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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민령의 뇌과학이야기] 변화무쌍한 '여백'

푸레택 2022. 6. 1. 15:36

[송민령의 뇌과학이야기]변화무쌍한 '여백' (daum.net)

 

[송민령의 뇌과학이야기]변화무쌍한 '여백'

[경향신문] 많은 사람이 조연보다는 주연에, 다수의 평범한 사람보다는 스타와 지도자에 주목한다. 그래서인지 중·고등학교 시절에 ‘동양화에는 여백의 미가 있다’고 배울 때 납득이 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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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조연보다는 주연에, 다수의 평범한 사람보다는 스타와 지도자에 주목한다. 그래서인지 중·고등학교 시절에 ‘동양화에는 여백의 미가 있다’고 배울 때 납득이 되지 않았다. 여백은 산이든 집이든 그림의 핵심 소재를 그리고 남는 공간으로 보였을 뿐, 여백에서 아름다움까지 느끼기는 어려웠다.

‘여백의 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은 책으로만 보던 동양화를 실제로 봤을 때였다. 조그만 삽화가 아닌 실제 크기로 보니 화가가 무엇을 그리지 않고 여백으로 남겼을지 상상하게 됐는데, 상상의 내용이 그때그때 달랐기 때문이다. 예컨대, ‘협롱채춘(나물 바구니를 옆에 끼고 봄을 캐다)’이라는 제목의 그림에서 여인이 보고 있는 것은 봄이 피어오르는 먼 산일까, 연두빛이 일렁이는 들판일까? 김홍도의 ‘마상청앵도(말을 타고 꾀꼬리 소리를 듣다)’에서 말 탄 선비의 뒤편은 수양버들 드리운 개울이었을까, 나룻배가 떠다니는 한강처럼 큰 강이었을까?

여백은 그리고 남는 공간이 아니었다. 잘 안배된 여백은 끊임없는 상상을 불러일으켰고, 하나의 그림을 온갖 그림으로 만들었다. 무엇을 상상하느냐에 따라 그림 전체의 이미지를 바꾸는 가능성을 가진 공간, 변화무쌍한 공간이 여백이었다.

◆ 주목받지 못한 여백

내가 여백의 아름다움을 오랫동안 인식하지 못했듯,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 연구에서도 여백이 주목받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은 신경세포 주변의 혈류량 변화를 통해서 신경세포의 활동을 간접적으로 측정하는 기술이다. 신경세포가 전기적인 활동을 일으키면, 에너지와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신경세포 주변의 혈류량이 늘어난다. 그 결과 주변 혈액의 자기적인 성질이 달라지는데,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은 강한 자기장을 활용해서 이 변화의 크기를 측정한다.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을 활용한 초기 연구에서는 특정한 작업을 하는 동안의 뇌 활동에서 가만히 있는 동안의 뇌 활동을 빼는 방식으로 해당 작업에 관련된 뇌 부위를 추론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의 뇌 활동을 연구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가만히 있는 동안의 뇌 활동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없이 까만 화면과 예술 작품 사진을 몇 초씩 번갈아 보여준다. 그리고 예술 작품을 보는 동안의 뇌 활동에서 까만 화면을 보는 동안의 뇌 활동을 빼는 방식으로, 예술 작품 감상에 관련된 뇌 부위들을 찾아냈다. 이런 실험 구조의 이면에는 가만히 있는 동안의 뇌(까만 화면을 보는 동안의 뇌)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기준선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즉, 쉬는 동안의 뇌 상태는 별다른 내용이 없는 여백에 가깝고, 뭔가를 하는 동안의 뇌 상태는 그려진 대상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다.

◆ 쉬는 동안의 뇌 활동

그런데 과학자들이 연구를 하다 보니, 뇌에는 열심히 뭔가를 하는 동안 활성화되는 부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억제되는 부위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앙전전두엽, 측두엽-두정엽 연접부위, 측두엽의 일부 영역들은 뭔가를 하고 있을 때, 가만히 있을 때보다 활동량이 줄어들었다. 자연스레 의문이 제기되었다. 가만히 있는 동안의 뇌 활동은 정말로 별 볼 일 없는 여백일까? 가만히 있는 동안의 뇌 활동에 뭔가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쉬는 동안의 뇌 활동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기 시작했다. 연구 결과, 뇌는 쉬는 동안에도 열심히 뭔가를 생각하는 동안에 소모되는 에너지의 90%가량을 소모하면서 활발히 활동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쉬는 동안에 더 활성화되는 뇌 부위들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생각, 과거 경험에 대한 기억과 상상, 도덕성에 관련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 부위들의 연합은 기본 상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라고 불리며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가만히 있는 동안의 뇌 활동은 최근의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뇌는 신경세포들의 거대한 네트워크이므로, 뇌를 이해하려면 네트워크의 어떤 부위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살펴야 한다. 가만히 있는 동안의 뇌 활동은, 실험을 설계할 필요 없이 가만히 쉬는 동안의 뇌 활동을 측정하기만 하면 되므로, 뇌 부위들 간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데 필요한 데이터를 얻기가 쉽다. 미국에서는 사람 뇌의 네트워크를 조사하기 위한 큰 프로젝트(휴먼 커넥톰 프로젝트)가 진행된 바 있는데, 가만히 있는 동안의 뇌 활동은 이 프로젝트에서 핵심적인 부분 중 하나였다. 뇌 활동의 여백에 주목하면서 뇌 연구가 크게 진척된 셈이다.

◆ 이름 없는 이들의 7시간

2014년 4월16일 대통령의 7시간에 대한 어이없는 진실이 밝혀지면서, 이름 없는 많은 이들의 7시간을 돌아보게 되었다. 2014년 4월16일 그때 그 7시간, 그리고 내가 몰랐던 무수한 7시간 동안 충실하게 자기 자리를 지킨 사람이 많았으리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게 나라냐’ 싶던 시절에도 그런 이들이 있어서 나라가 어떻게든 굴러갔고, 그렇다고 자기 자리‘만’ 지키지도 않았던 이들 덕분에 ‘이게 나라냐’ 싶던 시절을 벗어날 수 있었다. 정해진 시간에 당연하다는 듯이 버스가 오고 가게 문이 열리는 것이, 절대로 쉽지 않고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홍도의 그림 속 여백처럼 이름 없는 무수한 이들에게 전체를 바꾸는 가능성과 변화무쌍한 힘이 담겨있었다. 기능성 자기공명영상 연구가 뇌 활동의 여백에 주목하면서 발전했듯이, 이름 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이들에게 향하는 관심이 세상을 더 좋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ㅣ경향신문 2018.04.02

/ 2022.06.01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