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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시스, 배철현의 비극읽기] (11) 이주(移住)와 환대(歡待).. 낯섦과 다름에 대한 이타적 수용, 그것이 민주주의다

푸레택 2022. 4. 25. 14:05

[카타르시스, 배철현의 비극읽기] 낯섦과 다름에 대한 이타적 수용, 그것이 민주주의다 (daum.net)

 

[카타르시스, 배철현의 비극읽기] 낯섦과 다름에 대한 이타적 수용, 그것이 민주주의다

새로움과 다름을 수용하지 못한 네안데르탈인은 한순간에 멸종 끝없이 이주하며 낯섦을 수용한 호모사피엔스는 현재까지 생존 낯섦을 적극 수용하는것이 '환대' 아테네인들의 삶의 원칙도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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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1633년작 '빌레몬과 바우키스 집에 있는 주피터와 머큐리'. 그림 왼쪽 편에 앉은 주피터와 머큐리는 낯선 자로 변신한 자신들을 성심 성의껏 대접하는 노부부 빌레몬과 바우키스에게 기적을 행하고 상을 내린다.

[카타르시스, 배철현의 비극읽기] (11) 이주(移住)와 환대(歡待).. 낯섦과 다름에 대한 이타적 수용, 그것이 민주주의다

새로움과 다름을 수용하지 못한

네안데르탈인은 한순간에 멸종

끝없이 이주하며 낯섦을 수용한

호모사피엔스는 현재까지 생존

낯섦을 적극 수용하는것이 '환대'

아테네인들의 삶의 원칙도 환대

외국인들과 함께 비극을 보며

그들은 환대를 배웠다


인간은 이주(移住)하는 동물이다. 현생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아프리카 동부에 안주하지 않았다. 일부 호기심 많은 호모 사피엔스들은 20만년 전과 10만년 전, 두 차례 고향 아프리카를 떠났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탐험이 그들의 운명을 바꿔놓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들은 오늘날 유럽과 아시아가 자신들과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 생존을 위해 더 나은 장소라고 판단하였다. 유럽에는 이미 네안데르탈인들이 먼저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어, 두 인종간의 갈등은 불가피했다. 이주민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이 본격적으로 만나 경쟁한 시기는 기원전 4만5000년에서 4만년 사이다. 고고학자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이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공존했으나, 네안데르탈인들은 현생인류에 밀려 기원전 3만년경 지구에서 자취를 감췄다.


새로움과 다름의 수용, 생존을 결정짓다


네안데르탈인이 한 순간에 멸종된 이유는 다양하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그들의 ‘사회성 부족’이다. 네안데르탈인들은 기껏해야 10명 이하의 인원들이 모여 살았다. 새로움과 다름을 수용하지 못했다. 이들에 비해 호모 사피엔스들은 수십 명이 함께 거주하면서 공동체를 이루었다. ‘공동체’란 자신의 이익을 넘어선 ‘공동선’을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 만들어 낸 추상적인 표현이다. 네안데르탈인들은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들이 익숙한 직계가족이나 가까운 친척들과 생활하였다. 이들에게 ‘외부인’은 적이며, ‘다름’은 제거 대상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끊임없이 이주하였다. 그들이 밟는 땅은 미지의 세계였다. 그들은 이주를 통해 새로운 경지로 들어가, 그곳에 원래 거주하는 자들과 일정한 관계를 맺는다. 고고학자들은 호모 사피엔스가 ‘낯선 사람’들을 자신들의 공동체에 영입하여 공동체를 끊임없이 확대하였다고 본다. ‘낯선 사람’을 적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가족 혹은 친구로 여겼다.

이슬람의 정신도 이주와 환대다

낯섦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시도를 ‘환대’(歡待)라고 부른다. ‘환대’는 아프리카나 중동 사막에 거주하는 베두인들의 삶을 지배하는 원칙이다. 그들은 사막에서 마주치는 낯선 자들을 무조건 환대한다. 그들은 환대하는 행위를 용맹으로 여겼다. 베두인들이 오랫동안 거친 사막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낯선 자를 환대해서다. 베두인 여성들의 윤리를 아랍어로 ‘이르둔’(irdun)이라고 부른다. ‘이르둔’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정숙한 상태를 유지하는 마음가짐’이다. 베두인 여성들은 ‘이르둔’은 한번 잃으면, 영원히 회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베두인 공동체 전체는 여성들이 ‘이르둔’을 지킬 수 있도록 보호하고, 자신의 재산을 부족과 마을의 안녕을 위해 아끼지 않는다. 그들은 이 공동체적 노력을 ‘샤라프’(sharaf)라고 불렀다.

베두인들에게 마을의 안녕을 위한 가장 중요한 윤리는 ‘낯선 자’를 처리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도움을 요청하는 ‘낯선 자들’이 심지어는 적이라 할 지라도, 일정 기간 동안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한다. 자신들이 아무리 가난하다 할지라도, 숙식을 마련해줘야 한다. 베두인들은 삶의 원칙을 아랍어로 ‘디야파’(diyafa)라고 불렀다. ‘디야파’는 흔히 ‘환대’라고 번역하며 베두인이 지녀야 할 최고의 덕목이다. 기원후 7세기 무함마드는 ‘낯섦’을 삶의 방식에서 축출하여 자신의 상업적인 이윤만 쫓아가는 메카 사람들에게 그 생활과의 단절을 요구한다. 무함마드는 기원후 632년 공동체를 이끌고 메카에서 부족주의 생활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자신의 아버지 무덤이 있는 야쓰리브(후대 ‘메디나’로 개명)로 ‘이주’한다. 야쓰리브인들이 무함마드와 그 일행을 환대하여 ‘이슬람’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주’라는 아랍어 ‘헤지라’는 ‘과거의 편안한 삶과의 폭력적이며 단호한 단절’이란 의미도 지닌다. 이슬람에서 사회약자에 대한 배려도 바로 ‘디야파’라는 환대정신에 뿌리를 둔다.


