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산책] 풀과 나무에게 말을 걸다

[졸작수필] (2) 행주산성을 둘러보며 권율장군의 기백(氣魄)을 느끼다 (2019.06.13)

푸레택 2019. 6. 14. 07:31

 

 

 

 

 

 

 

 

 

 

 

 

 

 

 

 

 

 

 

 

● 행주산성을 둘러보며 권율장군의 기백(氣魄)을 느끼다

 

(2) 대첩기념관, 진강정, 덕양정, 충의정, 행주대첩비

 

백마역(경의중앙선)- 능곡역- 마을버스 011번- 행주산성- 대첩문- 권율(權慄) 장군 동상- 항전 부조물- 쉼터(행주산성 사진전)- 충장사(권율 장군 사당)- 배롱나무, 백목련-대첩기념관(화차, 행주대첩도, 이치대첩도)- 향선나무- 진강정(행주대교 전망)- '식사하셨어요?' 촬영지- 덕양정(해맞이 행사 열리는 곳)- 행주대첩비(정상)- 덕양산 전망대(남산, 상암월드컵경기장, 63빌딩, 성산대교, 가양대교, 마곡철교, 관악산 전망)- 살구나무- 충훈정- 하산- 행주토성- 행주대첩 전투지- 토성문지- 행주기씨유허비- 기감천(奇甘泉)- 충훈정(국궁장)- 대첩문- 마을버스 정류장- 수륙양용 장갑차- 해병대 행주도강 전첩비- 마을버스 011번- 능곡역- 백마역

 

☆ 블로그 모바일 작성시 글 하나에 사진을 20장밖에 올릴 수 없어서 부득이 3회로 나누어 싣습니다. 글 내용은 동일하고 사진만 다릅니다.

 

(1) 행주산성: 대첩문, 권율 장군 동상, 행주대첩 부조물, 행주산성 사진 전시 쉼터, 충장사

(2) 행주산성: 대첩기념관, 진강정, 덕양정, 충의정, 행주대첩비, 대첩비각, 덕양산 전망대

(3) 행주토성, 토성문지, 행주대첩 전투지, 행주기씨유허비, 기감천, 수륙양용 장갑차, 해병대 행주도강 전첩비

 

● 역사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 행주산성을 둘러보며

 

오늘은 행주산성 평화누리길을 걷기 위해 집을 나섰다. 일산으로 이사온 후 처음 찾아가는 길이다. 경의중앙선 백마역(白馬驛)에서 열차를 타고 능곡역(陵谷驛)에서 내렸다. 능곡역 1번 출구 바로 앞에서 마을버스 011번을 타니 10분 남짓 만에 행주산성(幸州山城) 정류장에 데려다 준다. 행주산성 대첩문에 '행주산성 무료 관람' 현수막이 큼지막하게 걸려있다. 평일이라서인지 눈에 띄는 사람들이 열 명이 채 안 된다.

 

☆ 대첩문, 권율(權慄) 장군 동상, 행주치마

 

대첩문을 들어서니 권율(權慄) 장군 동상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1986년에 건립되었으며 높이는 5m로 근대조각가 김세중의 작품이라고 한다. 동상 뒤편에는 4폭의 부조물이 있는데 행주대첩 당시 관군, 승병, 의병, 여성들의 치열한 항전(抗戰) 모습이 아로새겨져 있어 마음을 숙연케 한다.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은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과 함께 1593년(선조26년) 임진왜란 3대 대첩이다.

 

이렇듯 행주산성은 임진왜란의 승전과 아픔이 함께 아로새겨진 역사적의 현장이다. 권율 장군의 불퇴전의 지휘로 2,300명의 정예병과 승병, 의병, 부녀자 등 3,000여 명이 3만여 명의 왜군을 물리친 곳이다. 특히 동산동 밥할머니가 주축이 돼 조직된 여성 의병대가 치마에 돌을 날라 무기로 사용하는 등 맹활약을 했고, 이때부터 여자들의 앞치마를 ‘행주치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산성의 형태는 산을 둘러쌓은 퇴뫼식 토성(土城)이며 정확한 축성연대와 목적은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의 백제 때 처음 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2017년 3월에 산 정상부 주변 경사면에서 석성(石城)이 발견되어 학술연구 중이라고 한다. 행주산성은 한강을 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함께 역사적 현장을 체험할 수 있는 고양시(高陽市)의 대표적 명소이다.

