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손 닿는 구석구석에 주신 열매.. 영성도 단풍 (daum.net)
ㅣ소설가 임옥인 추수감사절에 찾은 서울 둔촌동 옛 집터
“산마다 불이 탄다 고운 단풍에/ 골마다 흘러간다 맑은 물줄기/ 황금빛 논과 밭에 풍년이 왔다/ 드맑은 하늘가에 노래 퍼진다/ 눈이 닿은 우주공간에/ 손이 닿은 구석구석에/ 우리 주님 주신 열매/ 우리 주님 주신 알곡/ 감사하자 찬송하자/ 감사하자 찬송하자.” (임옥인의 ‘산마다 불이 탄다 고운 단풍에’ 중에서)
여름날 무성했던 푸른 잎들이 노랗게 빨갛게 황금빛으로 물든 가을 들녘을 생동감 있게 노래한 이 시는 한국교회 성도들이 추수감사절에 가장 즐겨 부르는 찬송 ‘산마다 불이 탄다 고운 단풍에’(592장) 가사이다. 산마다 불이 타는 듯한 고운 단풍과 골짜기마다 흘러내리는 물줄기, 그리고 풍년을 감사하는 농부들의 기도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이 넘치는 감사의 노래를 한 작가는 평생 병마와 싸우면서도 감사를 잃지 않았던 여성 소설가 임옥인(1911∼1995)이다.
한 해 동안 베풀어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추수감사주일(20일)을 맞아 감사의 눈물로 일생을 일군 임옥인의 삶과 신앙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임옥인은 1940년 ‘문장’에 ‘봉선화’ ‘고영’ ‘후기’ 등의 단편소설이 추천되면서 등단한 뒤 장편 ‘월남 전후’로 아시아 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박두진 박목월 등과 같은 시기에 활동하며 근대문학의 기초를 놓았다. 75년 YWCA 회장으로 봉사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으나 신앙의 힘으로 회복했다. 그는 새 생명을 얻은 데 감사해 ‘새손의 노래’라는 간증시를 썼다. 이후 80년 문예전도지 ‘말씀’을 간행하는 등 복음전도에 힘을 기울였다.
눈물의 불모지에서 감사
그는 숱한 육체적 질병을 이겨내 ‘기적의 사람’으로 불렸다. 일곱 살 때 복막염을 앓은 후 폐결핵, 척추카리에스, 신장염, 맹장염, 뇌졸중 등으로 11차례의 대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고통으로 얼룩진 자신의 인생을 통해 발견한 것은 ‘감사’였다. 그가 67년 찬송가위원회로부터 청탁을 받아 ‘산마다 불이 탄다…’를 작사한 것도 수많은 죽음의 고비에서 살아난 생존의 기쁨을 노래하기 위해서였다. 무엇보다 생활 전부가 감사였기에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행 14:17)는 말씀을 바탕으로 작사했다.
소설가 임옥인이 70년부터 작고하기 전까지 살았던 서울 둔촌동 92번지를 최근 찾았다. 그가 집을 지을 당시 이곳은 천연 약수가 솟고 논밭이 펼쳐진 한가한 농촌이었다. 서울 중심부에서는 멀고 교통도 불편했으나 그는 넓은 터에 1000여 그루의 나무를 심고 한쪽 마당을 잔디밭으로 만들어 문인들의 세미나와 토론 장소로 제공했다.
보훈병원 정문에서 선린초등학교를 지나면 오른편에 옛 집터가 있다. 돌계단을 밟고 내려가면 작가가 사랑채로 사용했던 아담한 한옥 별채와 벽돌로 지어진 2층 양옥이 보인다. 마당이 깊었다. 작가가 작품을 쓰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살았던 이곳은 현재 아쉽게도 집터만 보존되어 있고 건물 내부는 음식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음식점 직원은 “이곳은 능소화가 만발하는 집이라 능소원이라고 불리며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곳이었다”며 “지금도 그 시절을 그리워해 식당을 찾는 이들이 간간이 있다”고 전했다.
