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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희의 '환상의 미술관'] 관음증의 탄생.. 남편 폭정 막으려 알몸 활보한 고디바 부인 (2022.03.20)

푸레택 2022. 3. 20. 22:07

[유경희의 '환상의 미술관']관음증의 탄생..남편 폭정 막으려 알몸 활보한 고디바 부인 (daum.net)

 

[유경희의 '환상의 미술관']관음증의 탄생..남편 폭정 막으려 알몸 활보한 고디바 부인

화가들은 기본적으로 관음증자들이다. 시선(eye, look)을 던지면 그 시선이 되돌아오는 것을 응시(regard, gaze)라고 하는데, 시선만 있는 것이 관음증(voyeurism, scopophilia)이다. 내가 보기만 하는 것,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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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희의 '환상의 미술관'] 관음증의 탄생.. 남편 폭정 막으려 알몸 활보한 고디바 부인

화가들은 기본적으로 관음증자들이다.

시선(eye, look)을 던지면 그 시선이 되돌아오는 것을 응시(regard, gaze)라고 하는데, 시선만 있는 것이 관음증(voyeurism, scopophilia)이다. 내가 보기만 하는 것, 내가 보는 것을 모두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 이런 주체적 시각에서 쾌감을 얻는 것이 관음증이다. 그래서 관음증은 상대가 모르게 자기만의 상상계 속에서 환락의 나래를 펼치는 아주 위태로운 것이리라. 이것은 절도 행각을 이유로 죄가 된다. 왜 훔쳐보기가 죄가 되는가? 아마 시선으로 만지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관음증은 원초적 욕망이다. 인간(아이)이 최초로 훔쳐보고 싶은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성적 차이에 대한 것일까? “왜 아빠는 엄마 것이랑 달라?” 혹은 “왜 엄마는 아빠 것이랑 달라?”라고 질문하는 것 말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관음증적 경향은 성기를 보고 싶어 하는 구성 본능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정상적 성행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도착적 관음증은 강박적이며 만족을 모르는 욕구와 관련돼 있다. 이것은 심각한 불안, 죄책감 그리고 피학적 행동을 가져올 수 있다.

여기 관음증의 효시가 된 사건이 있다.

고디바 부인의 기도 랜드시어. 존 콜리어의 고디바 부인이 수치스러워 보인다면, 이 작품은 훨씬 당당한 모습이다.

관음증의 속어인 ‘피핑톰(Peeping Tom, Peeping Tomism)’을 만들어낸 전설적인 ‘고디바 부인’ 스토리다. 우리에겐 고디바 초콜릿으로 알려진 고디바는 11세기 중세의 영국, 워릭셔주 코벤트리(Coventry)시의 영주, 레오프릭 3세의 부인이다. 악독한 탐관오리였던 영주의 만행, 즉 과도한 세금 징수와 폭정에 시달린 백성들은 귀부인에게 찾아가 선처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했다. 기품 있는 데다 어진 심성을 가진 귀부인은 여러 차례 남편에게 호소했지만 꿈쩍도 안 한다. 그녀는 “세금을 내리지 않는다면 나체로 말을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한다. 영주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래, 시장 거리를 알몸으로 지나갈 수 있다면 그 청을 들어주겠다”고 말한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괴이한 제안을 한 것이다.

고민 끝에 귀부인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결국 지혜롭고 용감했던 여자는 발가벗고 동네를 나선다. 자신을 희생해 백성이 더 이상 불행하지 않다면, 그 희생을 기꺼이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영주의 아내는 다리 이외의 몸을 머리카락으로 감싸고 말을 탄 채, 이 신성한 순례를 실행하고야 만다. 온 백성은 감동했다. 부족한 것 없는 영주 부인이 비천하고 비루한 자신들의 안위를 지켜주기 위해 수치심과 모멸감을 무릅쓴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코벤트리 전 지역에 퍼지고, 기쁨에 찬 백성들은 그녀의 높은 뜻을 존중해 거사가 행해지는 날에는 어느 누구도 외출은 물론 바깥을 내다보지 않기로 약속한다. 마침내 거사가 진행되던 날, 지역민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집집마다 창문을 닫고 커튼을 내리고 문을 걸어 잠갔다. 그것은 고귀한 부인의 몸을 훔쳐볼 수 없다는 엄숙한 결의였다. 결국 부인은 해내고야 말았으며, 그녀의 용기 있는 행동에 놀라고 감동받은 남편은 세금을 경감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행복한 마을이 됐다.