 

☆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 '충장사'

 

먼저 충장공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충장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홍살문을 지나 한참을 걸어가니 충장사가 나타난다. 충장사는 권율 장군의 위업과 호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웠으며 매년 3월 14일에 행주대첩을 기념하는 제례행사가 열다고 한다. 사당 앞쪽 뜰에는 배롱나무(목백일홍)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백목련도 짙푸른 잎을 매달고 있고 큰금계국이 노랗게 꽃을 피워 언덕을 뒤덮고 있다.

 

이곳 충장사는 왕릉에서 볼 수 있는 삼도(三道)로 돼 있다. 삼도는 신도(神道)를 중심으로 좌우측에 참도(參道)가 있는 것을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신도는 사당에 모셔진 신(神)이 다니는 길로 일반인들은 다닐 수 없고, 부득이 넘어가게 될 경우 머리를 숙여 예를 갖추고 넘어가면 된다. 삼도삼문이 있을 때는 우입좌출(右入左出)로 오른쪽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나오면 된다고 한다. 권율 장군은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온 국민의 존경을 받아 마땅한 훌륭한 분이다.

 

☆ 대첩기념관, 화차, 행주대첩도, 이치대첩도, 독산성싸움도

 

다시 발걸음을 유물전시관인 '대첩기념관' 쪽으로 향했다. 대첩기념관은 행주대첩 당시 무기고와 군량창고로 추정되는 장소에 1980년 건립하였다고 한다. 대첩기념관에는 행주대첩 때 사용한 총통, 활, 화차, 수차석포 등 여러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화차와 신기전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화차와 신기전은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조선 최고의 비밀 병기였다고 한다. 화차는 변이중(邊以中)이 개발하였는데 당시 조선의 놀라운 과학 기술력을 보여준다.

 

또한 대첩기념관에는 권율 장군의 승전 모습을 담은 대첩기록화와 대첩비문 탁본, 권율 장군 친필, 산성에서 발견된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행주대첩도'는 1593년 2월 12일(양력 3.14) 일어난 행주대첩 항전 기록화이다. '이치대첩도'는 전주성을 점령하여 호남지방을 확보하려는 일본군을 1592년 7월 8일(양력 8.14) 권율장군의 정예군이 충청남도 금산군과 전라북도 완주군 사이의 이치고개에서 대파하여 왜군의 호남지방 진격을 막은 항전 기록화다. 이치대첩은 임진왜란 육전(陸戰)의 3대첩 중 하나이다.

 

또한 이곳에 '독산성싸움도'가 있는데 1592년 12월 독산성에서 심리전으로 왜군을 물리친 항전 기록화이다. 왜군은 독산성에 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 포위하고 투항을 기다렸으나 권율 장군이 산(山) 정상에 말들을 세우고 군량미를 말 등에 쏟아 목욕시키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성(城) 안에 물이 많은 듯 왜군의 작전을 교란시켜 승리한 전투이다.

 

행주산성 전투 승리의 4대 요인은 권율 장군과 휘하 장사들의 완벽한 전략과 전술, 과학적으로 설계된 최신식 무기 사용, 강과 절벽 등으로 배수진이 형성된 자연적 지리적 조건, 민관군 승려 부녀자 등이 혼연일체가 되어 목숨을 걸고 싸운 전투 정신이라고 한다. 좀더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싶었지만 이곳 대첩기념관 내부는 아쉽게도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 향선(香扇)나무, 진강정, '식사하셨어요?' 촬영지

 

잠시 쉬면서 대첩기념관 주위를 둘러보는데 향선나무라는 팻말이 붙어있는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처음 보는 생소한 나무다. 자료를 찾아보니 중국이 원산지인 물푸레나무과의 낙엽활엽수인데 키는 3~6m로 자라고 5~6월에 흰색의 꽃이 핀다고 되어 있다. '향쥐똥나무'라고도 하는데 열매가 미선(尾扇)나무와 비슷하여 '향선(香扇)나무'라고 부른다고 한다.

