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르시스, 배철현의 비극 읽기] 무법과 야만 사이, 문명의 균형점은 어디인가 (daum.net)
[카타르시스, 배철현의 비극 읽기] (27) 무법과 야만 사이, 문명의 균형점은 어디인가
(27) 아테나의 건설적 망설임
인류는 도시라는 추상적 공간을 통해 ‘문명’을 구축하였다. 한자 ‘文明’(문명)은 도시와 그 안에 거주하는 시민들을 행복하게 만들려는 정신적인 원칙을 비밀스럽게 설명한다. ‘명(明)’은 ‘서로 다른 이질적인 요소들’, 즉 낮을 관리하는 ‘태양’ 일(日)과 밤을 관리하는 ‘달’ 월(月)이 합쳐졌다. ‘문명’이란 서로 대척점에 있는 반대들 가운데서, 하나를 다른 것보다 우위에 두거나 배척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 가지를 모두 끌어안으려 부단하게 노력한다. 우리는 그런 노력이 마치 몸에 그려진 문신처럼, 자신의 무늬가 된 공동체를 문명사회라고 부른다.
문명이란 소통의 상흔
문명이란 이런 소통의 문신을 획득하기 위한 수련이다. 서로 다른 이념과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에서 분쟁과 분란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문명이란 공동을 위한 최소공배수를 발견하고 그것을 모두 수용하겠다는 결심이다. 자신의 아집을 발견하여 버리고 상대방에 입장에서 사람과 사건을 보는 시선이 문명사회의 기초다.
이 시선은 오랜 수련을 통해 인내를 배우고, 인내를 통한 공감의 능력을 배양할 때만 비로소 작동한다. 우리는 이 과정을 소통이라고 말한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식구와도 사소한 문제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하물며 도시라는 큰 문명사회를 이루려 할 때, 우리에겐 소통이란 기술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의 의견에 침묵하고 상대방과 나의 의견을 숙고하는 인내와 승복이 문명이라는 자식을 낳는다.
아이스킬로스의 3부작 ‘오레스테이아’의 마지막 작품인 ‘자비로운 여신들’에서 주인공 오레스테스는 아폴로의 명령으로 델피에서 아테네로 도망친다. 델피는 인간이 일방적으로 사제라는 매개자를 통해 신으로부터 신탁을 받는 공간이라면, 아테네는 서로 상충하는 의견을 의제로 내놓아 가장 훌륭한 선택을 찾아가는 배려와 소통의 공간이다.
델피에서는 신이 선택한 한 사람이 지하 깊숙이 내려가 환각의 상태에서 신탁을 받았다면, 아테네에서는 모든 사람이 참여하여 각자가 지닌 이성을 통해, 자신들에게 가장 적합한 것을 스스로 선택하였다. 아테네인들은 자신들의 이성, 절제, 배려와 같은 힘을 신봉하였고, 신을 대치할 상징적인 공간을 구축하였다. 그것이 아크로폴리스다. 아크로폴리스는 지상과 천상을 이어주는 경계의 공간이자 지상에 건축한 신의 공간이다.
아크로폴리스는 인간 이성에 주어진 신전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 도시에서 150m 솟아오른 평평한 바위 위에 3㏊(헥타르), 즉 3만㎡ 정도 크기다. 고대 신화에 의하면 ‘케크롭스(Cecrops)’라는 뱀 모습의 괴물이 아테네를 건설하였다. 그 후 기원전 15세기쯤 미케네 시대에 길이 760m, 높이 10m, 두께 3.5~6m의 성벽이 구축되어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다. 그 후 기원전 6세기 페이스트라토스가 아크로폴리스 위에 아테네 신전을 건축하였다. 이때 아테나 여신이 아테네의 주신으로 등극하였다. 이 신전을 후대 사람들은 ‘오래된 신전’이란 뜻인 그리스어 ‘아르카이오스 네오스(Arkhaios Neos)’라고 불렀다. 아크로폴리스 위에 우뚝 서있는 이 신전을 증축하여 아테네인들은 그들이 자랑하는 문명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러나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제국의 크세르크세스가 침공하여, ‘오래된 신전’을 불태우고 그 안에 있던 거룩한 물건들을 모두 약탈하였다. 거기에는 이제 불에 타다 남은 바위만 남겨져 있었다. 아테네인들이 기원전 458년 폐허가 된 아크로폴리스와 아테네 신전을 보면서 ‘오레스테이아’를 관람하고 있었다.
자신을 변론하는 오레스테스
오레스테스는 델피의 ‘신탁의 공간’에서 아테네라는 ‘소통의 공간’으로 도망쳤다. 그는 델피라는 신비 종교 의식의 암흑 공간에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라는 인간의 이성과 감성, 수학과 변론, 생각과 숙고를 연습하는, 지상에서 가장 높은 공간인 아크로폴리스에 도착하였다. 아폴로신은 오레스테스를 인도하기 위해 헤르메스를 보냈다. 헤르메스와 오레스테스는 이전에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아테네 신전 앞에서 서있다. 오레스테스는 아직 ‘한 여신의 형상이 그려진 목판’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다.
