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인생] 걷기 영양 건강 산책

[고양누리길걷기] (1) 고양동누리길 제12코스: 안장고개, 선유동입구 출발 (2019.04.20)

푸레택 2019. 4. 20. 22:36

 

 

 

 

 

 

 

 

 

 

 

 

 

 

 

 

 

 

 

 

 

 

 

 

 

 

 

 

 

 

 

 

 

 

 

 

 

 

 

☆ 일시: 2019.04.20(토) 09:30~13:30

걷기코스: 고양동누리길(제12코스), 송강누리길(제11코스 일부) / 9.1km

삼송역(三松驛) 8번 출구- 774번 간선버스- 안장고개, 선유동(仙遊洞) 입구 출발- 오로시(烏鷺詩) 이직(李稷) 묘(墓)- 선유랑마을-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 묘(墓)- 고양향교(高陽鄕校), 중남미문화원(中南美文化院)- 대자산(大慈山)- 최영(崔瑩) 장군 묘-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 묘(墓)- 명나라궁녀 굴씨(屈氏)여인 묘- 필리핀 참전비- 공릉천(恭陵川)- 송강(松江)마을- 정철(鄭澈) 시비(詩碑)- 850번 버스- 화정역(花井驛)- 집 도착

 

☆ 오늘 만난 풀꽃 나무꽃

백목련, 목련, 자목련, 왕벚나무, 산벚나무, 능수벚나무, 개나리, 진달래, 복숭아나무, 회잎나무, 팥배나무, 신갈나무, 자작나무, 은행나무, 박태기나무, 백송, 서양민들레, 현호색, 노루발풀, 종지나물, 꼭두서니, 냉이, 꽃다지, 제비꽃, 비비추, 꽃잔디, 긴병꽃풀, 할미꽃, 애기똥풀

 

■ 고양동누리길과 송강누리길을 걸으며

1 선유랑마을로 출발

오늘은 고양시걷기연맹과 함께 하는 고양누리길 걷기에 참가하여 역사 체험 코스인 '고양동누리길'과 '송강누리길' 9.1km를 걸었다. 오전 9시 30분 선유동 입구를 출발하여 선유랑마을과 고양향교를 거쳐 대자산에 있는 최영 장군의 묘역을 찾았다. 이어 필리핀군 참전비를 둘러보고 공릉천을 따라 정철 시비(詩碑)가 있는 송강마을까지 걸었다.

고양시걷기연맹에서는 매주 토요일 '고양누리길 함께 걷기'를 주최한다. 작년 이곳 일산에 이사한 이후 오늘 고양누리길 걷기 모임에 처음 참가했다. 소풍 가는 초등학생처럼 마음이 설렜다. 3호선 삼송역에서 내려 8번 출구로 나와 774번 간선버스를 타고 안장고개에서 내렸다. 출발지인 선유동 입구로 들어서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다. 9시 30분 고양시걷기연맹에서 나오신 인솔자의 지도로 간단한 체조를 한 후, 40여 명의 참가자들은 4월의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선유랑마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골마을 선유랑은 선비가 머무는 마을이라 하여 우리말로 '서릿골', 한자로 '선유랑'이라 한다. 옛날 중국 사신이 한양으로 들어올 때 이 마을 뒷산을 넘어다녔다고 한다. 최근에는 서울에서 가깝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자연의 잇점을 활용해 '황토논물체험', '고구마캐기체험', '쌈채소따기' 등 다양한 체험활동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체험객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고 한다.


2 오로시와 백로가

선유랑마을 옆, 계명산 끝자락에 있는 이직(李稷, 1362~1431)의 묘를 찾아갔다. 묘역이 아주 넓고 깨끗하게 잘 정비되어 있다. 이직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이성계를 도와 조선 개국에 공헌하였고,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4등 공신이 되었으며 세종 때 영의정과 좌의정을 지냈다고 한다. 그가 쓴 시 '오로시(烏鷺詩)'는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이 시를 읽으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청파에 좋이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의 어머니 영천 이씨가 아들을 위해 지었다는 백로가(白鷺歌)다. 예지와 결기가 느껴지는 빛나는 글귀다. 정몽주 선생의 묘는 용인시 처인구에 있다. 이직 묘역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니 실개천이 흐르는 한적한 시골길이 펼쳐진다. 논과 밭이 있는 마을길을 걸으니 마음이 평온하다. 산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니 귀성군 이준 묘가 보인다.

3 귀성군 이준에게 날아든 후궁의 연서

귀성군 이준은 세종대왕의 네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아들이다. 말썽을 자주 일으킨 아버지 임영대군과는 달리, 어린 시절부터 행동이 반듯하였고 모범적인 왕족으로 성장한다. 25세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1년만에 벌어진 '이시애의 난'을 남이와 강순과 함께 진압한 공로로 병조판서가 된다. 그는 1468년에 영의정이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가 27세로 조선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영의정이 된 인물이다. 세조가 후계자인 아들 예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구 공신 훈구파를 견제할 목적으로 젊은 귀성군을 영의정에 오르게 한 것이다.

