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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칼럼] 예술이 전쟁을 바꿀 수 있을까

푸레택 2022. 5. 18. 11:21

[문정희 칼럼] 예술이 전쟁을 바꿀 수 있을까 (daum.net)

 

[문정희 칼럼] 예술이 전쟁을 바꿀 수 있을까

문정희 | 시인 이 봄날 전염병에 쫓기는 것도 기막힌데 지구 위에 전쟁이 일어났다. 러시아 군대의 무력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피난을 떠나고 있다. 다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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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칼럼] 예술이 전쟁을 바꿀 수 있을까 / 문정희 시인

이 봄날 전염병에 쫓기는 것도 기막힌데 지구 위에 전쟁이 일어났다. 러시아 군대의 무력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 피난을 떠나고 있다. 다른 나라로 떠나는 기차에 매달려 우는 할머니와 어린아이의 모습을 뉴스를 통해 보고 있다.

정말 잔인한 봄이다. 생명이 죽어가고 무참하게 짓밟히는 것을 구경하다니… 어느 신이 이것을 용납할 수 있으랴. 사방에 꽃은 덧없이 피어나는데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은 봄이다. 일찍이 시인 영랑이 노래한 “찬란한 슬픔의 봄”은 어떤 봄일까. 진정한 봄은 언제 올 것인가.

예술이 전쟁을 바꿀 수 있을까. 시는 써서 뭐 하나. 우크라이나 오데사국립대학으로부터 시낭송 초청을 받은 것은 지지난해였다. 유명한 베를린 국제 문학 축제에 이어 바로 우크라이나 오데사로 가는 일정이 추가되었다. 오데사대학의 요청에 따라 한국어로 된 나의 시집 몇권과 영어와 독일어, 러시아어 등으로 번역된 시집을 서둘러 그곳으로 보냈다. 그렇게 시작된 우크라이나 문학 코디네이터와의 교류는 긴밀하고 즐겁기만 했다.

수도인 키이우도 그렇지만 예술의 도시 오데사는 시인을 진실로 사랑하는 도시인 것 같았다. 푸시킨이 살았던 아름다운 거리에 세워진 그의 동상을 사진으로 보며 나는 우크라이나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어떻게 하면 한국 시를 제대로 들려줄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또한 한국인의 삶과 역사에 대해서도 특강이나 번역 워크숍을 통해 잘 설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우크라이나 민족시인 타라스 셰프첸코(1814~1861)의 이름을 딴 셰프첸코국립대학에도 한국어과와 한국어문학센터가 있다고 했다. 1991년 소련 붕괴 뒤 새로 독립되었지만 오랜 전통과 언어를 지닌 우크라이나 문학은 파고들수록 슬프고 장엄했다. 게다가 그 유명한 포템킨(오데사) 계단을 비롯하여 아직도 비극의 그림자가 가시지 않은 체르노빌 원전을 둘러보면 나의 시적 안목과 촉수가 더없이 깊고 날카로워질 것 같았다.

우크라이나 출신 여성 작가로 201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소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읽었다. 제목이 말해주듯이 여러 형태로 전쟁을 겪은 여성 200여명의 목소리를 통하여 전쟁이 남긴 상처와 굴곡진 인간사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우크라이나 출신이지만 루마니아에 살고 있는 여성 작가 헤르타 뮐러의 고통스러운 가족사도 주목되었다. 나치의 군인으로 러시아에 간 뒤 그 죄로 인해 우크라이나 감옥에 오래 갇혔던 아버지를 둔 그녀의 출신 배경은 가해 의식과 피해 의식 사이의 혼란을 깔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현대시인 50인 시선집 《우크라이나의 젊은 여신들》을 쓴 최승진 교수의 해설을 보면 우크라이나의 현대시는 한국의 현대시처럼 때로 예술적이다가 경우에 따라 민족과 신념의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매우 흡사했다. 반체제 저항시를 지나 전환기 포스트모던 현상을 띤 시편들이 나타나는 지점도 주목되었다.