 

다시 발걸음을 행주대첩비가 있는 정상으로 향했다. 언덕을 조금 오르니 우측으로 멀리 한강이 보인다. 다시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가 '진강정' 정자에 이르니 한강과 행주대교가 한눈에 보인다. 진강정 옆에는 SBS TV 교양 프로그램 '잘 먹고 잘 사는 법, 식사하셨어요?' 촬영지라는 표지판이 있다. 진강정 아래는 한강변을 끼고 행주산성 공원으로 이어지는 '행주산성 역사누리길'이 연결되어 있다. 다음에는 이 길을 걸어보아야겠다.

 

☆ 행주대첩비, 대첩비각, 덕양정, 충의정, 덕양산 전망대

 

다시 발걸음을 옮겨 덕양정으로 향한다. 덕양정에서는 새해 첫날 떠오르는 해를 감상하며 새해 소망을 기원하는 해맞이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덕양정을 지나 드디어 '행주대첩비'가 있는 덕양산(125m) 정상에 도착했다. 행주산성에는 2기의 행주대첩비가 있다고 한다. 대첩비각 안에 있는 초건비는 경기도 문화재 제74호로 1602년(선조 35년) 권율 장군이 돌아가신 후 휘하 장수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으로 조선 최고의 문장가인 최립의 문장과 명필 한석봉의 글씨였으나 현재는 마모되어 식별이 어렵다고 한다.

 

이곳 덕양산 정상에 새로 세운 행주대첩비는 15.2m 높이의 석탑이며, 1970년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반면, 인근 행주서원에 있는 행주대첩비는 1845년(헌종 11년)에 왕명으로 세운 중건비이며, 앞면은 초건비의 내용을 옮기고 뒷면에는 비를 세우는 이유를 추가한 것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4호이다. 행주산성이 있는 이곳 덕양산은 북한산, 고봉산과 함께 고양 지역 3대 전략적 요충지라고 한다.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 아픔이 함께 서려있는 행주 대첩비의 비문을 가슴에 새기며 전망대에 오르니 저멀리 남산과 상암월드컵경기장, 63빌딩, 성산대교, 가양대교, 마곡철교(공항철도), 관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유로를 지나가는 차량 소리가 요란하다. 행주대첩비를 지나면 임진왜란과 행주대첩 승리에 대한 영상물을 상시 상영하는 '충의정'이 있다.

 

☆ 행주산성 토성문지, 행주대첩 전투지

 

이제는 행주산성 토성길로 하산이다. 토성의 총 길이는 약 1km인데 1992년 415m가 복원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삼국시대의 기와 및 토기 파편들이 발견되어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새였음을 알려준다. 2017년 3월 산성 정상 부근에서 석성이 발견되어 문화재 연구기관에서 학술연구 중이며, 추후 발굴, 복원 후 공개 예정이라고 한다.

 

토성을 따라 내려오니 '토성문지(土城門址)'라는 표지판이 있다. 이곳이 행주산성 출입문이 있던 문터 자리라고 한다. 그리고 '행주대첩 전투지'라는 표지판도 보인다. 이곳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권율 장군의 조방장 조경이 목책을 쌓아 행주산성의 약점을 보완하였으며 전투경험이 풍부한 승군(僧軍) 등이 이 부근에 배치되어 치열한 전투 후 대승을 거둔 곳이라고 한다. 또한 아군의 피해도 컸으니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민초(民草)들의 숭고한 뜻을 기려본다.

