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산책] (1) 최순우 옛집, 선잠단지, 천주교 성북동 성당, 길상사, 심우정, 덕수교회, 이태준의 수연산방, 간송미술관, 서울 성곽길, 송시열 집터, 3.1 독립운동 기념터(한용운), 장면 가옥
몇 년 전 청소년 시절 추억이 서려있는 혜화동과 명륜동 그리고 성북동 골목길을 걸으며 찍은 사진을 다시 정리해 보았다. (2019.03.30)
● 성북동(城北洞) 골짜기의 추억(追憶)
중학생 시절, 성북동(城北洞) 골짜기는 우리들의 놀이터이자 뒷동산이고 뒷동네였다. 쌍다리란 이름이 말해주듯 그땐 하천에 물이 콸콸 흘렀고 다리가 놓여 있었다. 한여름 더위를 피해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울창한 숲 커다란 돌틈 사이로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곳에 다다른다. 그곳은 그야말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이었다. 지금 다시 찾아가면 그곳은 흔적도 없다. 짙푸른 담쟁이덩굴 기어오르던 서울 성곽 아래쪽 산꼭대기 산동네에 친구의 집이 있었다. 친구 집에 놀러가면 할머니처럼 늙으신 친구 어머니가 가난한 살림에도 밥을 해 주시곤 했는데 어찌 그리도 밥이 맛있던지.. 그 시절 그 친구는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때 그곳 무릉도원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때묻지 않은 그 때 그곳이, 그때 그 시절이 마냥 그립다.
● 종례 시간
까만 교복에 까만 모자를 쓰던
고등학교 시절, 종례시간이면
칠면조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합창을 시켰다
어느 가을날 햇병아리 교생 선생님 종례시간
우리들은 때마침 음악 시간에 배운
'푸니쿨리 푸니쿨라'를 끝없이 불러댔다
삼중창 푸니쿨라가 시간을 멈춘 채
창밖 은행나무 잎사귀를 흔들어댔다
내 푸르던 초임 시절 종례시간
하얀 교복 입은 천사들이 합창을 한다
창밖 봉긋한 목련꽃 교실 안 기웃거리고
살구꽃잎 노래소리 타고 머얼리 흩어진다
목련꽃 살구꽃 하얗게 부서지는 날
내 망막엔 천사들 노래소리 알알이 맺히고
은행나무 잎새 카로틴 물들어 떨어지는 날
내 가슴엔 까만 교복 입은 까까머리들
가세 가세 저기 저곳에 푸니쿨라 노랫소리
쿵쿵거리며 아련히 들려온다
/ 김영택 [졸작拙作]
* 칠면조: 양복을 매일 갈아 입으시는 멋쟁이 담임 선생님 별명(普成高 1학년 5반)
* 홍순태(洪淳泰) 담임 선생님: 서울 상대를 나오셨으며 상업과목을 담당하셨다. 사진작가로서 당시 國展 사진 분야에 특선을 하셨고 후에 신구전문대 교수로 가셨다.
* 교생 선생님: 9월 어느 날 남학생과 남자 선생님들만 있는 우리 普成高에 여자 교생선생님이 오셨다. 그분이 우리 학급을 담당하셨다.
* 푸니쿨리-푸니쿨라: 이탈리아의 덴차(Denza, L.)가 1880년에 작곡한 나폴리 민요. 베수비오 산의 등산 철도를 완공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 박일환 음악선생님: 이탈리아 테너 가수 질리(Beniamino Gigli/1890~1957)를 좋아하셔서 스스로를 '질리', '박질리'라고 하셨다. 음악 시간이면 우리들 성화에 못이기는 척 이태리 민요 '오 솔레미오'(O sole mio,나의 태양)를 자주 불러주셨고, 우리들에게 푸니쿨리 푸니쿨라를 가르쳐 주셨다.
