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이기호의 미니픽션] (6) 옆방 남자 최철곤

푸레택 2022. 5. 3. 08:48

[이기호의 미니픽션]옆방 남자 최철곤 (daum.net)

 

[이기호의 미니픽션]옆방 남자 최철곤

[경향신문] 벽은 얇고 소리를 막아내지 못했다. 나는 왜 늘 그런 벽 뒤에서만 살았을까? 정용은 가만히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바람보다 소리가 먼저 도착하는 방, 소리만으로도 한기가 느껴지는

news.v.daum.net

[이기호의 미니픽션] 옆방 남자 최철곤 /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벽은 얇고 소리를 막아내지 못했다.

나는 왜 늘 그런 벽 뒤에서만 살았을까? 정용은 가만히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바람보다 소리가 먼저 도착하는 방, 소리만으로도 한기가 느껴지는 집, 벽을 만나면 더 커지는 소리들…. 진만과 함께 구한 광역시 반지하 자취방 역시 그랬다. 밤마다 웅웅웅 어디선가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옆방 남자의 코 고는 소리와 위층 사람의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 심지어는 누군가의 이 가는 소리까지. 소리는 어두워질수록 더 커졌고, 더 깊어졌다. 정용은 그게 다 가난한 벽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가운데가 텅텅 빈, 합판으로 세운 벽…. 그런 벽 뒤에서 살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의 몸에서도 텅텅, 공기 울리는 소리가 날 것 같았다.

벽으로 인해 뜻하지 않게 그들은 옆방에 사는 남자의 이름이 최철곤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어디 이름뿐인가? 진만과 정용은 옆방 사는 남자가 아침 몇 시에 출근했다가 몇 시에 퇴근하는지, 퇴근한 직후 가장 먼저 무엇을 하는지(그는 가장 먼저 양말을 빨았다), 저녁을 먹고 잠들기 전까지는 주로 무엇을 하는지, 저절로 알게 되었다.

그는 특히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의 광팬이었는데, 평일과 주말 저녁엔 항상 TV를 크게 틀어놓고 중계방송을 시청했다. 덕분에 진만과 정용 역시 늘 한화 야구와 함께 저녁을 맞이해야만 했다(그들 방엔 TV가 없었다). 옆방 남자는 한화가 이기는 날엔 일찍 잠들었지만, 지는 날엔 늘 한두 시간씩 혼자 소주를 마셨고, 그러면서 어디론가 계속 전화를 걸었다. 문제는 한화가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훨씬 더 많았다는 데 있었다(진만과 정용은 원래 두산 팬이었는데, 이사 온 지 두 달 만에 한화 팬이 되고 말았다. 제발, 이겨라. 제발 좀 이겨라. 간절히 염원하는 팬).

그는 주로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통화했고, 그때마다 목소리는 하이톤으로 올라갔다.

“어, 우리 딸! 아빠야. 자고 있었니? 아니야, 아니야. 아빠가 오늘은 아주 조금만 마셨어. 아빠 회사 친구들이 계속 붙잡는 바람에… 응응. 그래, 그래. 아빠가 내일부턴 진짜 안 마실게.”

진만과 정용은 자취방에 있을 땐 주로 스마트폰으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거나 유튜브에 올라온 게임 동영상을 봤는데, 옆방 남자가 통화를 시작하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조용히 볼륨을 줄였다. 그들은 몇 번 원룸 복도와 계단에서 옆방 남자와 마주친 적도 있었다. 그는 귀밑머리가 희끗희끗한 사십대 중반의 남자였는데, 키도 작고 어깨도 좁았다. 손에는 항상 공구 가방을 들고 있었고, 등산화처럼 생긴 갈색 작업화를 신고 있었다. 그들은 그와 마주칠 때마다 조용히 몸을 비켜 지나쳤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벽을 통해서 듣는 것이 전부였다.

“그럼, 그럼. 다음 달에 아빠가 꼭 대전 올라가서 우리 딸하고 야구장 같이 갈게. 엄마? 아니 아니… 엄마 바꾸진 말고….”

옆방 남자는 통화를 마치기 전에 꼭 딸에게 문제를 냈다.

“그건 그렇고, 우리 딸! 아빠가 오늘도 문제 내야지. 물리치료가 왜 물리치료일까?”

진만은 어땠는지 몰라도, 정용은 그때마다 속으로 제발 그러지 마요, 아저씨, 웅얼거렸다. 아무리 초등학생 딸이라도… 그러면 아빠 싫어해요….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건 말이지… 병을 물리치려구!”

아이 씨… 왜 그러는 것인지, 진만까지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큭큭큭,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던 지난주 금요일 저녁엔 또 한화가 역전패를 당했고, 남자는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며 소주잔을 꺼냈다. 이제 곧 또 딸과 통화를 하겠거니, 생각했는데 그 뒤로도 계속 남자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일정하게 탁탁, 밥상에 소주잔을 내려놓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러자니 괜스레 더 신경이 쓰인 쪽은 정용과 진만이었다. 진만은 아예 벽 쪽으로 다가가 한쪽 귀를 바싹 갖다 댔다. 정용을 바라보며 무언극을 하듯 어깨를 으쓱 들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옆방에서 다른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누군가 속으로 흐느끼는 소리였다. 무언가로 입을 틀어막은 채, 끅끅 토해내는 울음소리. 그 울음소리가 진동처럼, 파장처럼, 벽을 타고 넘어왔다. 정용은 그 소리를 듣고도 일부러 모른 척했다.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남자에 대해서 상상했다. 어쩌면 남자는 오늘 아내에게서 전화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자꾸 딸한테 전화하지 말라는 부탁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오늘 직장에서 해고 통지를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남자는 남자이고, 나는 나일 뿐. 벽이 벽인 것처럼…. 정용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계속 벽을 외면했다.

“똑똑똑.”

하지만 진만은 정용과 생각이 조금 달랐던 모양이었다. 그는 마치 노크라도 하듯 옆방 벽을 두들겼다.

“아저씨… 울어요?”

진만의 말 때문인지 옆방에선 급하게 흐느낌이 멈추고, 대신 콧물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울지 마요, 아저씨… 한화도 언젠가 이기겠죠….”

옆방에선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정용은 진만을 말리고 싶었으나, 또 한편 그냥 내버려 두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아저씨… 울지 마시고요… 소가 왜 목장에 갔는지 아세요?”

“……”

“모르시죠?”

진만이 한 번 더 묻자, 잠시 후 남자의 작은 목소리가, 그러나 여전히 물기 묻은 목소리가 벽을 넘어 들려왔다.

“소보루….”

정용은 그제야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ㅣ경향신문 2017.06.15

/ 2022.05.03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