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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8) 피로

푸레택 2022. 9. 3. 08:36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8)피로 (daum.net)

 

[장석주 시인의 인문학 산책] (8)피로

피로는 살아있는 존재에 스미는 작은 죽음피로는 욕구의 지연(遲延) 속에서 가장 자주 겪는 존재론적인 사건이다. 자주 겪는 일이어서 사람들은 피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왜 안 그렇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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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는 살아있는 존재에 스미는 작은 죽음

피로는 욕구의 지연(遲延) 속에서 가장 자주 겪는 존재론적인 사건이다. 자주 겪는 일이어서 사람들은 피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왜 안 그렇겠는가! "피로는 불행 가운데 가장 대수롭지 않은 불행이며, 중립 가운데 중립이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면 아무도 허영으로 선택하지 않은 경험이다."(모리스 블랑쇼 '무한한 대담', 롤랑 바르트 '중립'에서 재인용) 아울러 피로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는 그것이 육체와 근육을 너무 써서 생긴다는 생각이다. 사실 피로는 육체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 더 정확하게는 도덕의 층위에서 일어나는 딜레마의 문제다. 피로는 열없는 불꽃, 뜨거움을 잃어버린 불꽃이다. 피로는 지속하지 않는 지속이고, 죽지 않는 죽음이다. 따라서 피로는 임상학적으로 살아있는 존재에 스미는 작은 죽음으로 다뤄야 마땅하다.

◇빈센트 반 고흐의 낮잠.

심리와 동기의 고갈에서 생기는 세계와 불화하는 욕구의 한 형태, 혹은 존재 내부의 가능성을 초과하는 '더 많이 살고자 함'에서 비롯하는 죽음들! 욕구는 한계가 없지만 시간에는 한계가 있다. 피로는 시간의 저항, 지연, 방해 때문에 생기는 자기 파괴의 부정적 에너지다. '더 많이 살고자 함'은 한계에 부닥치는 순간 그 욕구-주체를 찌르는 에너지로 바뀐다. 피로는 잘-있음(bien-etre)이 아니지만 잘못-있음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피로가 우주적 향유에 대한 의심이고, 잘-있음에서의 이탈 징후인 것은 틀림없다. 피로는 외과적 증상이 아니라 정신신경과적 증상이고, 그것의 가능태는 더 작게 존재-하기, 웅크리기, 소금기둥-되기다. 그렇기 때문에 피로에 빠진 자는 사회와 담을 쌓고 소통하기를 그친다. 자꾸 제 존재를 세계의 저 바깥쪽으로 밀고 나간다. 사르트르의 유명한 단편 '구토'에서 주인공 로캉탱이 바로 그런 존재다. 로캉탱은 항구 도시에서 한 귀족의 전기를 쓰는 일에 몰두한다. 그의 일상이란 단조롭기 짝이 없다. 일기 쓰기, 사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 카페·도서관·박물관 따위에서 어슬렁대기가 그의 일상 전부다. 구토는 이 세계에 가득 차 있는 속물들의 진부함에 대한 거부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속물의 진부함을 견디는 데서 생겨난 피로의 징후다. 마침내 로캉탱은 그 속물들의 세계와 결별한다. "나는 돌아다봤다. 작은 그림의 성당 속의 한없이 고운 백합이여, 안녕, 우리의 자존심이여, 우리의 존재 이유여, 안녕, '더러운 새끼들'이여 안녕."(사르트르 '구토')

