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헛것인데.. 그래도 방송 출연하려는 이유 (daum.net)
[김석봉의 산촌일기] 다 헛것인데.. 그래도 방송 출연하려는 이유
ㅣ인간극장 ‘석봉씨의 봄’ 출연 이후 달라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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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봉 기자]
아들 차를 타고 아내와 함께 읍내로 나가면서 언제 말을 꺼내야 하나 주저주저했다. 시각을 확인하니 그 방송작가로부터 전화 올 시간이 되어간다. 답변이야 들어보나 마나 하겠지만 그래도 기대하는 마음이 영 없는 것은 아니었다.
"EBS 한국기행 있잖아. 거기서 작가라며 전화가 왔더라고."
"왜? 텔레비전 찍자고?"
"응. 이번엔 우리 집에 딱 맞는 내용이래. 마음 따라 발길 머무는 뭐라던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앞좌석에 앉은 아내가 홱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급히 말을 얼버무렸고 일렁이는 아내의 머리카락에서 벌써 찬바람이 났다. 백미러에 비친 아들의 눈빛도 싸늘했다.
"아, 글쎄. 텔레비전 안 찍는다고 했잖아요."
아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내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작가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겨울나기 준비로 바쁘기도 하고, 가족들이 좋아하지 않을 거라며 풀 죽은 목소리로 둘러댔다.
사실 물어보나 마나 한 일이었다. 그동안 제법 유명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우리 집과 우리 가족을 찍자는 연락이 왔고, 몇몇 프로그램을 받아들였다. 이후 공중파 지상파 가리지 않고 출연 제의가 들어왔는데 아내가 완강히 반대하기 시작했다. 이런 음식을 촬영하자, 저런 모습을 찍어보자는 등 그들의 입맛에 맞춰준 아내가 특히 힘들었을 거였다. 이후 텔레비전에 안 나가는 것은 가족의 불문율로 굳었다.
ㅣ텔레비전과의 인연
며칠 전이었다. 저녁 밥상머리에서 밥을 먹는데 서하가 빠져들 듯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제 또래 아이가 나오는 프로그램이었다.
"우리 서하 텔레비전에 나오고 싶어?"
내가 등을 다독이며 귓속말로 물었다. 서하가 가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습을 본 뒤로 서하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모습과 그것을 바라보는 서하의 좋아하는 모습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혹시라도 괜찮은 프로그램에서 제의가 오면 서하와 함께 한 번쯤 찍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때마침 EBS 한국기행에서 출연 제의가 온 거였다.
나는 옳다구나 했다. 서하를 둘러대면 가족들도 어느 정도 뜻을 굽히지 싶었다. 프로그램 내용도 결코 나쁘지 않았다. '마음 따라 발길 머무는 곳에'라는 내용인데 이리저리 찾아보니 우리 집이 딱 맞더라는 작가의 말이었다. 마당 꽃밭과 아담한 숙소와 맛있는 집밥이 그저 그만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런 프로그램인 데다 텔레비전에 나왔으면 하는 서하를 더하면 어느 정도 틈이 생길 거라 믿었다. 서하 앞에서 할아버지의 가오를 보여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내 바람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어린애 텔레비전에 나오는 게 뭐가 그리 좋은 일이냐'는 핀잔만 잔뜩 받아야 했다.
희한하게도 나와 텔레비전은 인연이 많았다. 도시에서 살 때 환경운동한답시고 며칠에 한 번씩은 텔레비전 뉴스 인터뷰를 했었다. 골프장 반대운동에서부터 댐 반대운동에 이르기까지 지역에서 쏟아지는 굵직한 사회문제가 대개 환경문제였기에 기자는 환경단체를 찾았다. 전문성이 있거나 없거나 환경단체 실무 책임자다 보니 걸핏하면 카메라를 들이대고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그때는 길을 가면 마주치는 사람들이 '저 사람이 엊저녁 텔레비전에 나온 사람'이라 수군대며 곁눈질로 나를 쳐다보기 일쑤였다. 어쩌다 몇몇이 모인 자리에라도 가면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탤런트보다 더 자주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어쩌다 동창회라도 가면 '우리의 자랑스러운 동기 동창'이라며 박수를 쳤고, 제삿날 모이는 일가친척들조차 내가 대단한 권력이라도 가진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 어쩌면 그때는 나도 많이 우쭐거렸을 거였다.
"환경이 얼마나 중요해? 우리 살아가는데 환경 아닌 게 없어."
텔레비전에 나오는 횟수만큼 내 권위가 단단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으니까. 누구도 괄시하지 못했으니까. 그런다고 달라질 세상도 아니건만 그렇게 텔레비전에 기대 한 시절을 살았다.
도시를 떠나 이 산골마을에 와서도 텔레비전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민박을 시작하면서부터 손님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우리 집을 찾은 손님들이 SNS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올렸고, 우리 가족 살아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는지 몇몇 방송사에서 연락이 왔다. 애당초 아내는 방송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그 프로그램은 괜찮은 거잖아. 시청률도 엄청 높다던데. 그런 프로그램에 한번 나오면 민박 손님도 늘 거고."
살아오면서 텔레비전 맛을 봐온 나는 아내를 들쑤셨다. 우리 민박집이 텔레비전에 나오면 살아가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리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내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이 낯선 이와 함께 민박을 왔다. 저녁 밥상머리에서 술잔을 나누었고, 지인과 함께 우리 집을 찾은 이는 텔레비전 피디였고, 술이 거나해진 나는 출연 제의에 응해 버렸다. 그해 이른 봄 인간극장 ‘석봉씨의 봄’이 방영되었다. 얼추 여덟 해 전에 있었던 일이다.
