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난의 철학 / 한완상
가난은 미워하되 가난한 사람은 돌보아야 하고, 가난은 물리쳐야 하되 가난한 사람은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얼핏 듣기에 모순되는 것 같다. 그러나 가만히 따지고 보면, 반드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가난은 물리쳐야 한다는 생각은 가난이 사람을 사람답게 살 수 없게 하기 때문에 나온 생각일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들어 줄 수 있게 하기 위해 우리는 가난을 줄여야 하고 마침내 그것을 없애야 한다.
예수가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 것도, 그리고 그가 가난한 사람을 위로하고 사랑한 것도 사람을 사랑한 것이지, 가난 자체를 두둔하고 감싼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가난을 미워해야 하나?
가난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기에 미워해야 한다. 왜 잘못된 것인가? 가난은 언뜻 보면 순전히 개인 문제같이 보일지 모른다. 사람이 게을러 빠졌으니까 가난하게 살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의 경우 가난은 그렇게 개인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구조적인 현상이요, 역사적인 문제이다.
빈부의 차이가 개개인의 노력과 능력에 따라서만 생긴다면 우리는 그 차이를 구태여 나쁜 것이라고 비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불평등을 장려할 필요마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빈부의 격차란 사람의 노력과 능력에 별로 상관없이 생기고 번진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옛날에는 세습적인 신분에 따라 부(富)에 속하기도 하고 빈(貧)에 속하기도 한다. 개인의 노력과 능력과는 상관이 없었다. 사대부 가정에 태어나게 되면 귀와 부가 함께 따라온다. 권세와 영화도 따라온다. 그러다가 자본주의적 산업 사회에 이르러서는 생산 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나 기업의 고급 관리층에 속한 배경에서 태어나야 부를 쉽게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산업 사회에서도 급속하게 산업화를 추진하고 있는 개발 도상국에서는 정치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주로 부를 쉽게 획득한다. 그리고 권력 잡은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이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된다. 심지어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빈부의 격차가 있다. 비록 자본주의 사회에 비교하면 덜 심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긴 한데 그곳에서는 열렬한 당성이 있어야 정치적 영향력과 동시에 그에 따른 부의 혜택을 받게 된다. 이러한 모든 현상은 구조적이요, 역사적인 현상이다. 순전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것이라고만 볼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가난이 왜 억울한 것이며, 왜 가난을 없애야 되는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가난은 부자와 강자들에 의해 온존(溫存)되거나 더 악화되는 까닭에 억울한 것이다.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처지에서 볼 때는 가난이 억울한 것으로 여겨지며, 일단 빈부의 차가 구조화되고 제도에 의해 밑받침되고 나면, 그런 곳에서 가난한 사람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성실하다 하더라도 자신이 가난을 극복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부자는 거의 구조적 기득 이권 때문에 엄청난 프리미엄을 갖고 경쟁하게 되며, 빈자는 그만큼 불리한 핸디캡을 안고 경쟁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돈이 돈을 벌고 가난이 가난을 낳는 결과가 되기 쉽다.
우리는 앞에서 가난이 구조적인 것일 때 부당한 것이고 억울한 것임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가난이란 항상 나쁜 것이며 억울한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항상 싸워야 하고 없애야 하는 것일까? 나는 여기서 가난이 오히려 자랑스러울 수 있는 두 가지 조건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먼저 자발적 가난을 생각해 보자. 일부러 가난하게 살려는 사람을 생각해 보자. 왜 그럴까? 사람은 경제적으로 넉넉해지면 탐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탐욕적이 된다.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많이 갖고 싶어진다. 더 많이 갖고 싶은 생각은 마침내 남의 것을 빼앗더라도 더 많이 가져야겠다는 탐욕으로 변질하기 쉽다. 권력은 부패하며,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는 말과 같이 부(富)는 썩고 거부(巨富)는 크게 썩기 마련이다.
이렇게 볼 때, 사람이 잘 산다는 것은 반드시 물질적으로 풍요하게 산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값있게 산다는 것이 반드시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산다는 뜻은 아니다. 물질적으로는 풍부하게 살지만, 탐욕스럽기 때문에 더 동물스럽게 살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뜻있게 살려는 사람들 중의 어떤 사람은 탐욕을 낳는 부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려고 애쓴다. 그들은 가난을 자발적으로 선택한다.
예나 지금이나 값있게 살려는 종교인들 가운데는 이러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중세 때 부를 비판하고 가난을 높이 찬양한 프란시스칸 운동을 한 예로 들 수 있겠다. 그들은 가난을 악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덕으로 믿었다. 성서에 나오는 예수나 사도들의 삶도 어떤 의미에서는 가난을 일부러 선택하여 산 삶이었다.
자기를 비워서 일부러 가난하게 산 삶이 예수의 삶이다. 가난한 자들의 아픔을 함께하고, 그들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새 희망을 불어넣은 예수는 스스로 가난하게 살았다. 예수는 가난의 울타리 밖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산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가난 ‘속에’ 뛰어들어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었고,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고’ 말았다. 이때의 가난은 선택한 가난이다.
요즘같이 ‘잘 살아 보세’란 말이 귀가 따갑도록 들리고, 또 그것이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자는 듯으로 이해되는 시대에서는 자발적 가난의 삶이 품고 있는 깊은 뜻을 생각해 볼 만하다. 정말 자발적 가난은 자랑스러운 가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가난을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위에서 지적한 자발적 가난은 주로 개인이 선택하는 것이고, 또 종교인들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지금 내가 지적하려는 또 하나의 자랑스러운 가난은 주로 구조적이고 정책적인 것이다. 이것은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한 삶을 사는 것이다. 모두 다같이 가난하게 살면 가난이 한이나 원한의 표적도 되지 않고, 억울한 것이 되지도 않는다.
