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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의 미니픽션] (1) 어둠 뒤를 조심하라

푸레택 2022. 5. 3. 07:59

[이기호의 미니픽션]어둠 뒤를 조심하라 (daum.net)

 

[이기호의 미니픽션]어둠 뒤를 조심하라

[경향신문] 이제 그만 들어갈까? 정용이 그렇게 말하자, 진만이 바닥에 놓여 있던 촛불을 들었다. 초는 이미 볼품없이 쪼그라들어 엄지손가락만 해져 있었다. 밤 11시였다. 꼬박 4시간 넘게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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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의 미니픽션] 어둠 뒤를 조심하라 /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이제 그만 들어갈까?

정용이 그렇게 말하자, 진만이 바닥에 놓여 있던 촛불을 들었다. 초는 이미 볼품없이 쪼그라들어 엄지손가락만 해져 있었다. 밤 11시였다. 꼬박 4시간 넘게 그들은 편의점 앞에 앉아 있었던 셈이다. 주변엔 여전히 지나다니는 사람 한 명, 차 한 대 보이지 않았다.

1월 셋째 주 토요일이었다. 전라도 소재 한 사립대에 다니고 있는 정용과 진만은 그날 오후, 인근 광역시에 나갈 작정이었다. 그곳에 나가 피시방도 가고, 밥다운 밥도 먹을 계획이었다. 겨울방학이었지만, 그들은 계절학기를 듣느라 학교 기숙사에 머물고 있었다. 면 소재지에 위치한 그들의 대학교 정문 앞엔 편의점이 하나, 치킨집이 하나, 문 닫은 중국집과 피시방 하나가 전부였다. 달랑 그 건물 하나. 그 뒤로는 오직 논과 밭과 산뿐이었다. 무슨 대학교가 정미소도 아니고…. 예전 그들의 대학교에 처음 와본 정용의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주말엔 기숙사에서 학식이 나오지 않아, 그들은 매번 편의점에서 도시락이나 컵라면, 삼각김밥을 사 먹었다. 그것만으로도 지난 학기 학교 내 복사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번 용돈을 거의 다 써버렸지만, 그들은 큰마음을 먹고 광역시로 나가기로 했다. 가서 우리도 촛불집회도 가고, 그 사진 찍어서 막 페이스북에도 올리고, 뭐 그러자고. 진만이 그렇게 말했을 때, 정용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촛불잔치든 촛불집회든, 어디든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이제 곧 졸업인데…. 산골짜기 대학교에만 머물고 있다 보니 어쩐지 진짜 고라니가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노루와 고라니를 어떻게 구별하는지 알아? 노루는 엉덩이 쪽이 하얗고 고라니는 조금 절뚝거리면서 뛴다. 예전, 정용이는 수도권 대학으로 진학한 여자친구에게 그런 문자를 보낸 적이 있었다. 보내면서도 아이, 씨… 내가 왜 이런 걸 알고 있지…. 정용이는 자괴감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는 여자친구와 헤어진 지 2년이 다 되었다.

하지만 그날 오후 정용과 진만은 광역시로 나가지 못했다. 전날 밤부터 내린 폭설로 인해 1시간에 한 대꼴로 다니던 시외버스가 모두 운행을 중지했기 때문이다. 학기 중엔 스쿨버스가 다니지만 방학 때는 그마저도 다니지 않았다. 정용과 진만은 편의점에서 내놓은 파라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소복소복 눈이 쌓이고 있는 도로만 바라보았다. 정용은 포기하고 다시 기숙사로 들어갈 마음이었지만, 진만은 생각이 달랐다. 혹시 지나가는 다른 차가 있다면… 얻어타고 나갈 수도 있을 거야. 지금 기숙사 가봐야 할 것도 없잖아? 그래서 정용과 진만은 그곳 파라솔에 앉아 컵라면과 삼각김밥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몸이 오슬오슬 떨려 소주 네 병을 사서 홀짝홀짝 나눠 마시기도 했다. 파라솔 탁자엔 진만이 준비해온 풍년양초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진만은 그것을 탁자 위에 켜 두었다. 클로즈업으로 촛불 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했다.

여기서 이러시면 어떡해요?

편의점 알바생이 나와 정용과 진만에게 짜증을 냈다. 파라솔 탁자에는 양초에서 흘러나온 촛농이 점점이 굳어 있었다.

우리 지금 집회하는 거예요.

진만이 맞받아쳤다.

그거 알아요?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요!

진만의 목소리는 취기를 이길 수 없어 보였다. 편의점 알바생은 “에휴, 더러운 놈의 알바 인생!” 하면서 다시 점포 안으로 들어갔다.

기숙사로 걸어가는 도중에도 그들은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진만은 한 손에 계속 양초를 들고 걸어갔는데, 바람 때문인지 자주 촛불이 꺼졌다. 그 때문에 그들은 자주 걸음을 멈추었다. 어차피 아무도 보지 않을 촛불인데.

대운동장 스쿨버스 정류장을 막 지날 즈음이었다. 진만이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곤 정류장 뒤편 어두운 화단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며 혀 차는 소리를 냈다. 우쭈쭈쭈쭈.


정용도 화단 쪽을 바라봤다. 왜 그래? 뭐 있어? 정용이 묻자, 진만이 여전히 취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개가 저쪽으로 들어갔어. 정용은 진만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야산으로 이어진 화단은 어둠에 휩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용은 진만 옆에 쪼그려 앉아 우쭈쭈쭈, 우쭈쭈쭈, 함께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그래, 개라도 한 마리 나왔으면 좋겠다. 정용도 뒤늦게 취기를 느끼고 있었다. 저녁 내내 개고생을 한 기분인데, 무언가, 개라도 만나면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듀엣으로 우쭈쭈쭈, 우쭈쭈쭈, 소리를 내던 그들은 어느 순간, 소리를 멈추었다. 화단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면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개가 아니었다.

멧돼지였다.

정용과 진만은 사력을 다해 정류장에서 이십여미터 떨어진 축구부 숙소 건물까지 뛰어갔다. 그곳이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건물이었다. 멧돼지도 사력을 다해 그들을 향해 달려왔는데, 그 옆으로 고양이만 한 새끼 멧돼지 두 마리도 함께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축구부 숙소 건물은 단층 슬래브였다. 그들은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갈 생각이었지만, 이런, 문은 잠겨 있었다. 멧돼지는 순식간에 그들 바로 앞까지 달려왔고, 그들은 반사적으로 마치 두 마리의 나방처럼 벽에 바싹 달라붙었다. 사방을 가득 메운 흰 눈 때문인지, 멧돼지는 더욱더 커 보였고, 더욱더 거무튀튀해 보였다. 그 옆에서 서로의 엉덩이를 건드리면서 놀고 있는 새끼 멧돼지가 부럽다고, 정용은 그 와중에도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무슨 학교에 학생은 없고, 멧돼지 가족만 있으니….


눈사람처럼 굳은 듯 서 있던 진만이 천천히, 소리 내지 않고, 자기 점퍼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정용은 입 모양만으로 ‘뭐 하게?’라고 물었다. 진만은 그 말엔 대꾸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라이터와 양초를 꺼내 들었다. 그러곤 말릴 틈도 없이 그것에 불을 붙여 한 손으로 높이 쳐들었다. 멧돼지를 향해 쳐들었다.


아아, 정말 포기하지 않는구나.

정용은 멀거니 촛불을 바라보았다.

멧돼지는 말이 없었다.

물러나지 않았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ㅣ경향신문 2017.01.26


/ 2022.05.03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