● 푸니쿨리 푸니쿨라 (Funiculi Funicula)
무서운 불 뿜는 곳 저기 저 산에
올라 가자 올라 가자
그곳은 지옥 속이 솟아있는 곳
무서워라 무서워라
산으로 올라가는 수레 타고
모두 가네 모두 가네
가세 가세 저기 저곳에
가세 가세 저기 저곳에
푸니쿨리 푸니쿨라 푸니쿨리 푸니쿨라
모두 타는 차 푸니쿨리 푸니쿨라
가세 가세 저기 저곳에
가세 가세 저기 저곳에
푸니쿨리 푸니쿨라 푸니쿨리 푸니쿨라
모두 타는 차 푸니쿨리 푸니쿨라
* 초임 학교: 서울 동작구 상도동 상도여중(상현중)
● 성북동 역사문화탐방 골목길 걷기
1 한성대입구역(4호선) 5번 출구
2 혜화문
3 서울성곽길(경신고등학교 뒷길)
4 최순우 옛집 ☆
5 선잠단지
6 천주교 성북동 성당
7 길상사 ☆
8 대사관 건물
9 심우장 ☆
10 메밀수제비 누룽지백숙 (점심)
11 덕수교회
12 이태준의 수연산방
13 간송미술관
14 서울과학고(옛 보성중고)
15 3.1독립운동 기념터(한용운)
16 송시열 집터(올림픽생활공원)
17 장면 가옥
18 혜화동 주민센터
19 짚풀 생활사 박물관
20 천주교 혜화동 성당
21 혜화역(4호선)
22 집으로 Go home~!
● 성북동(城北洞) 골목길을 거닐며
또다시 신록의 계절이 돌아왔다. 오늘은 역사와 문화의 향기 가득한 성북동 골목길을 걷기 위해 길을 나섰다.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 5번 출구로 나와서 먼저 혜화문(惠化門)*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옛 성터 아래쪽 길을 걸으면 경신고등학교 뒷담길이 나온다. 그곳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최순우 옛집이 나타난다. 길을 건너면 선잠단지(先蠶壇址)가 보인다. 성북초등학교를 왼쪽으로 끼고 걸어 올라가면 아담한 천주교 성북동 성당이 나그네를 맞이해 준다. 계속 길을 따라 걸으니 그 유명한 길상사(吉祥寺)가 보인다. 오색찬란한 연등이 온 절을 뒤덮고 있다.
백석(白石)과 김영한(金英韓)의 사랑 이야기가 생각나는 아름다운 길상사를 뒤로 하고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거처하셨던 심우장(尋牛莊)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어 집을 북향으로 지었다고 한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고교 시절 암송하던 <님의 침묵>을 중얼거려 보며 선인의 발자취를 둘러보았다.
심우장을 둘러본 후 서서히 비탈길을 내려오면 창립 50주년 덕수교회가 보인다. 조금 더 걸어가면 소설가 이태준이 거주했던 수연산방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잠깐 쉬었다가 간송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린 시절 성북초등학교 옆 숲속에서 친구들과 도토리도 줍고 뛰놀기도 했었는데 그 아름드리 나무 빽빽하고 석탑이 서 있던 그곳이 간송미술관인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간송미술관을 설립하신 분은 그 유명하신 문화재 수집가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선생이다. 그분은 나의 모교 보성중, 보성고의 이사장을 역임하셨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은 간송미술관에서 훈민정음(訓民正音) 원본(해례본)을 보았다고 자랑하셨다. 몇 년 전엔 고교 동문들과 함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간송 특별전'을 관람했다. 올해는 지난 1월부터 3월 말까지 '삼일운동 100주년 간송특별전 대한코콜랙숀'을 개최했다. 올해는 3.1 독립운동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보성고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3.1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간송미술관을 뒤로 하고 유년 시절 뛰놀던 혜화동과 명륜동 그리고 성북동에 접해 있는 서울 성곽길을 걸어 보았다. 혜화동 1번지 보성중학교와 보성고등학교는 청소년 시절의 추억이 묻어있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추억이 깃든, 담쟁이덩굴 기어오르던 빠알간 벽돌 건물 보성고등학교(普成高等學校)는 이제 그곳에 없다. 서울과학고가 우뚝 서 있을 뿐이다.
중학교 1학년 시절 점심 시간이면 친구들과 함께 교실 바로 앞에 있는 커다란 '천년바위'(千載岩)에 올라가서 놀곤 했는데 그 바위에는 소나무 몇 그루가 자리잡고 있었고 알 수 없는 한문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 글씨는 今古一般(금고일반,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이며 당시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지 않지만당시 정계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성리학자)이 쓴 글씨라고 한다.