능소원에서 나와 작가가 자주 거닐던 보훈병원 뒤편, 일자산 약수터로 향했다. 산책길에서 만난 한 주민은 “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약수가 나와 요양원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되었고 그 연유로 보훈병원이 세워졌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일자산은 해발 155m로 서울 강동구와 경기도 하남시에 걸쳐 있는 경사가 완만한 산이다. 가을 단풍이 한창인 일자산을 산책하며 작가가 평생 일궈온 감사의 삶을 떠올렸다.
문학·교육·신앙의 세 기둥
작가는 수필집 ‘나의 이력서’에서 자신의 삶은 ‘문학·교육·신앙’이란 세 개의 기둥으로 이뤄져 있다고 말했다. “문학·교육·신앙 이것이 내 인생의 세 기둥이다. 문학과 교육은 서로 한 울타리 안에 지어진 집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나는 이 두 집을 드나들면서 열심히 일해 온 셈이다. 나는 이 두 채의 집이 지어진 마당에 신앙의 꽃밭과 숲을 가꿨다. 생명의 화초, 사랑의 나무를 한 포기씩 한 그루씩 정성스레 씨 뿌리고 키워서 창조의 아름다움과 은혜를 누리려 한 것이다. 이 마당에 나는 조그만 샘도 팠다. 하나님 말씀의 은총수이다. 이 물은 계속 괴고 넘쳐서 시냇물이 되어 마당을 꿰어 흐르고 있다.”
함북 길주가 고향인 그가 일곱 살 때 오빠의 손을 잡고 길주교회 주일학교에 나간 것이 믿음의 첫걸음이었다. 이후 신앙은 인생의 나침반이었고 고비마다 딛고 일어서게 하는 디딤돌이었다. 작가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소설의 중요한 모티브로 세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결국 하나이기 때문이다. 새벽기도에 갈 때마다 마주치는 노숙하는 노인을 양로원으로 보내기까지 우여곡절을 그린 ‘노숙하는 노인’에서 주인공이 고민하는 핵심도 ‘이웃에 대한 사랑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일제 말기 한국어 말살정책으로 문장을 비롯한 각종 잡지의 폐간으로 작가의 창작 열정은 좌절되었다.
고향에서 해방을 맞지만 해방공간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창작이 아닌 실천이었다. 벽촌마을에 야학을 세우고 농촌 부녀자 계몽운동에 전력을 다한다. 그러나 공산당과의 마찰로 어려움을 겪다 46년 단신으로 월남했다. 8·15광복부터 월남하기까지의 체험을 장편 ‘월남전후’에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그의 작품엔 기독교적인 윤리의식이 드러난다. 인물에 인고의 정신이 담기거나 이것이 확장돼 이웃의 아픔, 시대의 아픔을 극복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또 작가는 분단과 전쟁 가난과 고독의 현실에서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그 믿음을 자신의 삶과 문학에서 실천하려 했다.
작가는 일평생 글을 쓰며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열중했다. 일본 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함흥영생여자고보, 루씨여고, 창덕여고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이후 건국대 가정대학장을 지냈고 크리스천문학가협회 초대회장, 한국여류문학가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12세 나이 차 극복한 부부 작가
49년, 38세의 중견작가 임옥인은 26세의 신진 아동문학가 방기환을 처음 만났다. 잡지 ‘소년’으로부터 청탁받은 원고를 들고 ‘소년’ 편집실을 찾았을 때 주간 방기환이 그를 반갑게 맞았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의 작품에 관한 조언을 듣고 의지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 하지만 6·25전쟁은 두 사람을 기약 없이 갈라놓고 만다. 두 사람이 재회한 것은 53년의 대구 피란 시절이었다. 1·4후퇴 때 또다시 혈혈단신 피란길에 오른 임옥인이 온갖 고생 끝에 심장병까지 얻어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사람이 방기환이었다. 그는 임옥인을 혈육처럼 보살펴 건강을 되찾게 했다. 그들은 문학적인 이해를 통해서 서로의 벽을 허물고 54년, 한 가정을 이뤘다. 방기환은 31세, 임옥인은 43세였다. 늦은 결혼 탓에 자식이 없는 것이 아쉬웠으나 부부는 늘 행복했고, 문단에서는 ‘잉꼬 부부’로 통했다.