ㅣ방송 출연 그후
그 방송이 있고부터 우리는 많은 일에 시달려야 했다. 날이 밝으면 낯선 이들이 문간을 기웃거렸다. 어떤 이는 허락도 없이 문간을 넘어 들어와 마당을 한 바퀴 돌아 나가기도 했다. 한동안은 그렇게 우리 삶을 엿보는 이들로 고단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원체 낡은 농가인 데다 방 3개가 고작이었던 터라 민박 손님이 크게 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간간이 낯선 이들이 찾아들었다. 전엔 주로 지인들이 찾았지만 방송 이후 고약한 성정을 가진 이들도 더러 만났다.
"여섯시 내고향 작가인데요. 선생님 사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연락드렸어요."
"MBC 작가인데요. 아는 사람이 추천을 하더라고요."
텔레비전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는 걸까. 이후 EBS '한국기행'이라는 프로그램에 한두 번 나온 뒤로 텔레비전 출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 마을도 몇 번 텔레비전에 나왔다. 가수 남진이 다녀가기도 했다. 유명한 밥상 프로그램도 다녀갔다. 그때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분주했다. 없는 앞치마도 준비하고, 이런저런 재료 준비하고, 얼굴에 분도 발랐다. 여럿이 하루 종일 시달렸지만 보상은 없다시피 했다. 출연료는 고사하고 준비물 값도 주지 않았다. 기껏 기념품을 주기도 하는데 그게 살림살이에 크게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마을 홍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 여기라는 촬영 팀의 귀띔에 이장 눈치 보며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장인이라고 별반 다르겠는가. 유명한 식당이라고 뭐가 다르겠는가. 이름난 마을이라고 또 뭐가 다르겠는가. 유명할수록 이름날수록 이것저것 뜯기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텔레비전은 권위요 권력이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나올 수밖에 없어 나오는 이들이 한둘이겠는가.
그래도 골목 끝에서 먹고살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은 한순간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만으로도 희망이겠지. 백종원의 골목식당이든, 최불암의 한국인의 밥상이든,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든, 여섯시 내고향이든 생생정보통이든 뭐든 텔레비전에 한 번 나왔으면 하는 기대를 안고 문을 여는 식당이 한둘이겠는가 말이지.
먹는 방송이 텔레비전을 점령한 이후 교양이고 예능이고 거의 모든 프로그램은 먹는 방송 일색이었다. 공중파, 지상파, 중앙방송, 지역방송 할 것 없이 장인을 찾아다니고, 마을을 찾아다니고, 식당을 찾아다닌다.
그러다 보니 읍내만 나가도 한 집 건너 한 집씩 방송에 나온 사진을 걸어놓고 자랑한다. 시장 골목에 들어서면 돼지국밥집과 어탕집 창문에 텔레비전에 나온 사진이 큼지막하게 붙었고, 목욕탕 앞 식당 창문엔 전국 노래자랑 송해씨와 식당 주인 내외가 찍은 사진이 커다랗게 붙어 있었다.
맛이 있거나 없거나 한동안은 손님이 들겠지. 텔레비전에 나왔으니까. 그러나 걸어놓은 사진은 빛이 바래고 손님은 줄지. 끝내 텔레비전이 싸질러놓은 허망한 꿈의 찌꺼기를 안고 쓴 입맛을 다시며 살아가게 되지. 한순간 신기루처럼, 서산 너머 지는 햇살에 얼비친 무지개처럼 잠시 눈앞을 어지럽히며 지나갈 뿐이지.
ㅣ방송에 나가 알리고 싶은 것
텔레비전이 헛것이라 여기면서도 나는 자꾸 텔레비전에 나가고 싶었다. 씨감자를 묻는 내 모습을, 청국장을 끓이는 아내의 모습을, 저녁 밥상머리에 둘러앉은 우리 가족의 단란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웃들과 골목 평상 그늘에 모여 도시에 사는 자식 걱정을 함께 나누고, 울력할 일거리를 함께 찾으며 막걸리잔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 살아가는 모습이 나쁘지 않은데 이걸 알리는 것도 좋은 일이잖아. 누가 알아? 우리 모습 보고 숨 막히는 도시를 탈출하겠다는 사람이 늘어날지."
방송사에서 프로그램 촬영 제의가 들어오면 나는 늘 이런 말로 아내를 구슬렸다.
그렇게 나는 우리 살아가는 모습을 자랑하고 싶었다. 다들 이리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조금 모자라고 조금 부족해도 가족과 이웃과 어울려 모자라는 것을 나누고, 부족한 것을 채워가며 사는 삶이 사람의 삶이라 여겼다. 세상이 아름다우려면 이리 사는 사람이 늘어나야 한다고 믿었다. 도시 과밀과 농촌 소멸의 위기 속에서 이리 살아도 행복하다는 것을, 이리 살아야 넉넉하다는 것을 세상에 전해주고 싶었다.
그것은 한 시절 환경운동가로 살아온 내가 어지러운 이 세상에 보내야 할 의무요 도리였다.
"우리 서하. 텔레비전에 나오고 싶어?"
오늘 저녁에도 텔레비전 앞에서 서하가 가늘게 목을 끄덕인다. 텔레비전과의 인연이 이리도 모질다.
[출처]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2021.12.12
/ 2022.04.18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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