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탑, 마루나무, 저수지에 빠진 의자 유종인 (2020.12.23)

푸레택 2020. 12. 23. 17:37

■ 탑 / 유종인

새벽에 상가 골목을 걸었다
하얀 플라스틱 의자 열댓 개가
층층이 포개진 채
굵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의자 위에 의자가 앉아 있고
의자 위에 앉은 의자 위에 또 다른 의자가
앉아 있는 꼴이 계속 높아진다

의자가 제 안에 의자를 앉히는 것보다
사람이 제 안에 사람을 품는 것이 아득해서
새벽에 몰래 잠든 딸애를 안아본다
오래도록 빈 둥지였구나

마음을 비우는 것보다
마음을 채우는 것이 더 어려워
빈 의자나 상수리나무 빈 둥지를 볼 때면
하나같이 껍질처럼 포개버리기 일쑤였다
그래
비어 있는 것을 비어 있는 다른 것으로
끝없이 포개버리면 그 끝에
제일 처음 이슬 맞으며 마지막 포개지는
플라스틱 의자 위에 너무 많이
사람들을 포기해 온 하느님의
하늘이 엉덩이를 내릴지 모른다

■ 저수지에 빠진 의자 / 유종인

낡고 다리가 부러진 나무 의자가
저수지 푸른 물 속에 빠져 있었다
평생 누군가의 뒷모습만 보아온 날들을
살얼음 끼는 물속에 헹궈버리고 싶었다

다리를 부러뜨려서
온몸을 물속에 던졌던 것이다
물속에라도 누워 뒷모습을 챙기고 싶었다

의자가 물속에 든 날부터
물들도 제 가만한 흐름으로
등을 기대며 앉기 시작했다
물은 누워서 흐르는 게 아니라
제 깊이만큼의 침묵으로 출렁이며
서서 흐르고 있었다

허리 아픈 물줄기가 등받이에 기대자
물수제비를 뜨던 하늘이
슬몃 건너편 산 그림자를 앉히기 시작했다
제 울음에 기댈 수밖에 없는
다리가 부러진 의자에
둥지인 양 물고기들이 서서히 모여들었다

■ 미루나무 / 유종인

바람 불어 길게 휘어지는 미루나무,
허리 아래까지 흔들리며
허공의 화선지 깊이 눌러 써대는 저 필력(筆力)

아무리 휘갈겨 써본들
아무리 파지를 낸들
하늘엔 기러기떼 지나간 흔적도 남지 않는다

태풍이 와 허리가 꺾이고
사철 붓을 쥔 흙의 손아귀 힘이 빠질 때
초록에 단풍을 묻힌 것도 한 필법인가

죽은 미루나무 붓을 씻는 늦가을 저녁비,
초록의 붓털에서
쓰르라미 소리 쏟아지는 여름날이
삭정이 붓털로 빠져 근심하던
까치는 다시 제 집에 곶아 쓰고자 물어 올리고

마른 우듬지 위에 흰 눈이 묻어온다
허공에선 죽은 나무의 운필이 너무 고요하다
모지라진 미루나무 독필(禿筆)은 불쏘시개로 쪼개진 뒤
아궁이 속 불길로 휘갈겨지는 초서체(草書體)들
지붕에 꽂힌 굴뚝 필봉(筆鋒)에 연기의 필체가 흐리다

/ 2020.12.23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