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상] 동의보감 명의 허준의 발자취를 찾아서
장맛비가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비가 내리지 않아 아침 일찍 황금내공원으로 테니스 벽치기를 하러 갔다.
벽은 언제나 정직하다. 내가 잘 친 공은 어김없이 내게 잘 돌려주고, 잘못 친 공은 내게서 멀리 달아난다. 꾸준히 벽치기 연습을 하였더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포핸드와 백핸드 스트로크가 안정되어 재미와 자신감이 샘솟는다. 복식 게임을 하게 되면 파트너에 대한 부담감이 생긴다. 그런데 벽치기는 이런 부담감 없이 혼자 즐길 수 있어서 좋다.
테니스는 자기 코트에서만 볼을 치니 축구나 농구와 달리 상대방과 부딪혀 부상을 입을 위험이 없어 노년에도 즐길 수 있는 운동이다. 또한 젊은이들과도 어울려 칠 수 있으니 나이든 사람에게 테니스보다 더 좋은 구기 운동은 없다. 건강 관리를 잘 하여 오래도록 테니스를 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이듦의 좋은 점은 작은 일에도 기뻐하게 되는 것, 욕심을 내려놓고 자족할 줄 아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서둘러 쉼터로 피했다. 더이상 테니스 벽치기를 할 상황이 아니다. 오랜만에 허준박물관을 관람하기로 마음먹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박물관으로 가는길, 풋살장에서 함성을 지르며 젊음을 불태우던 청소년들도 빗줄기에 멈칫한다. 가양대교 입구에는 서울 둘레길 제7코스 봉산·앵봉산 코스1 인증 스탬프 보관함이 우체통처럼 세워져 있다.
허준박물관은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어 여러 번 찾아왔었다. 2층 안내 데스크에서 3층으로 오르는 층계에 붙여놓은 재미난 글이 오늘따라 눈에 들어온다. “사람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의 둥긂을, 사람 발이 각진 것은 땅의 각짐을 본받는다. 하늘에 사계절이 있으니 사람에게는 사지가 있다. 하늘에 오행이 있으니 사람에게 오장이 있으며, 하늘에 여섯 극점이 있으니 사람에게 육부가 있다.”
《동의보감》 본문 책머리에 나오는 글이라고 한다. 자료를 찾아보니 출처마다 번역이 조금씩 다르다.
“천지에서 존재하는 것 가운데 사람이 가장 귀중하다. 사람의 둥근 머리는 하늘을 닮았고 네모난 발은 땅을 닮았다. 하늘에 사시(四時)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사지(四肢)가 있고, 하늘에 오행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오장이 있으며, 하늘에 여섯 극점이 있으니 사람에게 육부가 있다. 하늘의 여덟 방위에서 부는 바람(八風)이 있으니 사람에게 여덟 군데 마디(八節)가 있고, 하늘에 아홉 별이 있어 사람에게 아홉 구멍(九穴)이 있다. 사람의 열두경맥(經脈)은 하늘의 12시를 본받고, 사람의 스물네 개 혈(穴)자리는 하늘의 24절기를 본받는다. 또한 하늘에 365도가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도 365관절이 있다.”
“하늘에 해와 달이 있듯이 사람에게 눈과 귀가 있다. 하늘에 낮과 밤이 있듯이 사람에게 잠듦과 깸이 있다. 하늘에 천둥과 번개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기쁨과 노함이 있다. 하늘에 비와 이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눈물과 콧물이 있다. 하늘에 음양이 있듯이 사람에게 추위와 신열이 있다. 땅에 샘물이 있듯이 사람에게 혈맥이 있으며, 땅에서 초목이 자라듯 사람 몸에서 털과 머리카락이 자란다. 땅에 금석이 있듯이 사람에게 치아가 있다.”
동의보감은 ‘신형장부도’(身形腸附圖)라는 신체의 모양과 장기의 위치를 표시한 그림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우주와 인간은 서로 다르지 않은 존재이며, 또 서로 ‘상통·상응’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동의보감》을 관통하는 철학은 ‘인간은 자연을 닮은 소우주’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의 원리를 따라야 하고, 그 원리를 거스른다면 인체의 균형도 깨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요컨데 생명(生命)과 우주(宇宙)는 ‘대칭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 《월드코리안》 참고
3층 허준기념실을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왁자지껄 십여 명의 학생들이 박물관 해설가 선생님을 따라 들어온다. 현장체험 학습을 나온 방화동 방화중학교 학생들이다. 오늘은 1학기 기말고사 기간인데 1학년은 자유학기제라 시험을 보지 않고 현장체험학습을 나왔다고 한다. 역사·문화·생태 체험학습은 올바른 가치관 형성, 학습능력 향상에 큰 도움을 주며, 생태감수성을 키우고 자연친화적 가치관 형성을 함양시키는 계기가 된다.