가난은 일상적 삶의 양태가 되어 버린다. 마치 공기가 우리와 항상 같이 있기 때문에, 그것의 존재를 특별히 의식하지 못하듯이 가난도 울분과 한의 계기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밝힐 것이 있다. 다같이 가난하게 사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다같이 풍요하게 사는 것이다. 다같이 풍요롭게 살게 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데, 설령 다같이 가난하게 살게 된다 하더라도 그곳에 참다운 공동체가 형성된다. 이 공동체에서는 가난이 억울한 것으로도, 부가 특권으로도 인식되지 않는다. 그런데 흔히들 이렇게 주장한다.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살게 되기 위해서는, 과도기적으로 부익부, 빈익빈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거쳐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쓰라린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결코 이상적인 사회는 오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주장은 한 마디로, ‘선성장 후분배(先成長後分配)’의 논리인데, 그것은 실제로 부자를 더욱 부하게 하고, 가난한 이들을 더욱 가난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렇게 빈과 부 사이의 틈이 벌어지면, 이것을 좁히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여기에는 부와 권력이 합세하여 이 틈을 더욱 벌여 놓으려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행, 불행의 의식과 사회의 안정, 불안정의 문제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남들과 자기를 항상 비교해 보는 상징적 동물이다. 인간은 남들과의 비교에서 행, 불행을 느낀다. 정부의 국장이 되었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의 동창 중에 장관에 오른 사람이 있다면, 그 국장은 장관된 동창과 자기를 비교함으로써 상대적 불행 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인간은 끝없이 남들과 비교해서 자기의 처지를 평가하는 복잡한 동물이다.
만일 어떤 사회의 성원들의 대부분이 이러한 상대적 불행감에 사로잡혀 있다고 한다면, 그 사회는 불평 불만으로 가득찬 사회가 되고, 그만치 불안한 사회가 되어 버린다. 이렇게 볼 때, 사회 전체의 부는 커질지 모르나, 내적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는 사회는 참으로 불행하고 불안한 사회가 되고 만다. 여기서는 가난이 상대적인 것이 되고, 그만큼 가난이 억울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에 비추어 모두가 정당하게 가난하다면, 가난은 원한의 씨앗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협조의 계기가 된다. 우리 주변에는 거부나 졸부들의 가정이 화목한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있음을 흔히 본다. 형제끼리, 부자끼리, 사돈끼리 서로 경쟁하고 불신하고 넘어뜨리려고 한다면, 정말 부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비정한 세계보다는 모두가 고루고루 가난하게 사는 세계가 훨씬 인간다운 세계이다. 한 사회가 이렇게 골고루 가난하게 사는 사회가 되면, 남의 나라를 넘겨보게 되거나 남의 나라를 탐하게 되는 일도 없게 될 것이다.
나라가 부하고 강해지면, 오히려 제국주의나 식민주의의 정책을 쓰고 싶은 유혹이 커질 것이다. 가난한 나라, 특히 평등하게 가난한 나라보다 불평등하게 부한 나라가 더 침략적이라는 것은 인류 역사가 잘 증명해 주고 있다. 하기야 아직도 인류 역사에서 모두가 골고루 가난하게 사는 사회나, 모두가 골고루 잘 사는 사회가 나타나 본 적은 거의 없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이 그러한 세계를 꿈꾸고 있는지 모른다.
♤ 작가 소개
한완상(韓完相, 1936~ ) : 사회학자.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미국 에모리대학 졸업(철학박사), 서울대학교 교수로 인권운동을 하다가 사퇴하
였다가 다시 복직. 통일원 장관 역임. 저서에 《현대사회와 청년문화》, 《지식인과 허위의식》 등 현대사회와 지식인, 그리고 정치를 분석 비판한 연구가 많음.
♤ 작품 해설
이 글은 왜 가난을 미워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직접적으로 제시함으로 시작된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식은 가난한 사람은 미워해서는 안되며, 가난 그 자체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 당연한 인식에 의문을 던짐으로써 이 글은 시작된다.
필자는 이러한 가난의 관점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가난은 한갓 개인의 나태함이나 불성실로부터 빚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원인을 지니며, 구조의 문제라는 자각이 이 글의 가장 핵심이다. 그 사회적 원인은 때로 가난의 대물림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구조화된 빈부의 차이에 궁극적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필자는 가난에 대항해 싸우고 없애는 것이 주요한 현실적 과제임을 이끌어 내고 있다.
다음으로 필자는 선택한 가난과 그렇지 못한 가난을 구분하고 있다. 즉 선택한 가난이란 마음을 비움으로써 진정한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사람들이다. 또한 여기에는 정책적으로 선택한 평등한 가난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며, 특히 구조적으로 선택된 가난은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어서 필자는 그렇지 못한 가난을 설명한다. 그것의 가장 두드러진 핵심은 그러한 가난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부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당한 부를 지닐 때, 그것은 상대적인 박탈감을 불러 일으키고, 그 박탈감이야말로 한 사회를 뿌리에서부터 뒤흔드는 가장 고질적인 병폐인 것이다.
결국 필자는 불평등한 부보다는 평등한 가난이 낫다는 결론을 조심스럽게 이끌어 내고 있다. 이 글에서 담고 있는 이러한 주장은 물론 진공속에서 이끌어져 나온 것은 아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전체를 풍미하였던 성장 이데올로기의 이면에 가로놓인 구조적인 문제점과 개인의 아픔을 인식하고 그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인 것이다.
[출처] 《고교생이 알아야 할 에세이》 발췌
/ 2020.04.07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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