걱서걱 흙을 파고 나가는
삽질소리들을 꿈 속에서도 들었다
누구나 삽질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맛있는 잠! 잠에는
막힘이 없었다
새벽에는
빗줄기가 조금 창문을 두드렸다
제일 부드러웠다
새싹들이 돋고 있으리라 믿었다
오늘은 하루쯤 쉬어도 되리라
식구들은
목욕탕엘 가고 싶었다
ㅡ《시집 반 고흐》(1987) 수록
*빈센트 반 고흐(1853~190) : 19세기 후반 네덜란드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 네덜란드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한 후 프랑스에서 인상파 화가들을 만나면서 그의 독특한 붓놀림으로 자연의 형태와 색채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개성적인 화풍이 확립하었다. 주요 작품은 '자화상'과 '해바라기 연작', '별이 빛나는 밤' 등이 있다.
*감자 먹는 사람들 : 빈센트 반 고흐의 전기 작품(1884). 반 고흐의 첫 번째 걸작으로 노동하는 사람들의 정직한 삶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작품.
▲ 이해와 감상
1987년에 발표된 정진규의 이 시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을 창작 모티프로 삼아 쓴 시로, 고단한 노동에 지쳐 잠과 휴식을 소망하며 살았던 과거의 가난한 가족의 일상을 회상하고 있다.
고흐는 '감자 먹는 사람들'이라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램프 불빛 아래서 감자 접시 하나를 두고 감자를 집어먹는 사람들을 강조하고 싶었다. 몸소 일하면서 정직하게 식량을 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 보고 싶었다.”고 쓴 바 있다. 이 시 또한 정직한 노동을 통해 식량을 구하고, 휴식의 달콤함을 꿈꾸는 정직하고 소박한 삶을 그려내고 있다.
화자는 직접 드러나지 않으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라는 회화 작품과 시인의 유년 경험을 조합하여 쉬운 일상어를 사용하여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가족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상징적 소재를 사용하여 시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시인이 빈센트 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라는 작품에서 모티프를 얻어 창작한 작품이지만, 단순히 고흐의 그림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에 구체성을 더하여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모두 3연으로 된 이 시는 1연에서는 가난한 가족의 저녁 식사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밥 대신 ‘삶은 감자’로 저녁을 때우고, ‘신발의 진흙’도 털지 않은 채 ‘흐린 불빛’ 아래에서 아무 말 없이 저녁을 먹는 가족의 모습을 통해 노동으로 지친 가난하고 고단한 삶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지친 상태 혹은 격한 배고픔 때문으로, 이것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운명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셋째 형만이 ‘언제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은 형제 중에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음을 드러낸다.
2연에서는 고단한 노동으로 길들여진 가족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굵은 감자알들’처럼 마디가 굵어진 식구들의 손은 노동으로 길들여져 거칠지만 건강한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특히 흙을 파나가는 삽질 소리를 ‘꿈속에서도 들었다’라고 하거나 ‘우리는 타고난 사람들이었다’고 하는 진술들은 일상적인 노동에 익숙해진 모습이며, 특히 ‘삽질 소리들을 꿈속에서도 들었다’는 표현을 통해 독자들은 일하는 시적 자아의 가족들이 얼마나 일에 몰두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일하는 것에 있으며, 그런 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순박하고 정직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맛있는 잠’을 통해 고된 노동의 고통을 역설적으로 강조하여 잠을 통해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3연에서는 새로운 시적 상황을 설정하여 노동하는 사람들의 소박한 휴식의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다. 새벽에 내리는 ‘비’는 밖에서 일해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대상으로, 이는 ‘새싹’을 돋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새싹’은 화자를 비롯한 식구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는 것으로, 이들은 ‘새싹’을 떠올리며 ‘오늘 하루쯤은 쉬면서 목욕탕에 가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낸다.
이 시는 1, 2연에서 다양한 소재를 활용하여 가난과 노동으로 고단한 삶을 살았던 일가족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3연에서는 ‘비’라는 새로운 시적 상황을 설정하여 고된 삶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휴식을 기대하는 모습을 쉬운 일상어로 차분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작자 정진규(鄭鎭圭, 1939~2017)
시인. 경기도 안성 출생.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나팔 서정'이 당선되어 문단에 등장했다. 정신적 각성과 자기 확인의 과정을 시에 담고자 하였다. 시집으로 《마른 수수깡의 평화》(1966), 《유한의 빗장》(1971),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1977), 《매달려 있음의 세상》(1979), 《비어 있음의 충만을 위하여》(1983), 《연필로 쓰기》(1984), 《뼈에 대하여》(1986), 《몸詩》(1994), 《우리나라엔 풀밭이 많다》(2008) 등이 있다.
ㅡ 작성 : 남상학 시인 (옮겨온 글)
/ 2020.12.25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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