어릴 적 배운 엄마의 마음, 그것이 환대다

왜 베두인들은 자신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숙식을 제공하는가? 그 낯선 자가 적이란 사실이 발각되면,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가족이나 공동체도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위험에 처할 수 있는데, 왜 그들은 이 환대정신을 최고의 ‘명예’(名譽)라고 여겼는가? 이런 행동을 설명하려는 과학적인 시도가 ‘호혜적 이타주의’다.

최근 몇몇 과학자들은 프랑스 사회학자 오귀스트 콩트(1798-1857)가 말한 ‘이타주의’는 인간사회에 적용할 수 없는 환상이라고 주장한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 서문에서 인간의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을 ‘손톱과 발톱이 피로 물든 자연ㆍ본성’(nature, red in tooth and claw)으로 표현하였다. 인간은 결국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일을 도모하는 유전자를 몸에 지닌 숙주일 뿐이다. 미국 진화심리학자 로버트 트리버스는 인간의 ‘이기적 행위’를 ‘호혜적 이타주의’로 설명한다. 인간은 어려움에 처한 다른 인간을 지금 당장 자신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도와주는 이유는, 자신이 반대로 곤란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국 자신의 이윤과 명예를 위해 전략적 선행을 베푸는가? ‘적자생존’과 ‘양육강식’이 인간 삶의 규범인가? 인간은 다른 포유류와는 달리 1년 정도 미성숙한 상태로 태어난다. 망아지는 어미말로부터 나와 30분이면 스스로 걷지만, 인간이 걷기까지 1년이 걸린다. 아니 스스로 독립하기까지 수십 년이 걸린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비교하여, 비효율적이지만 한 가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미성숙한 상태로 태어난 어린아이는 1년 동안 누군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 젖을 주고 양육하는 것을 본다. 누군가의 이타적이며 헌신적인 노력이 자신의 생존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을 배운다. 인간은 유아기를 거쳐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점점 이기적인 문화에 물들어, 이기적 행위를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수용한다. 그러나 마음 속 깊이, 누구를 위해 아무런 대가 없이 목숨을 바치는 ‘어머니’의 삶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이 마음의 확장이 바로 ‘환대’다.

최고 신 제우스에게도 낯선 자에 대한 환대는 의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인들은 민주주의를 실험하고 있었다. 그들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고양시키기 위해 원형극장에 앉았다. 당시 원형극장은 1만명에서 1만5,000명 정도의 관객을 수용하였다. 아테네 사회는 소수만이 자유 시민이었다. 이들이 아테네 정치사회를 이끌었다. 대부분은 아테네를 방문하여 비극을 보러 온 ‘외국인’이거나 일거리를 찾아 아테네로 이주해온 ‘노동자’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외국인을 ‘크세노스’(xenos)라고 불렀고 아테네에서 거주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메티코스’(metikos)라고 불렀다.

크세노스는 ‘낯선 자’로 번역하는데 문맥에 따라 ‘적’ ‘이방인’으로 혹은 ‘손님’, 더 나아가 ‘친구’로 번역한다. 크세노스는 그리스 다른 도시나 멀리는 마케도니아나 소아시아와 같은 외국에서 방문한 외국인이다. 아테네인들은 외국에서 와 일정한 교류를 통해 우정을 나눈 친구를 크세노스라고 불렀다. 그리스인들이 크세노스를 이렇게 다양한 의미로 사용한 이유가 있다. 그리스 최고의 신인 제우스의 별칭은 ‘제우스 크세네오스’다. 제우스는 여행자나 낯선 자에게 환대를 베풀어야 한다는 종교적인 의무의 화신이다.

베두인의 삶의 원칙이 낯선 자를 신처럼 환대하는 ‘디야파’인 것처럼, 이제 아테네라는 도시를 건설하여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아테네인들 삶의 원칙도 유사하게 ‘크세니아’다. 크세니아는 그리스인들의 ‘환대원칙’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서 종종 신은 ‘가난한 낯선 자’(크세노스)로 변장하여 인간을 찾아온다.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는 남루한 농부로 변장한 주피터와 머큐리 신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이 신들이 쉴 곳을 찾을 때 사람들이 악해 그들을 거절했지만, 가난한 바우키스와 빌레몬이 환대한다.

인간은 주인이 되어 그 손님을 환대함으로 자신의 덕을 수련하고 발휘한다. 크세니아에 두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주인은 손님이 원하는 모든 것, 특히 음식, 목욕, 숙소를 제공하고 떠날 때는 선물을 준다. 둘째, 손님은 주인에게 공손하게 존경을 표시한다. 손님도 주인에게 그 집을 떠날 때 선물을 준비해야 한다.

아이스킬로스의 세 번째 비극 ‘탄원하는 여인들’은 바로 그리스인들 삶의 원칙인 ‘크세니아’를 아테네인들에게 교육한다. 민주주의는 다름과 낯섦에 대한 수용이며 배려다. 아테네 자유인들은 외국인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함께 원형극장에 앉아 ‘탄원하는 여인들’을 숨죽여 관람하였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그리스 아르고스로 찾아와 집단 난민 지위를 신청한 50명 여인들에 대한 흥미진진한 비극에 몰입하고 있었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ㅣ한국일보 

/ 2022.04.25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