수 년 전 서울과학고에서 과학 실험 연수를 받을 때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천년바위'를 바라보며 철없던 중학교 시절 추억을 떠올렸다. 옛 보성고 자리인 올립픽기념 국민생활관 근처엔 '송시열 집터'라는 안내표지판이 있다. 또한 그 옆에는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전국 불교인과 학생들의 3.1 독립운동 계획을 논의한 기념터 안내판도 보인다.
우리는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참 많은 것들을 너무 모르고 살아간다. 자랑스런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우선 먼저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녹음 짙어가는 5월, 역사와 문화 향기 가득한 성북동 골목길을 거닐며 앞서간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또한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을 되새겨본 오늘 하루는 더없이 뜻깊고 멋진 날이었다. / 김영택 (2019.04.01)
● 성북동(城北洞)
성북동 골목길은 600년 성곽 밖 오랜 세월을 견디어 낸 고색창연한 길이다. 이 조선 역사의 길에는 길상사를 비롯해 만해 한용운 선생이 말년을 보낸 심우장, 최순우 옛집, 이태준의 집필가옥 수연산방 등이 지나는 나그네들을 따스한 손길로 맞아들인다.
도성 밖 성북동은 원래 사람이 살지 않던 곳이었으나 영조 때 군인들이 주둔하기 시작했고 그 식솔들이 천을 빨아 종로 저자에 팔 수 있는 권리를 줘 생계를 잇게 하였으며 그래도 빈곤을 면할 수 없어 유실수를 심어 과수원으로 생계를 잇게 했다고 한다. 누에농사의 풍년을 빌던 제단인 선잠단지 아래에는 시인 조지훈, 화가 김환기, 작곡가 윤이상, 소설가 염상섭, ‘성북동 비둘기’로 유명한 시인 김광섭 등의 생가터가 모여 있다.
●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 김영한
내 나이 어언 일흔셋
함께 살던 그 시절의 추억은 내 생의 전부
내 가슴 속의 그리움은
쏟으려 해도 쏟기지 않는 물병
서러움만 저절로 쏟아져 나온다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 것이다.
(*마가리: 오막살이)
● 내가 백석이 되어 / 이생진
나는 갔다
백석이 되어 찔레꽃 꺾어 들고 갔다
간밤에 하얀 까치가 물어다 준 신발을 신고 갔다
그리운 사람을 찾아가는데 길을 몰라도
찾아갈 수 있다는 신비한 신발을 신고 갔다
성북동 언덕길을 지나
길상사 넓은 마당 느티나무 아래서
젊은 여인들은 날 알아채지 못하고
차를 마시며 부처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까치는 내가 온다고 반기며 자야에게 달려갔고
나는 극락전 마당 모래를 밟으며 갔다
눈오는 날 재로 뿌려달라던 흰 유언을 밟고 갔다
참나무 밑에서 달을 보던 자야가 나를 반겼다.
느티나무 밑은 대낮인데
참나무 밑은 우리 둘만의 밤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울었다
죽어서 만나는 설움이 무슨 기쁨이냐고 울었다
한참 울다 보니
그것은 장발이 그려놓고 간 그녀의 스무 살 때 치마였다
나는 찔레꽃을 그녀의 치마에 내려놓고 울었다
죽어서도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손수건으로 닦지 못하고
울었다
나는 말을 못했다
찾아오라던 그녀의 집을 죽은 뒤에 찾아와서도
말을 못했다
찔레꽃 향기처럼 속이 타 들어갔다는 말을 못했다
● 백석과 김영한의 사랑 이야기
"그깟 천 억은 그 사람(백석)의 시 한 줄만 못 합니다."
김영한에게 자야(子夜)라는 아명을 지어준 백석, 그를 죽도록 사랑한 김영한, 둘은 지고지순(至高至純) 사랑을 하게 된다. 기생 신분이라는 이유로 백석 집안의 반대로 둘이 같이 산 기간이 3년뿐이지만 그들의 사랑은 김영한이 세상을 뜰 때까지 계속되었을 뿐 아니라 아마도 지금까지 이승에서 계속되고 있을 듯하다. 김영한의 백석에 대한 사랑을 잘 알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대원각의 시주(施主)이다. 1985년 시가 천억 원이 넘는 대원각을 시주하기로 결심한 김영한은 10년 간 무소유의 저자 법정(法頂) 스님을 설득하여 관철시켰고, 2년 후인 1997년 대원각은 길상사(吉祥寺)라는 절로 탈바꿈한다. 이후 많은 사람들은 시주한 천억이 아깝지 않으냐고 질문을 하자 김영한은 한 마디로 명쾌한 답변을 한다.