피로는 존재의 과도함에서 출현한다는 점에서 권태와 유사하다. '너무 많이 존재함'에서 생기는 권태는 증상도 모호하고 그 모호함 때문에 의사는 어떤 처방전도 낼 수가 없다. 권태를 방치한다고 해서 증후가 나빠져서 죽음에 이르는 경우는 일어나지 않는다. 피로 때문에 괴롭기는 하겠지만 죽는 사람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권태는 바로 그 피로의 질료다. 따라서 피로와 권태는 원인은 다르지만 증후는 매우 닮아 있다. 권태가 그렇다면 피로 역시 문명화된 세계에서 자주 발견하는 문화인류학적으로 질병이라고 분류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레비나스는 이렇게 쓴다. "피로, 특히 우리가 경솔하게 신체적이라 일컫는 피로 같은 것도 우선은 어떤 경직, 어떤 둔감해지는 마비, 어떤 식의 오그라듦으로 나타난다. (중략) 피로에서 오는 마비는 매우 특징적이다. 그 특징이란 존재가 결부되어 있는 것에 대한 그 존재의 추구의 불가능함, 계속적으로 커 나가는 괴리이다. 이는 마치 쥐고 있는 것을 조금씩 놓아버리는 그런 손과 같다. 피로는 느슨해짐의 원인이라기보다는 느슨해짐 그 자체이다."(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피로 때문에 늙지는 않는다. 피로는 나이 먹기에 따른 필연적 현상이 아니라 몽상의 고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어린아이는 피로를 모른다. 어린아이는 피로를 인지할 수 있는 지각이 없어서다. 어린아이들은 차라리 무지몽매하다. 피로는 어른들만 겪는 문명의 질병이다. 동양의 철학자들은 그 사실을 오래전에 꿰뚫어 보았다. 장자는 "아이는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다. 화평이 지극하기 때문이다"('장자', '경상초')라고 말했다. 어린아이가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것은 유약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강장을 도무지 모른다. 강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항상 과도함, 즉 '너무 많이 존재함'이 아니던가? 강장을 추구하면 필연적으로 늙는다. 늙어지면 피로를 피할 수가 없다. 피로 때문에 늙는 것이 아니라 늙기 때문에 피로한 것이다.

때로 스포츠는 무수한 피로를 딛고 도약과 비상의 기적에 도달한다.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피겨의 여제(女帝)로 등극한 김연아는 우리에게 도약과 비상의 기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그 도약에는 어떤 피로의 그림자도 없었다. 김연아의 도약에서 보는 것은 피로가 아니라 "유리구슬, 버드나무, 물방울, 미루나무, 바람에 휘어지는 분수, 땅을 디디고선 춤추는 나무"(옥타비오 파스 '태양의 돌')다. 바람에 휘어지는 분수, 바람에 춤추는 나무, 바람을 타고 활강하는 새들. 누구나 공중에 제 삶을 의탁하는 자는 바람의 총아(寵兒)다! 조지 거슈인의 피아노협주곡 다장조가 흐르는 4분 동안 얼음소녀는 빙판 위에서 제비처럼 선회하고, 종달새처럼 솟구치고, 독수리처럼 늠름하게 활강한다. 팽팽한 긴장을 즐기며 얼음 위를 스쳐가는 얼음소녀는 민첩하고, 섬세하고, 우아했다. 도약은 높이 이루어졌고 회전은 우아하면서도 빨랐다. 공중으로 도약할 때 그동안의 수고와 피로들이 금분(金粉)처럼 반짝이며 빙판 위로 떨어진다. 분수도 아닌데 분수처럼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 물의 날개를 활짝 펼쳤고, 날개를 가진 새도 아닌데 공중에서 오래 떠갔다. 중력의 영(靈)들도 넋이 빠져 잠시 제 할 일을 잊은 듯 공중으로 도약한 소녀를 땅 위로 내려놓을 줄 몰랐다. 트리플 플립, 더블 악셀, 더블 토루프, 플라잉 콤비네이션, 스파이럴 시퀀스, 트리플 살코, 트리플 러츠, 플라잉 싯 스핀…. 이런 것들을 몰라도 김연아는 우리에게 도약의 아름다움이고 무엇인지를, 그리고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겨우 견딜 수 있는 무서움의 시작"(라이너 마리아 릴케)임을 실연(實演)으로 보여주었다. 아름다움이란 고요와 별, 무지개, 태초의 바다, 피어나는 모든 꽃들, 뭇 생명들이 탄생하는 찰나들, 약동하는 우주! 그 앞에서 약하고 가난한 것들을 슬프게 하는 울부짖음과 으르렁거림, 악과 메마름, 비열과 기만과 술수(術數)들은 다 작아지고 숨을 죽인다. 오오, 아름다움이란 그런 것. 모든 뒤뜰과 정원의 꽃들은 피어나고, 지층을 덮은 광대한 바다의 파도는 솟구쳐 오른다. 숲 속에 숨은 옹달샘에서는 맑은 물들이 펑펑 솟고, 꿀을 모으는 양봉 통마다 꿀들은 가득 차오른다.

