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기독문학기행] 고독과 눈물, 신을 향해 벌리는 팔이 더욱 커지다 (daum.net)
ㅣ시인 김현승, 광주 양림동 시인의 길과 詩碑
광주 남구 양림동은 근현대의 시간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20세기 초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선교사들이 광주에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 양림동이다. 기독교 영향을 받은 근대식 학교, 병원, 선교사 주택 등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또한 이곳은 ‘고독의 시인’ ‘눈물의 시인’으로 불리는 다형(茶兄) 김현승(1913∼1975) 문학의 발원지이다. 그는 신앙과 사유, 고독, 근대의 분위기 속에서 시의 방향을 가다듬고 천착했다. 그는 양림동을 자신의 고향이자 ‘영적인 저수지’로 여겼다. 그는 부친이 양림교회에 부임하던 때부터 양림동에 정착해 30여년간 머물렀다. 고독과 눈물, 신앙으로 집약되는 김현승 시인의 흔적을 만나기 위해 지난 5일 양림동을 찾았다.
양림의 정신은 ‘사랑과 희생’
호남신학대학 캠퍼스에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로 시작하는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 시비가 있다. 평소 김 시인은 호남신학대학이 있는 양림산을 자주 산책하며 사색을 즐겼다고 한다. 학교 뒷산에 있는 선교사 묘원으로 가는 길목엔 ‘시인의 길’이 조성돼 있다. 시인은 이곳에서 무등산과 시내를 바라보며 시상을 떠올렸을 것이다.
선교사 묘원으로 오르는 길엔 65개 디딤돌로 이루어진 ‘고난의 길’이 있다. 한국에서 선교하는 동안 아내와 자녀를 잃고 이곳에 묻힌 선교사들의 아픔을 생각하며 걷는 길이다. 선교사 묘원엔 배유지, 우일선, 오웬을 비롯해 호남 지역에서 선교하다 숨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묘 22기가 안장돼 있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인 고요한 무덤들 앞에서 100여년 전 이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 선교사들을 기억했다. 누군가 선교사들의 사랑과 희생이 ‘양림의 정신’이라고 말했던 것이 충분히 이해됐다.
이런 사색의 공간에서 성장한 시인은 숭실전문학교 3학년 때인 1934년 5월 동아일보에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과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로 등단했다. 이후 서정성 짙은 시와 종교적 성찰이 담긴 시를 발표하며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열어왔다. 그의 밑바탕엔 선조 때부터 내려오는 신앙이 깔려 있다.
신사참배 항거로 고초 당해
그는 호남 최초의 세례교인 중 한명인 김창국 목사와 광주YWCA 초대회장을 지낸 양응모 여사 사이에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맏형은 군산 개복동교회를 담임했던 김현정 목사이다. 한국선교 초기에 한의원을 했던 조부가 복음을 받아들인 믿음의 가정이다. 이 가정은 1937년 신사참배 항거사건에 연루돼 고초를 겪었다. 그는 아버지와 누이동생과 함께 투옥돼 고문을 당했고, 누이동생은 그 일로 목숨을 잃었다. 시인은 고문의 육체적·정신적 후유증을 겪는 와중에 교직에서 파면됐고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으로 1945년 광복까지 시작(詩作) 역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김현승 시인의 부친 김창국 목사가 1922년부터 25년 동안 시무했던 양림교회는 광주 최초의 교회이다. 1904년 미국 선교사 배유지(유진벨·1868∼1925)가 자신의 사택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교회의 시작이다. 현재 건물은 1954년에 지어졌다. 양림교회 앞에는 광주에서 활동하다 순교한 오웬 선교사와 그 할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2층의 회색 벽돌건물 ‘오웬기념각’이 있다. 당시 유교적 관습에 따라 남녀가 들어가는 문이 달랐기에 출입문이 2개이고 설교단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 구조로 돼 있다.
커피와 차를 좋아했던 茶兄
아쉽게도 김현승 문학관이 없다. 제중로 47번길에서 만난 ‘다형다방’은 시인 김현승을 기념하는 무인카페다. 그는 가을과 가을의 향기를 닮은 커피를 좋아했다. 그는 생전에 커피를 즐겨마셨기에 ‘차를 좋아하는 형’(다형)이라 불렸다. 방문객들은 셀프 형식으로 제공되는 믹스커피와 녹차티백을 이용해 자유롭게 차를 마시고 쉬었다 갈 수 있다. 내부엔 양림동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카페 옆엔 ‘시인의 벤치’가 마련돼 있어 간간이 여행자들이 머물다 간다.
다형다방에서 나오면 오른편으로 호남신대 언덕길이 이어진다. 이 야트막한 언덕은 일제강점기에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을 풍장했던 곳이다. 선교사들은 이곳에 사택을 짓고 일반 환자와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이 언덕은 그래서 ‘광주의 예루살렘’ ‘선교사 마을’로 불리며 치유의 공간, 교육의 공간으로 발전해 갔다. 호남신학대학으로 향하는 길에 피터슨, 우일선 선교사 사택을 만날 수 있다. 시인은 이 길을 자주 걸으며 암흑과 같은 시대적 현실에서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했다.