귀성군 이준은 외모가 출중하였다고 한다. 이준의 뛰어난 외모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나 야사로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세조의 후궁 덕중이라는 여인이 귀성군 이준에게 연서를 보낸 사건이 일어난다. 후궁 덕중이 내시를 시켜 귀성군 이준에게 연서를 보낸 것이다. 왕의 후궁이자 큰아버지의 여인에게서 연서를 받은 귀성군은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즉시 아버지인 임영대군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그의 아버지 임영대군은 귀성군과 함께 세조에게 이 사실을 고한다. 세조는 덕종의 사형을 지시한다.

이 사건은 사실 귀성군 이준의 의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를 공격하던 구 공신 훈구파에게는 좋은 먹이감이 되었고, 훈구 세력들은 (구성군이 왕의 재목이라는) 군졸 간의 하찮은 이야기까지 문제 삼아서 구성군을 조정에서 몰아냈고, 결국 귀성군은 귀양을 가서 그곳에서 죽는다. 기득권 세력들이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사람들의 작은 허물도 침소봉대하여 그들을 매장시켜 버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어느 블로그 글을 보니 조선의 훈남 Top 10으로 홍국영, 김홍도, 이항복, 유성룡, 조광조, 정약용 그리고 왕실로는 문종, 정조,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익종), 귀성군 이준을 꼽았다. 잘 생기고 볼 일이나 귀성군 이준은 빼어난 용모 탓에 후궁에게서 연서를 받았고 결국 그의 반대파 기득권 훈구세력들에 의해 쫒겨나고 귀양을 갔으니 잘 생긴 것이 죄가 된 셈이다. 그나저나 영의정까지 지낸 귀성군 이준의 묘는 묘터도 구석진 곳에 있고 돌보는 후손이 없는 듯 관리도 허술하기 짝이 없다. 앞에서 본 이직의 묘와 너무도 비교된다. 귀성군이 귀양살이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그의 후손들도 많지 않아 그러하다고 한다.  


4 고양향교와 중남미 문화원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개명산 고개를 넘어가니 성황당과 돌무지가 나타난다. 이 성황당고개는 중국과 한양을 잇는 길이었다고 한다. 이 옛길로 사신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녔으며, 이 고개를 왕래하는 사람들의 안녕과 국태민안을 비는 돌무지를 쌓아 성황당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고개를 넘어가니 고양향교와 중남미문화원이 나타난다. 고양향교(高陽鄕校)는 조선 숙종 때 국가에서 설립한 지방교육기관으로 청소년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양민 이상이면 누구나 입학할 수 있었으며 시나 문장을 짓는 사장학과 유교 경전 및 역사를 공부했다. 오늘날에는 교육은 담당하지 않고 매년 음력 8월 27일에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석전대제(釋奠大祭)만 행한다고 한다.

고양향교 바로 옆에는 중남미문화원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은 국내 유일의 중남미 관련 박물관이다. 코스타리카와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중남미 지역에서 외교관 생활을 오래한 원장 부부가 수집한 3,000여 점의 중남미 문화유산이 모여 있는 곳이며 마야·잉카·아즈텍 문명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공간이라고 한다. 박물관 관람은 뒤로 미루고 건물 밖 정원 풍경만 살펴본 후 최영(崔瑩) 장군의 묘를 찾아 대자산(大慈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앞을 지나는데 벚꽃 꽃비가 내린다. 어느 한 참가자가 "그토록 맞고 싶었던 벚꽃 꽃비를 드디어 원없이 맞아본다"며 소녀처럼 기뻐한다. 지금은 4월 하순, 벚꽃도 백목련도 복사꽃도 모두 만개하여 봄의 절정을 보여준다. 이제 또 곧 봄날은 갈 것이다. 이렇게 봄꽃을 보고 봄바람을 느낄 수 있음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아름다운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음은 또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5 황금을 보기로 돌 같이 한 최영 장군

황금을 보기로 돌 같이 하라
이르신 어버이 뜻을 받들어
한평생 나라 위해 바치셨으니
겨레의 스승이라 최영 장군

이 겨레 이 나라 바로잡고자
남으로 왜적을 물리치시고
북으로 오랑캐를 무찌르시니
장하다 그 이름 최영 장군

요동(遼東) 땅 너는 알라 장군의 뜻을
위화도(威化島) 회군의 원한을 품고
조용히 참형으로 돌아가시니
슬프다 붉은 무덤 최영 장군

어릴 때 즐겨 불렀던 '최영 장군' 노래다. 그 노래를 배운지 반 세기가 넘어 최영(崔瑩, 1316~1388) 장군 묘를 찾는다. 이성계(李成桂)를 비롯한 위화도 회군파가 '권세를 탐한 죄'를 들어 참형에 처하려 하자, 최영은 "평생에 있어서 탐욕이 있었다면 나의 무덤에서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유언을 하고 최후를 맞이했다. 실제로 무덤에는 오랜 세월 동안 풀이 자라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후 후손들의 정성으로 풀이 돋아나 지금은 잘 관리되고 있다. 묘역의 뒷쪽에는 그의 아버지 최원직의 묘가 있고 앞쪽에 최영 장군의 묘가 있다.