여전히 과거의 주술적인 힘을 의지하던 그는 아테네 신전이라는 공간에서 자신의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델피 신전에서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겁쟁이였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생각을 또렷이 말하기 시작한다. “나의 여주인이신 아테나 여신이여. 나는 이곳에 아폴로의 명령으로 왔습니다. 이 ‘저주받고 불쌍한 자’를 친절하게 받아주십시오. 나는 정화를 청구하거나 더러운 손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오 여신이시여! 저는 당신의 집과 당신의 형상이 있는 곳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저는 정신을 차려 제 재판의 결과를 기다리겠습니다.”(235-243행)
오레스테스의 입에서 ‘재판’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그는 이곳에서 ‘재판의 결과’를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무대 위에서 오레스테스의 말을 들은 아테네 시민들은 웅성거렸다. “어머니를 죽인 자식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 게 아니라 재판을 받는다고!” 그들은 ‘재판(디케ㆍDike)’이란 단어가 생소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오레스테스의 뻔뻔함에 놀랐을 것이다. 오레스테스에게 알맞은 장소는 지하세계이지 세상에서 가장 높은 아테네 법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종교의 세 가지 규율이 있다. “첫째, 신들을 존경하라. 둘째, 부모를 공경하라. 셋째, 손님을 대접하라.” 지하세계의 신이며 기록의 신인 하데스는 모든 인간을 이 세 가지를 기준으로 심판한다.
분노의 여신들은 이제 합창대가 되어 노래한다. “어머니를 죽인 자는 몰래 도망쳐서는 안 된다.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가 자신을 변호하겠다고 불멸의 여신의 형상을 두 손으로 잡아 자신이 치러야 할 벌을 피해 그 대신 재판을 받겠다고! 그것은 불가능하다.” (255-261행)
공동체의 숭고한 상징, 아테네
오레스테스는 앞으로 다가올 아테네 민주주의의 새로운 시민 모습을 예시한다. 자신의 주장을, 자신의 언변을 통해 스스로 말한다. “나는 언제 말해야 할지, 언제 조용해야 할지 안다. 나는 이 재판에서 나의 현명한 스승(아폴로)의 허락으로 말해도 된다고 명령을 받았다.” 오레스테스는 아테나를 언급한다. 아테나는 새로운 세계를 이끌어갈 신이며 원칙이다. 그녀는 그리스어로 ‘파르테노스(parthenos)’ 즉 ‘처녀’라 불렸다. ‘파르테노스’라는 말은 단순한 처녀가 아니라 남녀 구분을 뛰어넘은 숭고한 존재라는 의미다. 그녀는 전설에 의하면 제우스 신의 이마에서 투구를 쓰고 나왔다. 가끔 제우스를 기쁘게 만들기 위해 투구를 벗는다. 아테나 여신은 하늘의 신이며 동시에 땅의 신이다. 아테나는 지혜, 창작, 전쟁의 신으로 후대 로마시대에는 미네르바 여신으로 흡수되어 숭상되었다. 아테나는 공동체의 원칙, 인간의 행동과 판단을 조사하는 자, 특히 살인사건을 조사하여 의도적이지 않는 살인자를 풀어준다.
양측 변론을 청취하는 아테나
아폴로 신은 오레스테스에게 아테네로 도망치라고 조언했다. 아테나는 자신의 신전에 들어온 손님들인, 복수를 다짐하는 분노의 여신들과 오레스테스를 미리 판단하지 않는다. 그녀는 분노의 여신들의 일방적인 주장을 고리타분한 억지라고 판단한다. 그녀는 오레스테스의 살인 행위만을 보지 않고, 무엇이 그를 어머니까지 살해하게 만들었는지 알고 싶어한다.
“오, 낯선자여! 당신은 무엇을 말하고 싶습니까? 당신이 당신의 나라, 가족, 그리고 운명들을 말한 후에, 이 살인사건에 대해 스스로 변호해보십시오. 이 모든 것을 가능한 한 나에게 분명하게 대답하십시오.” 아테나는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 배운다. 그녀는 여신의 신분이지만, 한 인간의 살인을 하찮은 사건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녀 스스로 ‘예비 신문자’가 되어 오레스테스를 정식으로 기소 전에 ‘예비 심사(아나크리시스ㆍanakrisis)’를 행하고 있다. 만일 오레스테스를 풀어준다면, 아테네가 무법의 장소가 될 것이다. 분노의 여신들 편을 들어 오레스테스를 죽인다면, 아테네는 복수가 난무하는 야만의 세계가 될 것이다. 아테나는 지금 ‘건설적인 망설임’에 빠졌다. 오레스테스 사건에 대한 아테나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ㅣ한국일보
/ 2022.04.28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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