걷는 자가 피로한 것이 아니라 걷기를 멈춘 자가 피로한 법이다. 피로해서 멈춘 것이 아니다. 피로는 멈춘 자의 어깨 위로 날개를 접고 내려앉는다. 쉬지 않고 걸어가는 자, 달리는 자, 공중으로 도약하는 자는 피로를 모른다. 피로는 걷다가 쉬는 자, 달리다가 멈춘 자, 날다가 떨어진 자의 육체와 근육을 덮친다. 피로는 존재를 집어삼킨다. 마찬가지로 일하는 자도 피로를 모른다. 일하는 동안에는 피로할 틈이 없다. 항상 피로는 수고와 보람 사이를 파고든다. 피로는 일하지 않는 자, 수고함에서 면제된 자, 한가롭게 노는 자에게 덮친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고와 보람 사이를 한껏 넓혀놓고 그 사이에 제 존재를 부려놓기 때문이다.

피로한 자는 존재론적인 층위에서 함량의 빈곤을 느끼며 잘-먹고 잘-삶에서 이탈한다. 잘-삶은 '나'라는 개별자 속으로 세계를 끌어당겨 능동화하는 것, 혹은 저를 둘러싼 세계를 '나'에게로 동화시키는 것이다. 피로한 자는 그 잘-삶에서 스스로 피동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피로는 그 자체로 고갈된 존재의 희미한 자기증명이다. 중요한 것은 피로에서 대지적 휴식에의 갈망이 싹튼다는 사실이다. 이때 싹은 어머니인 대지에서 돋아나는 푸른 불꽃이자 하늘로 머리를 향한다는 점에서 뿌리를 내린 새라고 할 수 있다. "바람이 분다, 다시 살아봐야겠다"(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는 구절은 그 싹들의 속삭임이다. 휴식은 고갈을 딛고 다시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키운다. 우리 내면에 가득 저 삶을 갈망하는 싹들이 돋아나는 것이다.

피로한 자는 열정을 잃은 뒤 서서히 소금기둥으로 변신한다. 그 존재의 경화(硬化)! 피로는 솟구쳐 오르다가 추락함이고, 잘-있음의 흩어짐이고, 한계에로의 개종이다. 솟구쳐 오름이 영혼의 만개라면, 추락과 흩어짐은 존재-갱신을 그침이고, 좌절과 분할 속에서 겪는 최소화된 삶이다. 피로한 자는 누구나 하나의 중심에서 이탈하여 천 개로 분산한다. 어쩌면 피로는 분산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다. 피로를 극복하는 일은 피로와 싸우지 않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지혜를 참고할 것. 어린아이들은 자연 자체다. 그들은 과도함을 추구하지 않음으로 낭비가 없고 낭비가 없는 까닭에 피로의 외연(外延)도 생기지 않는다. 그들은 공중으로 솟구치기 위해 뼛속을 비우는 종달새같이 최소화된 삶에서 충족을 찾는다. 논리와 이성에 매이지 마라. 규모를 키우려는 욕망을 버려라. 작게 살라. 오로지 뿌리로 돌아가라. 더 많이. 피로를 물리치지 말고 그것을 타고 나가라. 바람이 물결을 타듯이. 걷고, 뛰고, 날아라!

글=장석주 시인ㅣ세계일보 2010.07.013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사르트르 '구토', 방곤 옮김, 문예출판사, 1999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서동욱 옮김, 민음사, 2003
 롤랑 바르트 '중립', 김웅권 옮김, 동문선, 2004

/ 2022.09.03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