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상담 사이 [이기호의 미니픽션] (daum.net)
[이기호의 미니픽션] 사랑과 상담 사이 /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1. 첫째 날 - 카톡
진만: 성희씨, 잘 들어가셨나요? 전 지금 들어왔어요. 오후 8:42
성희: 어머, 제가 너무 늦게 봤네요. 네, 저도 잘 들어왔어요. 고마워요. 전 빈말인 줄 알았는데, 진짜 이렇게 다시 연락을 주셨네요. 오후 10:12
진만: 아니에요! 늦긴요!! 전 또 무슨 일 있으신 줄 알고... 제가 더 고맙죠. 이렇게 답신도 해주시고... 전 정말 오늘 성희씨 만나고 와서 너무 좋았거든요. 진짜 무슨 인연을 만난 거 같고... 오후 10:13
성희: 저도요. 저도 아까 거리에서 처음 진만씨 봤을 때... 그때 퇴근하던 길이었죠? 오후 10:18
진만: 네, 알바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마을버스 기다리고 있을 때 성희씨가 말을 건 거예요. 오후 10:18
성희: 네, 제가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진만씨 처음 봤을 때 어떤 인연이라고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용기를 내 말을 건 거예요. 진만씨, 우리 계속 연락하면서 지내도 되는 거죠? 저는 진만씨를 또 만나고 싶은데... 오후 10:24
진만: 그럼요, 그럼요! 저도 꼭 그러고 싶습니다! 오후 10:24
성희: 그럼 우리 돌아오는 수요일 오늘 봤던 그 카페에서 또 볼까요? 오후 10:42
진만: 네, 네! 제가 거기 일찍 나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오후 10:42
2. 다섯째 날 - 카톡
진만: 성희씨, 접니다! 오후 10:11
성희: 네, 진만씨. 제가 또 늦게 봤네요. 핸폰이 진동이라서... 오후 10:32
진만: 아니에요. 오늘 나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전 성희씨가 안 나올까 봐 걱정했거든요. 제가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서... 쑥스럽지만 전 성희씨를 만나고 있는 시간이 정말 좋습니다! 오후 10:34
성희: 네, 저도 진만씨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진만씨, 아까 우리 카페에서 우연히 미자 언니 만났잖아요. 저도 그 언니를 한 6개월 만에 처음 만나는 거였는데, 그 언니가 진짜 실력 있는 상담사거든요. 아까 우리 심리 테스트 해준 것도 그게 정말 받기 어려운 거라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운이 좋은 거였죠. 진만씨랑 헤어지고 그 언니랑 같이 지하철 탔는데, 언니가 진만씨 굉장히 특별한 사람이라고, 기회가 되면 또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언니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흔치 않은데... 정말 진만씨가 대단한 사람인가 봐요. 미자 언니가 진만씨에게 연락드려도 되죠? 오후 10:57
진만: 그럼요! 성희씨 선배님인데. 제가 그럴 만한 사람은 아닐 텐데... 좀 얼떨떨하네요. 아무튼 좋게 봐주셨다니 감사하죠. 다음 주에 제가 성희씨와 선배님께 밥을 사도록 하겠습니다! 오후 10:59
3. 열하루째 날 - 카톡
미자: 진만씨, 김미자입니다. 오후 8:09
진만: 아, 네. 오후 8:12
미자: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진만씨는 영적으로 독특한 사람이에요. 굉장히 열려 있고, 또 한편 연약하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지금이 진만씨에게 위기의 시간일 수 있어요. 혹시 요즘 쉽게 지치거나 몸이 무겁지 않으신가요? 오후 8:14
진만: 네... 그거야 제가 상하차 작업도 해서 늘... 오후 8:16
미자: 그거 보세요. 그게 진만씨의 영이 흐려지고 자꾸 장애물이 생겨서 그런 거예요. 이럴 때일수록 누군가 진만씨의 영을 바로잡아주는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오후 8:18
진만: 근데, 성희씨는 정말 괜찮은가요? 오늘 나오지도 못하고 연락도 안 돼서 걱정이 되거든요. 감기가 맞는 거죠? 오후 8:20
미자: 네, 감기가 맞아요. 성희도 저한테 간곡히 부탁을 하더라고요. 진만씨를 제대로 설 수 있게 도와달라고요. 자기도 열심히 기도해 보겠다고 했고요. 오후 8:23
진만: 네, 고마운 말이네요. 오후 8:28
미자: 진만씨,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성희 통해서 바로 만날 날짜 잡을 테니까, 우리 꼭 얼굴 보고 얘기해요. 제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에요. 이게 진짜 진만씨만의 특이한 경우거든요. 오후 8:29
4. 열여섯째 날 - 카톡
진만: 네, 좋아요. 제사가 되었든 기도가 되었든 다 해드릴게요. 한데, 성희씨... 성희씨는 어떻게 된 거죠? 성희씨를 만나서 얘기를 듣고 난 후, 제가 말씀대로 다 해드릴게요. 오후 9:11
미자: 진만씨, 지금 성희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모르겠어요? 제가 계속 말씀드렸잖아요. 성희의 영과 진만씨의 영은 서로 상극이에요. 제례를 올려서 그 원흉을 없애야 서로 만날 수 있는 거라니까요! 성희도 제 말 듣고 일부러 진만씨 만나는 거 참고 있는 거예요. 이 뿌리부터 완벽하게 캐내야 하는 거예요. 지금 진만씨 마음 어지럽히는 것도 다 그 마지막 저항인 거죠. 힘들더라도 며칠만 더 참고 기도해 보세요. 오후 9:22
진만: 네... 오후 9:31
5. 스무하루째 날 - 카톡
진만: 성희씨... 오늘도 연락이 잘 안 되네요... 연락이 안 돼도 그냥 여기에 계속 말할게요. 사실 성희씨... 지금 제 마음이 많이 흔들려요. 같이 사는 친구는 그거 다 사기다, 멍청하게 속지 말라고 말하는데... 저는 계속 그 말을 믿지 않고 있어요. 그러면서 한편으론 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사기라도 좋고 속아도 좋다고요. 그래도 꼭 한번 다시 성희씨 만나서 카페에서 얼굴 보고 커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 처음 만났을 때처럼요... 저는 내일 미자씨 만나서 제례를 드리러 가요. 원래는 70만원인데, 특별히 성희씨 생각해서 50만원에 해주겠다고 하셨어요. 그거 드리면 그분 말처럼 마가 사라진다고 하니까, 그땐 성희씨를 볼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마가 사라지든 사라지지 않든, 제 마음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거든요. 성희씨가 이런 제 마음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게 전부예요. 기다릴게요. 오전 2:47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ㅣ경향신문 2019.02.07
/ 2022.05.05(목)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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