이처럼 공동체를 위한 고디바 부인의 결정은 숭고했고, 지역 공동체는 또 다른 공동체적 윤리의식으로 그녀에게 보답했다. 훗날 ‘고다이버즘’은 관습과 상식을 깨는 정치 행동을 뜻하는 말이 됐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고디바 부인의 순례 때 누구도 그것을 보지 않겠다고 약속했건만, 꼭 금기를 어기는 자가 있기 마련. 누구였을까? 바로 재단사 톰이었다. 아마도 궁정 소속 패션디자이너였을 것이다. 그는 흠모하는 어린 영주부인의 옷을 만들 때마다 그녀의 몸을 직접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렇게 그는 관음증을 나타내는 속어인 피핑톰, 즉 ‘훔쳐보는 톰’ ‘엿보는 톰’이라는 말을 생겨나게 한 장본인이 됐다.

고디바 부인 존 콜리어, 1898년. 고디바 부인은 남편에게 백성에 대한 세금을 내려 달라는 뜻을 전하기 위해 알몸으로 말을 타고 거리에 나섰다.

훔쳐보던 톰은 어떻게 됐을까? 전설에 따르면, 그는 그만 천벌을 받아 눈이 멀었다고 한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는 대가치고는 너무 컸던 셈이다. 더군다나 아름다움을 가꾸는 재단사가 눈이 멀었으니 그는 산송장이나 마찬가지가 됐다.

영국 미술가들이 이 좋은 소재를 놓칠 리 없었다. 레이디 고디바를 소재로 그린 그림은 여러 점 있지만, 그중 제일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되는 그림이 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활동했던 신고전주의 화가 존 콜리어(1850~1944년)의 ‘고디바 부인(Lady Godiva, 1898년)’이다. 찰스 다윈이나 토마스 헉슬리 같은 당대 유명인을 그렸던 뛰어난 초상화가 존 콜리어는 엄격하고 균형 잡힌 구도와 명확한 윤곽을 중시했던 고전주의적 조형 방법으로 특유의 섬세하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기막히게 구현했다.

화면 전체를 차지하는 말과 붉은색 말안장에 앉아 있는 고디바 부인. 이 숭고한 신념을 가진 귀부인의 나이는 겨우 16살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직 인생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영주 부인의 몸은 아주 아담하고 순수하고 연약하게 그려졌다. 어쨌거나 육감적인 풍만한 여체가 아니어서인지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듯 훨씬 순결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탐스러운 머리카락과 손으로 몸을 가린 그녀는 수치심에 다소 몸을 떨고 있는 듯 보인다. 말을 덮고 있는 붉은 천은 그녀의 고귀한 신분과 희생정신을 북돋아주는 듯도 하다.

그리고 저 고요하다 못해 숨죽인 적막한 건물들을 보라. 그녀가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듯 시간이 멈춰져 있다. 그들 중에는 훔쳐보고 싶은 욕망을 이기지 못한 톰이 있었고, 그 욕망을 누르고 있는 또 다른 톰인 우리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톰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가? 지금 우리는 마음 놓고 더욱 뻔뻔스럽게 귀부인의 나체를 훔쳐보고 있지 않은가? 사실 정신분석학에서는 관음증도 승화되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쓰일 수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과학적 호기심이나 예술적 창조성으로 전환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만든 80년 전통의 고급 초콜릿 브랜드 ‘고디바’의 이름 또한 고디바 부인의 숭고한 정신에 경의를 표하며 지어진 것이다. 전설적인 스토리에는 민중의 바람이 깃들어 있는 법이다. 실제로 영국 잉글랜드 중부 지역에 위치한 코벤트리 대성당 앞에는 말을 탄 고디바 부인 동상이 서 있다. 이 도시는 해마다 그녀를 기리기 위한 고디바 축제를 개최한다.

유경희 미술평론가ㅣ매일경제 2016.06.27

/ 2022.03.20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