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하 시인은 과거 내가 책을 낼 때 모출판사의 편집주간으로 종종 얼굴을 뵙곤 했었다. 최근 무려 22년 만에 낸 시집 《악의 평범성》을 읽다 옛 생각에 젖는다. 내 기억이 맞는지 모르지만, 시의 현장에 나도 있었던 듯. “40대 중반 서교동 골목길의 교통사고와 50대 초반 합정동 골목길의 백색테러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반품된 후 모든 게 허망해지고 오랫동안 애써 부정하고 망각했던 고문의 악몽마저 되살아나 날마다 피가 하늘로 올라간다.”(버킷리스트) 우리는 흘린 피를 닦아주면서 길을 걸었고 또 집으로 돌아들 간다. 시인이 애써 살아온 세월의 모든 굴곡들이 글로 쏟아져 내리는 건 그나마 씻김과 해원의 은총이겠다.
가수 하덕규씨와 기타리스트 함춘호씨가 함께한 ‘시인과 촌장’에서 시인은 글쟁이 시인이 아니라 시민을 가리키는 시인(市人)이란다. 시민의 다난하고 가련한 일상은 하루하루 시가 되었다가 모래톱처럼 사라져간다. 과하게 뽐내려는 글은 병든 가슴의 환각일지도 몰라. 여러 겹 줄을 타고 승승장구한 자들이 떵떵거리는 세상에서 우리 시인들은 울울하고 왜소해졌다.
시집 코너 근처엔 공교롭게도 정치인으로 변신한 전 공안검사가 자서전을 펴내 쌓아두고 있었다. “담당변호사가 급히 교도소로 달려와 말을 더듬거리며 ‘다, 당신, 주, 죽으려고 환장했느냐. 지금 검찰과 법원까지 발칵 뒤집혀 황교안 공안검사가 이자는 손목을 잘라 평생 콩밥을 먹이겠다고 난리’라며 잔뜩 흥분해 소리쳤다.”(항소이유서) 인파가 정치경제서 쪽에 몰려들 있었다. 시집 코너엔 인기척도 없을까 봐 나는 발길을 떼지 못하고 한참 서 있었다. 시인이 살기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혹독한 세상이렷다. 매캐한 지하에서 메슥거리는 속을 간신히 재우고 빠져나온 서점 바깥은 도심 복판, 빌딩숲 사이로 도글도글 이른 별들이 떠있었다. 뒷산의 별들만큼 밝지는 않지만, 부디 도시의 시인들에게도 따습게 비추려무나.
임의진 목사·시인ㅣ경향신문 202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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