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의 미니픽션] 분노사회 /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정신적으로…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진만은 욕실 거울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건 뭐 너무 예민하잖아. 욕실문 밖에선 계속 달그락, 달그락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수저와 그릇이 서로 부딪치면서 내는 소리가 마치 알 굵은 우박이 슬레이트 지붕 위로 쏟아지는 것처럼 요란했다. 정용은 왜 저렇게 쉽게 화를 내는가? 저것도 병은 아닐까? 진만은 쉽게 욕실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정용은 원래 그런 친구가 아니었다. 말이 좀 없어서 그렇지, 요즘처럼 벌컥 화를 내거나 계속 미간을 웅크리고 다니는 친구는 아니었다. 정용이 편의점 알바를 하는 시간에, 진만은 종종 그곳 테이블에 앉아 폐기등록 된 삼각김밥을 얻어먹곤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 정용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는데, 그때도 정용은 뭐랄까, 마치 주유소 앞에 세워둔 막대풍선처럼 감정 없이 사람을 대하고 똑같은 표정으로 포스기를 찍는 알바생이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자정 무렵이었는데, 그때도 진만은 편의점 안 테이블에 앉아 휴대폰으로 그날 프로야구 하이라이트를 보고 있었다. 정용은 계산대 뒤에 서서 검수기를 꺼내 물건 수량을 확인하고, 빈 물품을 창고에서 꺼내오느라 잠시도 쉬지 않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손님들은 끊이지 않고 계속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중 오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정용에게 벌컥 화를 냈다.
“너도 나 무시하냐?”
정용은 남자의 얼굴을 1~2초 정도 말없이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니, 손님. 그게 아니구요. 비닐봉지도 따로 20원을 받게 되어 있어서요….”
“그러니까 너도 내가 20원짜리로 보이냐구?”
남자가 계산대 위에 올려놓은 물품은 소주 한 병이 전부였다. 진만은 앉은 채로 허리를 길게 빼 남자와 정용을 바라보았다. 정용은 잠깐 고개를 숙이고 서 있다가 이내 비닐봉지에 소주를 담았다. 네, 여기 있습니다, 손님. 정용은 인사말도 빼먹지 않았다.
“잘해, 새끼야. 너도 그러다가 20원짜리 되니까.”
남자는 끝까지 욕을 하고 나갔지만, 정용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음 손님을 받고 계속 물품 정리를 했다.
“화 안 나?”
손님이 뜸해졌을 때 진만이 정용에게 물었다.
“화나지….”
정용은 계산대 위에 빨대와 나무젓가락을 채우면서 말했다.
“비닐봉지 그냥 주다가 20원씩 받으라는 놈들한테 화가 나지. 걔네들은 20원을 서로 주고받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는 애들이거든. 책상에 앉아서 툭툭. 20원 내라고 하면 일회용품 사라질 거다, 툭툭.”
그랬던 정용이 변한 것이었다. 그제는 퇴근한 정용이 원룸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하다 말고 무언가를 세게 바닥에 집어던지기까지 했다. 방에 누워 있던 진만은 슬쩍 욕실 쪽으로 가 보았다.
“뭐야, 왜 그래?”
정용은 진만의 말에 아무 대답 없이 탈탈,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욕실 바닥에는 빈 로션통이 뚜껑과 분리된 채 나동그라져 있었다. 정용이 샀으나, 진만도 함께 쓴 로션. 며칠 전부터 뚜껑에 달린 펌프를 누르면 휘파람 소리만 나고 아무것도 나오지 않던 로션.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하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정용은 아무 말 없이 침대에 가 누웠다. 진만은 그런 정용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빈 로션통을 치웠다.
“저기….”
진만은 한참을 뒤척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방에 불이 꺼진 지 20여분이 지난 뒤였다. 정용은 침대에서, 진만은 바닥에 요를 깔고 누운 상태였다.
“요즘 나한테 뭐 화나는 일 있어?”
정용은 끙, 소리를 내며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로션 때문에 그래? 네가 사 놓은 걸 내가 막 써서? 그거 내가 인터넷에 주문했는데….”
“뭔 소리야? 잠이나 자. 나 피곤해….”
정용은 2주 전부터 편의점 알바 외에 따로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 시작했다. 숯불갈비집 설거지 아르바이트였다. 접시만 400개 넘게 닦는 아르바이트. 정용은 토요일, 일요일 밤 9시까지 근무하고, 바로 일요일 밤 10시부터 다시 편의점 알바를 시작했다.
진만은 정용이 계속 화를 풀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유튜브에서 무슨 심리학과 교수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화가 나면 그때그때 풀어야 한대. 그래야 마음의 병도 안 생기고 속병도 안 생긴대.”
진만은 아예 정용 쪽으로 돌아누워 말했지만, 정용은 반응이 없었다.
“남들한테 친절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병이 될 수 있고….”
진만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 정용이 휙 이불을 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용은 침대에 앉은 채 진만에게 말했다.
“야, 도대체 어떤 새끼가 그딴 소리 하니?”
진만은 정용의 말에 살짝 어깨를 웅크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새끼 교수 맞아? 네가 그 새끼 유튜브에 들어가서 댓글 좀 달아. 똑똑히 알고 지껄이라고.”
정용은 머리를 한 번 쓸어올리고 말을 이었다.
“너 왜 가난한 사람들이 화를 더 많이 내는 줄 알아? 왜 가난한 사람들이 울컥울컥 화내다가 사고 치는 줄 아냐구?”
진만은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정용의 말을 듣기만 했다.
“피곤해서 그런 거야, 몸이 피곤해서…. 몸이 피곤하면 그냥 화가 나는 거라구. 안 피곤한 놈들이나 책상에 앉아서 친절도 병이 된다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거라구!”
정용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진만은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정용은 지금 피곤하니까. 피곤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잠자는 것뿐이 없으니까. 진만은 말없이 눈을 감았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ㅣ경향신문 2018.10.18
/ 2022.05.05(목)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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