중·고등학교 재직 시절 학생들과 함께 ‘과학 캠프’를 갔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무주구천동 덕유산 탐방, DMZ 생태마을 탐방, 가평 청평 조종천, 청평 중부내수면연구소, 부안 변산 채석강, 양주 장흥 송암스페이스센터, 자연과 별 가평천문대. 젊은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들.
기획전시실에서는 허준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의 공동기획 특별전 ‘전염병의 어제와 오늘’ (2022.3.22~10.02)이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전염병의 역사와 이를 극복하려했던 선조들의 노력, 지혜를 살펴보고 전염병 경각심을 높여 방역의 중요성을 알리겠다는 취지로 열리고 있다. 전염병 관련 의서와 기록들, 전염병을 치료하는 의약기들, 전염병과 약초, 전염병 극복을 위한 노력들로 구성되어 있다. 현대의 코로나19와 비슷한 두창, 홍역, 콜레라, 온역 등 역병을 극복하기 위한 선조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이번 특별전을 위해 국립민속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 서울 약령시 한의약박물관, 연세대 의대 동은의학박물관, 계명대 대구 동산병원 등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옛 의약기를 대여했다고 한다.
허준 선생은 전염병에 전염되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도 기술했는데, 이는 오늘날 개인 방역 핵심 수칙 ‘생활 속 거리두기’와 유사한 것이라고 한다. 특별전에는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방역도구와 의료진을 위한 응원편지 및 격려 엽서 등이 함께 전시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당신들의 피와 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마스크를 쓰고 생활한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한 현대에도 다양한 전염병으로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는다. 특별전 ‘전염병의 어제와 오늘’을 둘러보며 과거 두창(천연두), 온역, 당독역(홍역), 콜레라 등 전염병을 극복하기 위한 옛사람들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박물관 홍보물에 적힌 글을 그대로 옮겨 본다. 두창(천연두)은 오랜 기간 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고질적인 전염병이었다. 두창에 걸리면 얼굴에 딱지가 앉고 병을 앓은 흔적인 얼굴 상처 마마 자국을 남긴다. 특별전에는 두창을 극복하려는 선조들의 노력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지석영이 종두법(소에게 배양시킨 천연두 백신을 사람에게 접종하는 예방법)을 도입한 이후 두창이 점차 사라졌고, 이때부터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예방접종이 시작됐다. 민간에서는 굿을 하고 짚으로 만든 짚말을 불태우면서 두창신(마마)을 막고자 했다. 또한 콜레라를 옮기는 쥐를 물리치기 위해 고양이 그림을 부적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허준박물관은 약 2,500점의 한의학 관련 유물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허준 선생의 저서들과 다양한 의약학 자료를 모형, 영상, 터치스크린 등을 통해 만날 수 있다. 그런데 허준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많다고 한다. 드라마를 통해 허준 선생의 스승으로 알고 있는 ‘류의태’는 가공의 인물이며, 실제 스승은 ‘양예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또한 허준이 스승의 시체를 해부한 적도 없고, 의과시험에 급제해 내의원에 들어갔다고 알려져 있지만 다른 학자에 의해 천거됐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질병을 치료하고자 한다면 먼저 그 마음을 치료해야 할 것이니 반드시 그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한다.” 구암 허준 선생의 질병 치료에 관한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이 말이 내 마음에 와닿는다.
허준박물관 전시장을 둘러보고 약초원으로 가기 위해 옥상정원으로 올라갔다. 비도 그치고 더위도 주춤하다. 옥상정원 조망명소에서 바라보는 한강변 풍경이 일품인데 오늘은 아쉽게도 날이 흐려서 멋진 풍광을 볼 수 없다. 약초원에는 갖가지 약초들이 심어져 있다. 약초원에서는 범부채, 꿩의비름, 반하, 미역취, 산삼, 마, 석잠풀, 짚신나물, 익모초, 으아리, 꿩의다리, 개똥쑥이 자라고 있다. 박물관은 허준의 약식동원(藥食同源) 정신을 기리기 위해 박물관 옥상과 바로 옆 탑산 정상 에 120여 종의 약초를 재배하고 있다고 한다.
