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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의 미니픽션] (31)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

푸레택 2022. 5. 8. 16:02

[이기호의 미니픽션]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 (daum.net)

 

[이기호의 미니픽션]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

[경향신문] 진만과 정용이 사는 원룸촌에서 십 분쯤 골목길을 내려가면 그제야 큰 도로가 나오는데, 한 달 전쯤 그곳 버스정류장 앞 상가에 새로 ‘아이스크림 할인점’이라는 곳이 생겼다.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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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의 미니픽션]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 /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진만과 정용이 사는 원룸촌에서 십 분쯤 골목길을 내려가면 그제야 큰 도로가 나오는데, 한 달 전쯤 그곳 버스정류장 앞 상가에 새로 ‘아이스크림 할인점’이라는 곳이 생겼다. 편의점에서 1000원, 2000원 하는 아이스크림을 400원, 800원으로 50% 넘게 할인해 주는 집이었다. 24시간 영업을 했으며, 밤 10시부터 다음날 오전 10시까지는 알바도, 주인도 없는 무인점포로 운영되었다. 그 시간엔 손님이 직접 자신이 고른 아이스크림을 점포 한쪽에 놓인 셀프계산대로 들고 가, 바코드에 찍고 카드를 긁어야 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점포의 규모에 비해 폐쇄회로(CC)TV가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셀프계산대 앞에는 사람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모션 CCTV’까지 작동되고 있었다.

진만은 말하자면 ‘메가톤바’ 마니아였는데, 날씨가 후텁지근해지는 6월부터 9월까지 거의 ‘1일 1메카톤바’를 실천하곤 했다. 아이스크림이지만, 꾸덕꾸덕하고 쫄깃한 식감까지 나는 그 아이스크림을 진만은 사랑했다. 참고로 그는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의 종류에 따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늠하는 버릇까지 있었다. 예를 들자면 ‘메로나’나 ‘서주아이스주’를 좋아하는 사람은 담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돼지바’를 선호하는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른 사람으로, ‘죠스바’를 고르는 사람은 가장 경계해야 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메가톤바’를 택하는 사람은 당연히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도대체 그건 무슨 근거냐고, 정용이 묻자 진만은 이렇게 대답했다. “더운데 자꾸 따지지 좀 마.”

진만은 보름 전부터 새로 설거지 알바를 시작했다. 대형 프랜차이즈 삼계탕집에서 오후 4시부터 밤 10시까지 근무하는 알바였는데, 일당이 9만원으로 다른 곳에 비해서 꽤 괜찮았다. 설거지야 뭐 다른 기술이 필요한 게 아니니까, 하는 마음으로 덜컥 시작했는데, 첫날부터 그는 아, 이곳이 과연 주방인가, 벽돌공장인가, 그도 아니면 그냥 개미지옥인가, 아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 노력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잠시도 쉴 틈 없이 검은 벽돌 같은 뚝배기들이 눈앞으로 밀려들어 왔기 때문이다. 아무 기술 없이 하는 것은 맞았지만, 대신 허리가, 팔뚝이, 끊어질 듯 당겨왔다. 얼굴에선 연신 마치 얼음을 가득 담아놓은 컵처럼 저절로 땀이 흘러내렸다. 홀에서 나온 그릇들을 1차 초벌 설거지한 후 식기세척기에 넣고, 다시 꺼내 재차 헹군 뒤 정리하는 것이 일의 순서였다. 진만은 천안 출신의 한 50대 아주머니와 2인 1조로 일했는데, 첫날부터 손발이 잘 안 맞았다. 진만이 초벌 설거지를 하고 식기세척기에 넣는 일까지 하면 그 나머지가 아주머니의 몫이었다. 하지만 아주머니의 속도가 자꾸 떨어졌다. 뚝배기를 바로바로 홀로 내보내야 하는데 지체가 생기니, 지배인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어쩔 수 없이 진만이 아주머니의 일까지 도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주머니, 왜 이런 일을 하세요? 아무리 일당이 좋아도 그렇죠, 이러다가 아주머니 쓰러져요…. 진만은 그 말을 하고 싶었으나, 차마 꺼낼 순 없었다. 아주머니가 이마에 땀까지 뻘뻘 흘려가며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다. 사실 말할 기분도, 여유도 없었다. 복날 시즌이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도 그런 상태는 더 나아지지 않았다. 진만은 더 예민해져 갔고, 아주머니 때문에 자신이 무언가 큰 손해를 보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주머니 대신 식기세척기에서 뚝배기를 꺼낼 때도 그랬고, 시간 내 마무리를 하지 못해 퇴근 시간이 일이십 분 늦어질 때도 그랬다. 진만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쓴 채 아주머니를 바라볼 때도 많았다. 내가 왜? 내가 왜 이 아주머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지? 몸도 힘들어 죽겠는데…. 진만은 더 뾰족해져갔다.

사흘 전, 함께 퇴근하던 아주머니는 굳이 마다하는 진만을 데리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만에게 이온음료 하나를 건네주면서 말했다. “아주머니 때문에 많이 힘들지? 미안해. 파스도 이렇게 많이 붙였는데, 아직 일이 손에 안 붙네.”

아주머니는 그러면서 군대에 가 있는 자신의 아들 이야기를 했다. 진만을 보니까 꼭 아들과 함께 일하는 것 같다고, 든든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진만은 아주머니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아주머니, 왜 아들 같은 사람을 이렇게 고생시키냐고요? 진만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더불어 자신이 이틀 전, 홀 지배인을 따로 만나 아주머니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을 떠올렸다. 아주머니가 일이 많이 벅차 보여요… 저러다가 무슨 사고라도 날까 봐… 홀 서빙이 차라리 나을 텐데… 진만은 홀 지배인에게 먼저 그렇게 말을 꺼냈다.

바로 어제부터 진만은 자신보다 네 살 어린 남자 대학생과 2인 1조로 일하기 시작했다. 휴학 중이라는 그 친구는 키는 좀 작았지만, 전반적으로 몸이 탄탄해 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일처리도 빨랐다. 한꺼번에 뚝배기 열 개를 번쩍번쩍 들어 나르기도 했다. 이거 근육 좀 붙겠는걸요. 그 친구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여유까지 보였다. 진만은 설거지하는 도중 힐끔힐끔 홀을 쳐다보았다. 아주머니의 모습을 찾아보았지만, 그곳에서도 아주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진만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몸은 더 편해졌는데, 뭘. 진만은 자꾸 그 생각을 반복해서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진만은 ‘아이스크림 할인점’에 들러 ‘메가톤바’를 사 먹었다. 밤인데도 날이 무더워, 매장 안 의자에 앉아 천천히 ‘메가톤바’를 한 입 한 입 베어 물었다. 사람 한 명 없이 아이스크림만 잔뜩 쌓인 매장 안은 밝고 쾌적해 보였다. 사람이 없으니까, 무인이니까…. 진만은 그제야 이곳의 ‘메가톤바’가 왜 다른 곳보다 싼지 깨닫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지 않으면 가격은 내려가는 거구나…. 진만은 계속 ‘메가톤바’를 우물거리면서 생각했다. 근데, 그게 과연 좋은 건가? 진만은 거기에 대해선 쉽게 답을 내리지 못했다. ‘메가톤바’는 평상시보다 꾸덕꾸덕한 맛이 덜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ㅣ경향신문 2019.07.25

/ 2022.05.08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