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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의 인물조각보] ‘혼자서’ 죽는다는 것에 대하여

푸레택 2022. 5. 3. 18:59

[노명우의 인물조각보]'혼자서' 죽는다는 것에 대하여 (daum.net)

 

[노명우의 인물조각보]'혼자서' 죽는다는 것에 대하여

[경향신문] 가끔 세상일을 두 가지로 구별해 본다. 절대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능력이 있다고 해도 개인 ‘혼자서’ 좋은 사회를 만들어낼 수 없다. 단독 드리블로 좋은 사회는 이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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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명우의 인물조각보] ‘혼자서’ 죽는다는 것에 대하여 / 노명우 아주대 교수·사회학

가끔 세상일을 두 가지로 구별해 본다. 절대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능력이 있다고 해도 개인 ‘혼자서’ 좋은 사회를 만들어낼 수 없다. 단독 드리블로 좋은 사회는 이룩될 수 없다. 좋은 사회를 원한다면 공유된 가치에 때로는 공통의 선을 위해 합의된 강제로 구성된 팀플레이가 필요하다.

절대적으로 ‘혼자서’ 해야 하는 일, ‘혼자서’ 할 수밖에 없는 일도 있다. 깨달음의 순간, 누가 지적하지 않았는데도 과거 그 언젠가의 자신의 잘못을 알아채는 각성의 순간, 이 순간은 절대적으로 ‘혼자서’ 맞이해야 한다. ‘혼자서’가 자율성과 독립성을 의미하는 한 절대 슬픈 단어가 아니다.

어쩔 수 없다. 누구나 죽는다. 죽음은 인간의 유한성을 표현한다. 어찌 보면 죽음은 가장 인간다움을 표현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생로병사의 과정을 피해갈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인간은 죽음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자신은 죽음을 모르는 AI(인공지능)와 다름을 증명하기도 한다. ‘혼자서’와 ‘죽는다’는 단어가 결합하면 어떤 경우에 해당될까? 죽음은 ‘혼자서’ 감당하는 일인가? 아니면 죽음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일까?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음을 모른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모두 살아 있는 사람이며, 죽은 사람은 이 글을 읽을 수 없다. 이 글을 쓰는 사람이나 이 글을 읽는 사람이나 죽음이 임박한 순간 죽어가는 사람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대해 알 수 없다. 막연하게 추정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세계에 잠시 머물러 있다 떠나는 게 죽음이라면, 그 떠남은 ‘혼자서’ 해내야 하는 일임은 분명하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떠나는 길의 짝이 되어줄 수 없다.

이 세계를 사람은 ‘혼자서’ 떠나야 하지만 배웅은 ‘혼자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떠난 사람은 ‘혼자서’ 떠나도, 남은 사람은 모여서 작별인사를 고한다. 함께하는 배웅을 장례라 한다. 장례식장을 장식하는 조화가 요란하지 않아도 된다. 대접하는 음식이 풍성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장례의 의미는 배웅하는 사람의 숫자에 의해 배가 된다. 절차에 들인 돈의 크기에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비록 ‘혼자서’ 길을 떠난다 해도, 장례는 ‘혼자서’이어서는 안된다.

어느새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된 단어 무연사 혹은 고독사는 사실 고약한 단어이다. 섬뜩한 단어이기도 하다. ‘연’이 있었기에 세상에 태어났을 터인데 세상을 떠나는 순간 세상에 태어나게 했던 ‘연’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죽음이라니 어찌 고약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배웅하는 이가 아무도 없는 무연고 사망자는 늘어만 간다. 보건복지부에 의하면 2011년 699명, 2012년에는 698명, 2013년엔 894명, 2014년엔 1008명, 2015년엔 1245명, 2016년엔 1231명이 무연사로 죽음을 맞이했다. 고독사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을 발견한다. 혼자 죽는 사람은 대개의 경우 남자이다. 혼자 죽는 사람을 ‘혼자 죽는 남자’로 바꾸어 불러야 할 정도이다. 2016년의 무연고 사망자 1231명 중 남성이 894명으로 73%이고 성별 미상으로 분류된 9%의 110명을 제외하면 여자는 전체 무연고 사망자 중 17.7%에 불과한 220명이다. 국립중앙의료원이 집계한 2016년 전체 행려병동 사망자 77명 중 남자는 89.6%인 69명에 달한다.

《남자 혼자 죽다》라는 책을 펼쳤다. 왜 ‘혼자서’ 죽는 사람이 대개의 경우 ‘남자’인지는 이 책에 실린 유품정리업체 대표의 관찰적 해석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사실 할머니들은 혼자 살아도 옆집 할머니와 친하잖아요. 경제적으로 어려우니까 장례식 비용을 대줄 정도는 아니지만, 장례식에 와서 부조금을 내주는 정도는 되죠. 근데 남자들은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조용히 사는 경우가 많아요. 고독사하는 남자가 더 많은 데에는 아무래도 경제적인 이유가 크죠. 제가 다니는 현장들은 돈이 없어서 여기도 저기도 비빌 수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뜬 곳이에요. 주로 가난한 동네죠…. 반면 돈 많은 남자는 혼자 안 살거든요. 늦게 발견될 일이 없어요.”

‘혼자서’ 길을 떠나는데 그 길을 배웅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경우 이른바 ‘무연고(행려) 사망자 공고’가 한 달간 게시된다. 그 공고문은 매우 건조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제12조 및 시행령 제9조에 의거 무연고(행려) 사망자의 시체를 처리하고 동법 시행규칙 제4조에 의거하여 아래와 같이 공고하오니, 연고자는 사체(유골)를 인수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그 떠난 길을 배웅하는 사람이 없으면 화장 후 납골이 이뤄진 후 서울의 경우 서울특별시립 용미리 무연고 추모의 집에 안치된다. 서울역에서 고향집을 오가는 703번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곳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어머니가 준비해 놓은 저녁밥을 먹으러 버스 타고 오가던 그 길에 무연고 추모의 집이 있음을 이제야 비로소 알았다. 가난의 부지런함과 습관으로 굳어버린 경직된 남성성이 합작으로 빚어낸 무연사의 유일의 흔적을 ‘혼자서’만 알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기에 여기 적는다.


노명우 아주대 교수·사회학ㅣ
경향신문 2017.09.05

/ 2022.05.03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