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의 미니픽션] 만남 이후 /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1. 답신
오해하지는 말고 끝까지 들어주셨으면 해요.
그쪽이 보내온 카톡을 보고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그래도 마냥 모른 척할 수만 없어서 이렇게 용기를 내 답문을 보내는 거예요. 솔직하게 이야기할게요.
사실 저는 오늘 소개팅을 나갈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어요. 제 처지에 지금 소개팅이라는 것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한 거죠. 미향이가 지난주부터 계속 자기 얼굴을 봐서 한 번만 나가달라고 부탁 문자를 보내왔는데, 그때마다 거절했어요. 미향이 얘가 날 앞으로 얼마나 보겠다고 이러는 걸까? 그런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아까 낮에 제가 교육행정직 공무원 시험 준비하고 있다고 했잖아요? 사실 그건 작년 여름까지만 맞는 말이었어요. 미향이도 거기까지만 알고 있었던 거죠. 저는 작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시험 문제집 한 번 펼쳐보지 않은 상태예요. 뭐, 포기 상태인 거죠. 그쪽도 공무원 준비한다니까 잘 아실 테죠. 시험 한두 번 보고 나면 스스로 답이 나오잖아요? 이건 마음잡고 몇 년만 노력하면 되겠다, 운만 좋으면 다음 시험에 붙을 수도 있겠다, 괜한 자신감이나 아쉬움 같은 것이 생기고…. 한데, 전 시험을 볼 때마다 더 주눅이 들더라고요. 내가 안되는 길을 억지로, 억지로, 가고 있구나, 불가능한 일들을 애써 모른 척하고 있구나…. 그런 마음을 꾹꾹 숨긴 채 삼 년을 더 붙잡고 있었는데…. 작년 여름엔 그냥 스르르, 언제 손에서 빠진지 알 수 없는 반지처럼, 어느 순간 놓고 말았어요. 그래 봤자, 저는 학원에서 공부한 것도 아니고, 혼자 자취방에서 인강으로만 준비한 거라서, 삶이 그리 달라지는 것도 없더라고요. 낮에는 변함없이 커피전문점에서 알바를 했고, 밤에도 계속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어요. 인강만 안 들었을 뿐, 계속 컴퓨터로 시시한 연예인 소식이나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앉아 있었죠. 그 생활을 일 년 가까이 한 거예요. 잠드는 시간도 예전 인강을 듣고 컴퓨터를 끄는 그 시간과 똑같이….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변했는지조차 알지 못한 상태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지 않으면 자꾸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렇게 지낸 거죠. 그러니, 제가 무슨 소개팅에 나갈 마음 같은 게 있었겠어요? 그건 그저 연예인들이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건네는 시답지 않은 농담 같은 말이었을 뿐이죠.
한데, 사흘 전에 문득 생각이 변했어요. 이건 좀 부끄러운 이야기이기도 한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다 말할게요. 그날 밤도 컴퓨터 앞에 앉아서 무슨 음식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는데… 계속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한두 시간 전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한데도 제가 의자에서 일어나질 못하더라고요. 제가 사는 곳은 원룸이어서 화장실까지는 불과 몇 걸음 되지도 않는데… 머리로는 분명 화장실을 가고, 손을 씻고, 다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사실 계속 가지 않은 채 요의를 참고 있었던 거죠. 그러다가 결국 속옷에 찔끔 지리기까지 했어요…. 그때야 문득 두려운 마음 같은 것이 들더라고요. 내가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러다가 충동적으로 미향이한테 문자를 보내 소개팅에 나가겠다고 한 거예요. 무언가라도 당장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저도 소개팅은 처음이고, 물론 그쪽도 처음이라고 하셨지만…. 그래도 만나자마자 짜장면을 먹으러 간 건 너무 하셨어요. 저는 그래도 가볍게 차를 한잔 마시고, 점심시간이었으니까 그런 다음에 파스타 같은 걸 먹으러 가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게 제가 들었던 소개팅의 기본 코스였거든요. 한데, 그쪽에서 근처에 기가 막힌 짜장면집이 있다고, 그쪽으로 가자고 했을 때부터, 조금 기분이 상했던 게 사실이에요. 거기다가 우리 그 집 앞에서 대기를 삼십 분이나 했잖아요? 소개팅을 나왔는데, 짜장면집 앞에서, 오늘 처음 만난 남자와 나란히 서서 삼십 분이나 기다린다는 게, 그게 저한테는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때부터 그쪽이 더 싫어진 것도 맞고요. 그러다 보니까 짜장면집에 들어가서도 그쪽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겠더라고요. 입맛도 없고, 그쪽이 후루룩 후루룩 소리 내서 먹는 모습도 싫고…. 어쩐지 그 모든 게 제 운명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 우울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짜장면을 먹다가 말고 일부러 화장실도 다녀온 건데… 돌아오다 보니까 그쪽이… 그쪽이 제 짜장면을 조금 덜어서 먹고 있는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안 본 척했지만 제가 그걸 봤어요…. 그걸 보니까… 그냥 모든 게 다 서러워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커피라도 한잔하자는 그쪽의 말을 거절한 거예요.
솔직하게 말하는 제 마음을 이해해 주세요. 그쪽도 모솔이고, 처음이라서 그랬겠죠. 그쪽도 오랫동안 시험을 준비하다 보니까 누군가를 만나고 대하는 게 어색해서 그랬겠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우린 다 그 정도로 살고 있고, 버티고 있는 거겠죠. 미안해요. 내 마음은 지금 딱 그 정도인 거 같아요. 그쪽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겨우 그 정도가 지금의 내가 누굴 이해할 수 있는 최대치인 거 같아요. 이 정도라도 된 것이, 그래서 이렇게 답문을 보내는 것이, 저로선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잘 지내시고, 공부도 열심히 하시길 바랄게요.
2. 재답신
죄송합니다. 제가 소개팅이 처음이라서…. 저도 친구 대신 나간 자리였거든요. 공무원 시험은 원래 소개팅 나가기로 한 친구가 준비하는 거고, 저는 그냥 알바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 오토바이 사고가 나서… 지금은 일을 쉬고 있는데… 그래서 나갔는데… 죄송합니다. 짜장면은… 그쪽이 안 드셔서 불까 봐 그만… 죄송합니다. 저도 그쪽이 힘내시길 바랄게요.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ㅣ경향신문 2018.05.31
/ 2022.05.03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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