 

☆ 행주기씨유허비, 기감천(奇甘泉)

 

토성문지 옆쪽으로 '행주기씨유허비'가 보인다. 유허비 안내문에는 '행주는 기씨의 발상한 세거지이다. 기씨(奇氏)는 여선양조(麗鮮兩朝)에 많은 장상과 학자, 충신을 배출하여 삼한갑족으로 성망을 빛냈다. 이 유허비는 1966년 5월에 행주 기씨 대종중에서 건립하였다'고 적혀 있다. 우리 신현(新峴) 5인방 모임의 총무인 동안교회(東安敎會) 안수집사 행주(幸州) 기씨(奇氏) 호헌 샘이 생각나서 자세히 읽어 보았다.

 

행주기씨유허비 아래쪽에는 '기감천(奇甘泉)'이라는 샘이 있다. 행주 기씨의 시조(始祖)는 덕양산 행주산성 아래 바위 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아기가 태어난 곳에서 물맛이 좋고 연중 마르지 않는 샘이 솟아 기감천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기씨 후손들과 마을 사람들은 이 물을 식수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행주 기씨는 행주와 덕양산 일대에서 대대로 살아왔으며, 일설에 의하면 고려시대 공녀에서 원나라 왕후가 된 기황후(奇皇后)도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 충훈정, 수륙양용 장갑차, 해병대 행주도강 전첩비

 

행주산성을 나오기 전 우측으로 200m를 가니 충훈정이 나타난다. 충훈정은 1986년 건립한 국궁장으로 우리나라의 옛 주력 무기이기도 했던 국궁 연습장이다. 이곳에서 궁도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행주산성 대첩문을 나와 버스를 기다리는데 들어갈 때 못 보았던 장갑차가 보인다. 6.25 전쟁 당시 수륙 공격을 담당했던 해병대 LVT P-7 수륙양용 장갑차라고 한다. 안내문에는 '이 장갑차는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작전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대국민 안보체험 및 홍보를 위하여 해병대로부터 무상으로 기증받아 전시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한미연합해병대의 한강도강작전 및 서울탈환작전의 투혼정신을 기리기 위한 '해병대 행주도강 전첩비'가 세워져 있다. 전첩비(戰捷碑)는 싸움에서 이긴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를 뜻한다.

 

☆ 행주산성 역사 탐방을 마치며

 

오늘은 권율 장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행주산성을 찾아 역사 탐방을 하였다. 오늘 내가 이렇게 평화누리길을 걷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다 볼 수 있는 것은 앞서간 수많은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과 지금도 일선에서 땀흘리는 분들의 노고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좋은 결실로 이어져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의 아픔이 없기를, 오직 평화와 번영만이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능곡역으로 향하는 011번 마을 버스에 몸을 실었다. / 2019.06.13(목) 김영택 씀

 

 

라는 표지판이 있다. 이곳이 행주산성 출입문이 있던 문터 자리라고 한다. 그리고 '행주대첩 전투지'라는 표지판도 보인다. 이곳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권율 장군의 조방장 조경이 목책을 쌓아 행주산성의 약점을 보완하였으며 전투경험이 풍부한 승군(僧軍) 등이 이 부근에 배치되어 치열한 전투 후 대승을 거둔 곳이라고 한다. 또한 아군의 피해도 컸으니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민초(民草)들의 숭고한 뜻을 기려본다.

 

☆ 행주기씨유허비, 기감천(奇甘泉)

 

토성문지 옆쪽으로 '행주기씨유허비'가 보인다. 유허비 안내문에는 '행주는 기씨의 발상한 세거지이다. 기씨(奇氏)는 여선양조(麗鮮兩朝)에 많은 장상과 학자, 충신을 배출하여 삼한갑족으로 성망을 빛냈다. 이 유허비는 1966년 5월에 행주 기씨 대종중에서 건립하였다'고 적혀 있다. 우리 신현(新峴) 5인방 모임의 총무인 동안교회(東安敎會) 안수집사 행주(幸州) 기씨(奇氏) 호헌 샘이 생각나서 자세히 읽어 보았다.