약용 식물 이름을 하나씩 불러주며 그저 길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이 든다. 잠시 탑산 정상에 있는 정자 구암정에 앉아 한강의 주변 풍경을 감상해 본다. 구암정은 ‘서울에서 가장 전망 좋은 장소’로 선정된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오늘은 오락가락하는 장맛비로 시야가 흐려 주변 풍광이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몽환적 분위기가 더 매력적일 수도 있겠다.
약초원 구암정에서 잠깐 쉰 후 박물관 후문으로 나와서 공암바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암바위는 흔히 허가바위라고 하는데 허준 선생이 동의보감 집필을 마무리한 곳이라고 한다. 또한 공암바위는 양천 허씨의 시조인 허선문이 출생한 곳이라는 설화가 깃든 바위동굴이다. 바위에 어른 이십명 정도가 기거할 수 있는 동굴이 뚫려 있어 예로부터 ‘공암’(孔巖)이라 불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가깝게는 6·25전쟁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피난처로 사용했다고 한다. 영등포공고 정문 앞에는 행주나루 구암나루 표지석과 투금탄 이야기 안내판 세워져 있다.
허가바위를 둘러보고 바로 옆에 위치한 허준근린공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허준근린공원은 구암근린공원이라고도 불린다. 구암(龜巖)은 《동의보감》을 편찬한 조선시대의 명의인 양평군(陽平君) 허준의 아호다. 《동의보감》은 세계 의학 서적 중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동의보감》은 임진왜란 중인 1596년 허준이 선조의 명으로 의관들과 함께 우리나라와 중국의 의서를 모아 엮어 집필한 책이다. 선조가 승하한 이후 자신의 유배지이자 출생지이기도 했던 양천현의 허가바위에서 혼자 정진해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동의보감을 완성했다.
허준근린공원에는 구암 허준 선생이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허준 선생은 인자한 표정으로 왼손으로는 환자의 맥을 짚고, 오른손으로는 이마의 열을 재고 있다. 동상 옆 표지석에는 “옛날 뛰어난 의원은 사람의 마음을 잘 다스려서 미리 병이 나지 않도록 했다. 지금의 의원은 사람의 병만 치료하고 마음은 다스릴 줄 모른다. 이것은 근본을 버리고 끝을 좇으며 원천을 캐지 않고 지류만 찾는 것이니 병이 낫기를 구하는 것이 어리석지 않은가?”라는 동의보감 구절을 새겨놓았다. 귀감이 되는 명언이 아닐 수 없다.
허준 선생의 동상 아래쪽에 노리터(老利攄)라는 푯말이 붙어있다. 노리터는 신조어로 어르신들을 위한 쉼터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노리터에는 노인 몇이 앉아 있고, 연못 옆 소요정(逍遙亭)에는 이웃 주민들이 둘러앉아 정담을 나눈다. 커다란 광주바위가 자리하고 있는 연못 풍광은 언제 보아도 참 아름답다.
집으로 가는 길, 허준박물관과 가양역 사이의 길은 허준테마거리다. 안내판에는 허준 선생이 광해군의 두창을 낫게 하여 선조로부터 실력을 인정 받았다는 글이 적혀 있다. 길을 따라 걸으니 허준 선생의 동상과 동의보감 조형물이 보이고, 줄지어 서있는 형형색색의 허준 캐릭터가 보인다. “배는 8할만 채워라.” “머리는 차게 발은 따뜻하게.” 캐릭터에 적혀있는 동의보감 속 글귀를 하나둘 읽다 보니 어느새 가양역이 눈앞에 나타난다.
큰 손주가 가양역 허준테마거리 길건너에 있는 유석초등학교에 다닌다. 매일 오후,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손주를 데리러 학교에 간다. 오늘 허준의 발자취를 찾아다니느라 손주 데리러 유석초에 가는 것을 깜빡하고 집으로 와 버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에서 느긋하게 쉬고 있는데 손주한테서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 어디세요?” 아차! 부리나케 전철을 타고 다시 가양역으로 향했다. 집으로 오지 않고 가양역 허준테마거리에서 길만 건너면 됐었는데. 테니스 벽치기로 시작한 오늘 하루는 구암 허준 선생이 내 정신을 온통 빼앗아간 날이었다. 따뜻한 인간미를 지닌 대학자 허준 선생의 숨결을 느낀 보람된 탐방이었다.
글·사진=김영택 / 사진 촬영 2022.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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