고독이 클수록 강해지는 신앙
그는 신 앞에 구원을 갈구하며 뿌리 깊은 원죄의식을 느꼈다. “나는 내가 항상 무겁다/ 나같이 무거운 무게도 내게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무거워/ 나를 등에 지고 다닌다/ 나는 나의 짐이다.”(연(鉛) 중에서)
이러한 원죄의식이 기독교정신으로 표출된 것이 고독이었다. “나의 본질은 고독이다. 인간은 그 근원에 있어 고독하다. 그러므로 고독감은 인간의 자폐증이다. 따라서 고독감이 강할수록 인간의 영원과 무한에 대한 신앙은 강하게 되고, 신을 향하여 벌리는 팔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숭전 어문학 제2집’ 중에서)
그는 절대고독을 통해 절대신앙을 노래했다.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뜻한 체온을 새로이 느낀다./ 이 체온으로 나는 내게서 끝나는/ 나의 영원을 외로이 내 가슴에 품어준다.”(‘절대고독’ 중에서)
시인은 고독의 사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께 회개하며 ‘고독’을 ‘썩지 않은 기쁨의 눈물’로 바꾸어 가기를 갈망했다. 슬픔이나 눈물과 같은 어두운 면을 통해 인생의 가치를 추구했다. 이는 십자가에 의한 속죄 사상과 고통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체득해 보려는 신앙이 모태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신 앞에 드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변하기 쉬운 웃음이 아니라 신 앞에서 흘리는 눈물뿐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사랑하는 4살 된 아들을 병으로 잃고 그 아픔을 믿음으로 달래며 ‘눈물’이란 시를 썼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시 ‘눈물’ 전문)
그는 붓으로 눈물을 찍어 시를 썼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슬픔으로 해석했다. 온 인류에게 버림받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았던 그리스도의 슬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내 눈물의 밤이슬과/ 내 이웃들의 머금은 미소와/ 저 슬픈 미망인들의 눈동자를 만드신/당신은,/ 우리보다 먼저 오시어 시로서 지상을 윤택케 하신 이”(시 ‘육체’ 중에서)
고독에 대한 탐색으로 가장 온전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던 김현승 시인은 1975년 4월 10일, 숭전대학(숭실대 전신) 채플 시간에 예정된 설교를 앞두고 기도하던 중 쓰러져 운명했다.
100년의 시간이 머무는 것 같은 양림동엔 시인이 30여년간 살았던 집(양림동 78번지)이 있다. 그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6권의 시집에 260여편의 시를 남겼지만 시인의 집은 오래전에 헐리고 현재 가옥 터만 남아있다. 그 빈터 앞에서 그가 작고하기 두달 전에 쓴 시 ‘마지막 지상에서’가 떠올랐다. “나의 넋이여/ 그 나라의 무덤은/ 안녕한가 사방은 고요하다!/ 오늘 하루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이 시는 회의와 갈등으로 방황하던 그가 정신적 고뇌를 마무리 짓고 평안한 하나님 나라를 희망한 마지막 육성이었다.
[김현승처럼 생각하기]
“시를 잃더라도 기독교적 신념 놓칠 수 없다”
김현승(사진) 시인의 초기 시는 사색과 관조, 철학적 경향이 주를 이루었다. 중기에는 신과 종교에 대한 회의로 ‘고독의 시’를 주로 썼으며 자신도 신을 떠났다고 고백했다. 그러다 1973년 3월 둘째 아들의 결혼식 날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 약 두 달간의 병상에서 일어나자 그동안의 종교적 방황과 인간적 교만을 참회하고 앞으로는 믿음의 시만 쓰겠다고 고백했다.
그가 병상에서 일어난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문학관의 개조였다. “나는 20대에 문단에 나와 지금까지 반생 이상을 시를 썼다. 그러나 나는 목사의 아들이며 시인이면서도 한 번도 우리 사회에 발행하는 신문이나 잡지에 신앙 중심의 시를 발표한 적이 없다. 기독교 신문이나 기독교 잡지에서 원고 청탁이 오면 기독교 시를 써 보냈으나 일간신문이나 잡지에는 지상 중심의 시를 써서 보내고도 예사로 알아왔다. 나는 이 사실을 참회했다. 내가 받은 시재(詩材)는 어디로부터 받은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지상의 어느 누가 내 가슴과 머릿속에 넣어 준 것이 아니고 넣을 수도 없다.”(산문 ‘하나님께 감사를 보내며’ 중에서)
‘고독의 성’에서 걸어 나와 하나님께 의지한 그는 신앙은 삶의 근원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詩作生活 20年記’에서 “지금의 나의 심경은 시를 잃더라도 나의 기독교적 구원의 욕망과 신념은 결단코 놓칠 수 없고 변할 수 없다”고 밝혔다. 시 ‘절대신앙’은 신 앞에서 절대 변하지 않는 신앙을 확증하는 듯하다. “당신의 불꽃 속으로/ 나의 눈송이가/ 뛰어듭니다./ 당신의 불꽃은/ 나의 눈송이를/ 자취도 없이 품어 줍니다.”(‘절대신앙’ 전문)
광주=글·사진 이지현 선임기자ㅣ국민일보 2016.08.12
/ 2022.07.16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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