"그깟 천억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 합니다."
김영한의 백석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최순우 옛집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내고 평생을 문화유산 조명에 바친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의 가옥. 이곳은 그의 대표저서인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 서서>의 산실이기도 하다. 사진 앨범과 유품 전시관을 둘러볼 수 있고, <무량수전배흘림기둥에 기대 서서>와 <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 등 혜곡 최순우의 저서를 읽거나 구입할 수도 있다.
● 길상사(吉祥寺)
1960~80년대까지 3대 요정이었던 대원각이 탈바꿈하여 절이 된 곳. 대원각을 기증한 사람은 길상화(본명 김영한)로, 월북시인 백석과의 실제 러브스토리를 그린 수필 <내사랑 백석>의 저자로 더 유명한 인물이다. 스님이 예전의 고급음식점이던 대원각을 1995년에 시주받아 사찰로 변모시킨 사연을 갖고 있다. 화려함과 치장을 가급적 배제한 수수하고 가난한 절을 표방하였기에 수많은 불자들과 관람객들이 오고가지만 단아하고 조용한 경내에서 마음 편히 쉬어갈 수 있다.
● 심우장(尋牛莊)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승려였던 만해 한용운이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후 주위의 도움으로 마련한 곳. 만해의 옥중기록을 비롯한 유품, 그가 직접 심은 향나무를 만날 수 있다.서울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어있으며, 일제강점기 때 만해 한용운이 지은 집으로 남향을 선호하는 한옥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북향집으로 지었다. 독립 운동가였던 그가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므로 이를 거부하고 북향으로 터를 선택한 것이다. 이처럼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일관했던 한용운은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심우장(尋牛莊)이란 명칭은 선종(禪宗)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왼쪽에 걸린 현판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오세창(1864~1953)이 쓴 것이다.
● 수연산방, 이태준 가옥
<달밤>, <돌다리>, <황진이> 등의작가 상허 이태준의 고택이다. 그가 ‘수연산방’이라 이름 짓고 한국 현대소설의 주옥 같은 작품들을 집필했던 곳이다. 한옥은 일반적으로 사랑채와 안채가 구분되어 있는데, 이 집은 사랑채와 안채가 한 건물 안에 배치되어 있는1900년대 개량한옥의 특징을 보인다. 현재는 찻집 ‘수연산방’으로개방되어 있다. 1933년에 지어진 개량한옥이며, 소설가 이태준이 머물면서 작품을 집필하던 곳. 서울시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외국인들이 많이 오는 전통찻집으로 운영되고 있다.
● 간송미술관
간송(澗松)전형필(全鎣弼)이 수집한 고미술품을 정리․ 연구․ 전시하여, 일제에 의해 왜곡된 우리 역사를 바로잡고 민족문화의 자긍심을 되찾고자 설립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전형필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 華閣)에서 출발하였다. 1962년전형필이 사망하자 아들인 전성우(全晟雨)와 전영우(全暎雨)가 부친의 유업을 이어 1966년간송미술관과 한국민족미술연구소(韓國民族美術硏究所)로 새롭게 발족하였다.
/ Daum 백과 사전 발췌
'[백세인생] 걷기 영양 건강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께걷기] (1) '고양 독립운동가의 길' 함께 걷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기념, 일산 호수공원 (2019.04.13) (0) | 2019.04.13 |
---|---|
[골목산책] (2) 성북동 길상사, 심우정, 최순우 옛집, 이태준의 수연산방, 간송미술관, 보성고(普成高) 옛터, 5월 풍경 (0) | 2019.04.01 |
[강릉 폭설] 2014년 겨울 : 강릉에 내린 폭설(3) - 우리가 눈발이라면 따뜻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자 (0) | 2014.02.10 |
[강릉 폭설] 2014년 겨울 : 강릉에 내린 폭설(2) - 나뭇가지 눈꽃 무게 견디며 목련은 봄을 기다리고... (0) | 2014.02.10 |
[강릉 폭설] 2014년 겨울 : 강릉에 내린 폭설(1) - 그리움 안고 쏟아지는 함박눈 (0) | 2014.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