​한국의 무속에서는 억울하게 죽은 왕이나 장군을 숭상하거나 신격화하는데 최영 장군을 임경업 장군 및 남이 장군과 함께 주요 장군신으로 모신다고 한다. 길따라 내려온 묘역 입구에는 그의 아버지의 가르침인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비석이 서있고 안내판에는 이렇게 소개글이 적혀있다.

"최영 장군은 고려말 안팎으로 혼란스럽던 원명교체기에 밖으로는 외적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고려 왕실을 지키려한 명장이자 재상이었다.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옛 고구려 땅 요동정벌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는데, 이때 출병한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군사를 되돌려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세울 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평생을 청렴하고 국가에 충직했던 최영. 그의 억울한 죽음에 이 무덤에는 풀도 나지 않았다고 한다."


6 명나라 마지막 궁녀인 굴씨(屈氏)의 묘

대자산 최영 장군의 묘 근처 비탈진 기슭에 명나라 마지막 궁녀인 굴씨(屈氏)의 묘가 있다. 굴씨의 묘도 마음의 한이 풀리지 않은 탓인지 풀이 자라지 않는 붉은 무덤이다. 어떻게 명나라 마지막 궁녀의 묘가 우리나라에 있는지 궁금하여 비탈진 기슭을 내려가 보았다. 고양시에서 최근에 방치되어 있던 굴씨 여인의 묘를 정리하고 그 앞에 안내판을 설치했다. 굴씨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따라온 궁녀다.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두 달 만에 의문사를 하고,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자 서둘러 동생 봉림대군(효종)을 세자로 책봉한다.

소현세자가 죽고 난 뒤 청나라는 궁녀들에 대한 환국령을 내리지만 굴씨는 떠나지 않았다. 본래 명나라 궁녀였던 굴씨는 오랑캐인 청나라에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며 조선에 남았던 것이다. 굴씨는 여승이 되어 지내다가 소현세자의 손자 임창군을 보살피다가 죽었다. 그녀는 늘 중국 쪽을 바라보며 명나라 황후의 은덕에 감사해 했고, 청나라와 여진족을 얘기할 때마다 분노에 찬 얼굴을 지었다고 한다.

 

굴씨의 묘가 고양시 대자동에 자리 잡게 된 까닭은 그의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오랑캐는 나의 원수요. 내 생전에 오랑캐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죽게 되었지만 행여라도 북벌하러 가는 군대가 있다면 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니 내가 죽거든 서쪽 교외 길가에 묻어주오." 굴씨는 외모와 재능이 모두 남달랐으며 특히 비파를 잘 타서 스스로 '고향을 생각하는 노래'를 지어 연주했다고 한다.


7 필리핀군 참전비와 공릉천 개나리 그리고 송강마을

공릉천의 지천인 대자천을 따라 내려오니 '필리핀군 참전기념비'가 보인다. 1950년 한국전쟁 때 필리핀군은 한국의 안전과 자유수호를 위해 1,496명의 병력이 참전하여 왜관과 김천, 대구, 임진강변, 철원 지구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전사자가 448명) 전쟁 때 산화한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 후손에게 그 뜻을 전하기 위하여 필리핀군 참전기념비가 세워졌다. 공릉천을 건너 신원동 송강마을로 향했다. 공릉천변에는 노랗게 피어난 개나리꽃 물결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젊은 시절 이곳 신원마을에 머물었던 송강 정철은 파주에 살고있던 율곡과 교유했으며,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묘막을 짓고 6년간 시묘하면서 '가례'를 손수 지었다고 한다.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을 쓴 조선 시대 시가문학의 대가이다. 송강마을에는 정철 선생의 삶과 애환을 느낄 수 있는 기념물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신원교를 지나니 정철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는 공원이 나타난다. 송강마을 어느 집 뜰에 서있는 능수벚나무가 불어오는 바람결에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시를 읊는 듯 꽃비를 뿌리고 있다.

이렇게 오늘 고양누리길 걷기는 끝났다. 9.1km를 4시간 동안 걸었다. 꽃비 내리는 봄날의 아름다운 풍경과 청렴하고 충직하게 살다간 선인들의 삶을 가슴에 담고, 고양 850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 2019.04.20(토) 김영택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