 

행주기씨유허비 아래쪽에는 '기감천(奇甘泉)'이라는 샘이 있다. 행주 기씨의 시조(始祖)는 덕양산 행주산성 아래 바위 밑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아기가 태어난 곳에서 물맛이 좋고 연중 마르지 않는 샘이 솟아 기감천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기씨 후손들과 마을 사람들은 이 물을 식수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행주 기씨는 행주와 덕양산 일대에서 대대로 살아왔으며 고려시대 공녀에서 원나라 왕후가 된 기황후(奇皇后)도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 충훈정, 수륙양용 장갑차, 해병대 행주도강 전첩비

 

행주산성을 나오기 전 우측으로 200m를 가니 충훈정이 나타난다. 충훈정은 1986년 건립한 국궁장으로 우리나라의 옛 주력 무기이기도 했던 국궁 연습장이다. 이곳에서 궁도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행주산성 대첩문을 나와 버스를 기다리는데 들어갈 때 못 보았던 장갑차가 보인다. 6.25 전쟁 당시 수륙 공격을 담당했던 해병대 LVT P-7 수륙양용 장갑차라고 한다. 안내문에는 '이 장갑차는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작전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대국민 안보체험 및 홍보를 위하여 해병대로부터 무상으로 기증받아 전시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한미연합해병대의 한강도강작전 및 서울탈환작전의 투혼정신을 기리기 위한 '해병대 행주도강 전첩비'가 세워져 있다. 전첩비(戰捷碑)는 싸움에서 이긴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를 뜻한다

 

☆ 행주산성 역사 탐방을 마치며

 

오늘은 권율 장군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행주산성을 찾아 역사 탐방을 하였다. 오늘 내가 이렇게 평화누리길을 걷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다 볼 수 있는 것은 앞서간 수많은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과 지금도 일선에서 땀흘리는 분들의 노고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이 좋은 결실로 이어져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의 아픔이 없기를, 오직 평화와 번영만이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능곡역으로 향하는 011번 마을 버스에 몸을 실었다.

 

/ My Blog Reportage 2019.06.13(목) 김영택 씀

 

● 권율 장군과 동산동 밥할머니

 

행주산성 권율 장군의 동상을 뒤로 하고 대첩기념관을 향해 언덕을 오르다 보면 조선 최초 여성 의병장 밥할머니와 행주치마, 노적봉의 전설을 기록한 안내표지판이 나온다.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어본다.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불과 20일만에 서울(한양)을 함락시켰고, 선조 임금은 함경도로 피신하면서 명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고양에서는 권율장군이 조명 연합군을 이끌고 있었다. 이때 북한산 부근의  대부호 문씨(文氏) 집안에서는 총명한 며느리로 이름난 여장부 해주 오씨가 있었다.

 

그녀는 북한산 봉우리를 볏집으로 감싸 군량미를 쌓은 노적가리처럼 위장하고, 냇물에 석회가루를 풀어 흘려보낸 후 왜군들에게 "조선군 주둔지에는 산더미 같은 군량미가 쌓였는데 이 뿌연 물은 북한산에 주둔한 수 만명 군사의 밥 짓는 쌀뜨물이다"라고 속여 허기진 배를 석회물로 채우게 하고 복통 설사를 일으켜 사기를 꺾어 퇴각시키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이후로 위장했던 북한산 산봉우리를 노적봉이라 불렸다. 그 후에 오씨는 인근의 부녀자들을 모아 여성 의병대를 조직하고 전쟁에서 군인들에게 밥을 지어주고 부상병을 치료하였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오씨를 밥할머니라 불렀다.

 

1593년 2월 12일 행주산성에는 권율장군이 이끄는 1만명의 조명 연합군과 3만명의 왜군이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시간이 갈수록 성안엔 무기가 떨어져 불리하게 되자, 밥을 짓고 부상병을 돌보던 여성 의병장 밥할머니는 여자들에게 앞치마에 돌을 주어 나르게 하고, 군인들이 돌을 무기로 쓰게하여 대승을 거두게 하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이 전투가 바로 행주대첩이다.

 

전쟁이 끝난 후 인조는 밥할머니의 공적을 인정하여 정경부인에 봉하였고, 후세 사람들은 밥할머니의 석상과 비석을 북한산이 잘 보이는 창릉 모퉁이에 세워 호국 정신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