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죽음[이은화의 미술시간]〈190〉 (daum.net)
죽음만큼 확실한 것이 있을까. 이유와 시기가 다를 뿐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 그렇다고 모든 죽음에 애도가 따르는 건 아니다. 19세기 영국 화가 브리턴 리비에르가 그린 이 그림 속엔 죽은 자만 있고 애도하는 자는 없다. 개 한 마리만 있을 뿐이다. 왜일까?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했던 리비에르는 17세 때부터 런던 왕립미술원에서 전시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다. 그는 신화나 역사 그림에도 능했지만 동물 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특히 사람 같은 표정을 가진 개 그림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가 48세 때 그린 이 그림 속엔 중세 갑옷을 입은 남자가 푸른 천이 깔린 침대에 누워 있다. 가슴 위에 화환이 놓인 걸로 보아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침대 앞을 지키는 개는 애도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이 개는 블러드하운드로 유럽 왕실과 수도원에서 많이 기르던 귀족적 혈통의 사냥개다. 제목인 ‘레퀴에스카트(Requiescat)’는 ‘안식’을 뜻하는 라틴어로,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지금 이 개는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유일한 상주인 것이다. 이 그림은 완성된 바로 그해 왕립미술원에 전시돼 엄청난 찬사를 받았다. 기사도 정신과 충견의 헌신은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좋아하는 주제였기 때문이다. 인기를 증명하듯, 이듬해에 화가는 이 그림의 복제화를 두 점이나 더 그렸다.
기사도는 중세 유럽에서 성립된 이상적인 행동 규범이다. 기사가 지켜야 할 주요 덕목은 용맹, 충실, 명예, 관용, 예의, 약자 보호 등이었다. 한데 중세 봉건사회가 그렇게 이상적인 사회였을 리가 없다. 무기와 갑옷 등을 독점한 기사들은 오히려 기사도에 정면 배치되는 부도덕하고 폭력적인 행위를 일삼기 일쑤였다. 그림 속 기사도 그리 기사답지는 못했던 듯하다. 가족, 동료, 이웃 등 아무도 애도하는 이가 없으니 말이다. 다만 충견만이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주고 있을 뿐.
이은화 미술평론가ㅣ동아일보 2021.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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