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詩가 있는 아침] 심장의 유배 - 마흔이레/김혜순 (daum.net)
심장의 유배 - 마흔이레 / 김혜순
누가 네 몸속에서 물을 길어 올리나
누가 네 몸속에서 섹스를 하고 있나
창밖에서 남자와 여자의 구두가
후두둑후두둑 떨어진다
(넌 알고 있었니?
우리가 흐느끼는 소리로 뭉쳐진 존재라는 걸)
누가 네 속에서 풍금을 치나
누가 네 속의 진흙 속에서 푸들거리나
누가 네 속의 몇 개의 지층 아래서 벌떡벌떡 물을 토하나
(몇 세기의 지붕을 소리 없이 걸어가던 여자가
임신한 배를 껴안고
잠시 쉬는 테라스
눈물로 만든 렌즈들이 유리창을 쓰다듬고 있네)
누군가를 잃고 흐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몸속에서 고통이 물을 긷고 풍금을 치고, 섹스처럼 강렬하게 진흙 바닥을 헤집습니다. 창밖으로 지난 사랑의 행적이 벗겨진 구두처럼 소용없이 떨어질 때, 몇 세기 동안 숨죽이며 우리 머리 위를 걷고 있는 것은 운명이겠지요. 그가 잉태한 슬픔은 아마도 영원히 유전될 것입니다. 인생이 정녕 죽음과 죽음 사이에 잘못 버려진 상자 같은 것이라고 해도, 그 속이 마냥 텅 비어 있기만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가까운 이의 부고를 받았습니다. 그 짧은 전갈이 이승과 저승을 바꿔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신용목 시인ㅣ서울신문 2016.12.17
/ 2022.06.15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