눈물은 선물이었다
64세의 임옥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남편 방기환이 흐느끼면서 “내 수명에서 15년을 떼어 우리 할매에게 얹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 기도가 통했는지 임옥인은 기적처럼 소생했다. 건강을 찾은 임옥인은 간증시를 썼다.
“눈물이 마련되었습니다/ 이 눈물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선물입니다/ 이 눈물은/ 죽음을 관통하면서 얻은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어찌 저만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새손의 노래’ 중에서)
작가는 구원의 은혜를 보답하는 길을 찾았다. 이웃에 대한 사랑이었다. 고학생이나 고아들을 친자식처럼 돌봤다. 그들은 장로, 목사, 선교사, 작가, 교사, 디자이너가 되었다. 한 무기수를 9년간 면회하며 신앙을 심어주었다. 방기환은 93년 7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고, 임옥인은 그보다 2년을 더 산 뒤 84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내는 남편의 기도대로 햇수로 남편보다 15년을 더 살았다.
작가는 평소 “주님의 은혜로 덤으로 산다”고 말했다. 입버릇처럼 “예수님은 폐품 이용에도 능하신 분이다. 이토록 쓸데없는 육신을 이리 꿰매고 저리 꿰매고 계속 사용하시니…”라고 말했다. 깊은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고백이다.
감사에는 눈물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던 작가는 눈물의 불모지에는 인생의 사랑이 싹틀 수도, 사랑이 자랄 수도 없다고 여겼다. 가뭄으로 갈라진 여름 논밭 같은 우리 인생의 논밭을 감사로 한없이 적셔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삶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란 열매로 결실을 맺었다.
[임옥인처럼 생각하기]
“슬프고 괴로울 때 위로 주시는 하나님”
이웃과 시대의 아픔을 함께한 소설가 임옥인의 창작세계는 기독교정신을 기반으로 한다. 이는 자신을 죽음의 용광로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로 결단했기 때문이다. 그의 봉사 생활과 창작 생활은 조로하기 쉬운 문단에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했다. 기독교정신에 의한 봉사활동이 창작의 결실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60여편의 단편이나 10여편의 장편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역경 속에서 인고(忍苦)하는 여인의 생활을 묘사한 ‘후처기’는 그의 출세작이며, 해방 후 혜산진의 무질서한 상황에서 가정 학교를 세워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살려다가 마침내 월남하는 생활을 그린 ‘월남 전후’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산장과 목장을 중심으로 사랑의 인고와 비극을 그린 ‘힘의 서정’, 선한 마음으로 살려는 기독교 의식이 짙게 나타난 ‘들에 핀 백합화를 보아라’ 등 여성의 생활에 얽힌 애환을 리얼리즘적인 기법으로 형상화한 작품이 문학 세계의 기축을 이룬다.
뿐만 아니라 식민지 이후 8·15해방과 6·25전쟁 등 수많은 사회적 격동 속에서의 여성 계층의 생활사를 압축해 부각시켰다. 또 기독교정신에 기저를 둔 의식과 전통적 관습에 젖은 의식을 극복하려는 여인상을 형상화한 것에 소설의 의미가 모아진다.
작가는 생전의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전에는 이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다가 마음으로 보았고, 이제는 영의 눈으로 봅니다. 기도의 샘에 침잠해서 하나님과 만날 때 놀라운 기쁨이 넘쳐납니다. 견딜 수 없이 슬플 때, 괴로울 때,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내 곁에서 대답하시는 음성을 순간순간 듣고 있습니다.”
글·사진=이지현 선임기자ㅣ국민일보 201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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