“신은 나를 버렸다.

나는 가는 방법을 모른다. 그저 뒤에도 안개, 앞에도 안개
아마도 그래서 인류가 이슬로 변했나 보다.
아마 전 세계가 회색 이슬로 응축되었나 보다.
(…)
내가 어떻게 할수 있을까? 아무 것도 아무 곳도
어떻게 내가 여기에 있지 않음을 확신할 수 있을까?
모든 주변에 무언의 슬픔이 있다
신은 나를 버렸다”
(외로움의 찬송가 부분인용, 빅토르 코르둔, 최승진 번역)

우크라이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면 할수록 더욱더 오데사대학의 초대는 가슴을 설레게 했다.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 한국인의 정서에 바로 와닿는 남다른 울림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10개월을 준비한 우크라이나 축제는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코로나가 더욱 번성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의 나무와 꽃이 흔들리는 풍경과 책장 앞에 앉아 원고를 쓰는 모습을 뒷배경으로 시낭송 필름을 준비했다. 그것을 오데사에 보냈고 오데사 학생들과 시민들은 그 필름을 보며 한국 시를 즐기는 모습을 보내왔다. 표현할 수 없는 또 다른 공감이 오고 갔다.

그러는 동안 나의 귀에는 시종 우크라이나의 민요와 예술성 높은 연주들이 흘렀다. 러시아 군대에 쫓겨가는 유태인 가족의 슬픈 유랑 행렬을 그린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멜로디가 맴돌았다.

며칠 전 한밤중에 이메일 하나가 나의 잠을 설치게 했다. “NO WAR”(노 워). 독일 베를린의 국제 문학조직위원회로부터 온 것이었다. 숨 쉴 사이도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서명을 했고 곧바로 베를린으로 보냈다. 세계의 작가들이 일제히 내지른 비명 같은 이 서명은 세계의 중요한 곳곳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솔제니친은 침묵으로 일관한 진실은 거짓이라고 했다. 물방울 하나만한 힘이지만 그래도 무참하게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최신호가 커버스토리로 내보낸 사진작가 지에르(JR)의 퍼포먼스 《우크라이나의 회복력》(The resilience of Ukraine)은 정말 뭉클했다. 45m 대형 천에 둘둘 말린 헝겊을 펴자 우크라이나 다섯살 소녀 발레리아가 사진 속에서 실물처럼 생생하고 사랑스러운 미소로 피어나는 퍼포먼스다.

예술이 전쟁을 바꿀 수 있을까? 프랑스 사진작가 지에르는 누벨바그의 거장인 여성 감독 아녜스 바르다와 함께한 다큐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로 관심 있는 사람들에겐 상당히 낯익은 예술가다. 파리에 사는 그는 국경을 넘어 키이우의 오페라하우스 앞 광장에 도착하여 시민 100여명의 도움을 받아 게릴라 퍼포먼스를 벌인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가 눈부시게 펼쳐진 듯 발레리아의 환한 미소가 전쟁터에서 펼쳐진 것이다.

시를 쓰는 일이 한없이 무력하고 외로운 일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지만 그래도 시를 쓰리라는 생각이 더욱 강열해지는 봄이다.

“나 죽거든 부디 그리운 우크라이나 넓은 벌판에 나를 묻어주오.” 지금 우크라이나 젊은이들은 160여년 전에 죽은 민족시인 셰프첸코의 “유언”을 읊으며 온몸으로 일어나 전쟁을 막아서고 있다. 어느 힘이 이와 같으랴.

지구 위에 진정한 봄이 오면 나는 오데사에 가리라. 거기 시를 사랑하고 평화를 지킨 사람들을 만나 뜨거이 껴안고 시낭송 축제를 벌이리라. 지금 이 순간에도 땅 밑 깊은 곳에서는 물이 흐르고 나뭇잎 위에서 이슬은 떨어져 푸른 바다로 흘러가고 있다.

문정희 시인ㅣ한겨레 2022.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