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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희의 힐링의 미술관] 사랑과 우정이 부딪칠 때… 평시엔 남편(모리스), 여름엔 남편친구(로제티)와 보낸 제인 (2022.03.12)

푸레택 2022. 3. 12. 15:19

[유경희의 ‘힐링의 미술관’] 사랑과 우정이 부딪칠 때…평시엔 남편(모리스), 여름엔 남편친구(로제티)와 보낸 제인 - 매일경제 (mk.co.kr)

 

[유경희의 ‘힐링의 미술관’] 사랑과 우정이 부딪칠 때…평시엔 남편(모리스), 여름엔 남편친구

요즘 재개봉된 영화 ‘쥴 앤 짐(프랑수아 트뤼포 감독, 1961년)’은 세 남녀 사이의 기묘한 사랑을 그린, 영화사의 빛나는 걸작이다. 한 여자가 절친인 두 남자와 모두 관계를 맺는다. 중요한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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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희의 힐링의 미술관] 사랑과 우정이 부딪칠 때… 평시엔 남편(모리스), 여름엔 남편친구(로제티)와 보낸 제인 

요즘 재개봉된 영화 ‘쥴 앤 짐(프랑수아 트뤼포 감독, 1961년)’은 세 남녀 사이의 기묘한 사랑을 그린, 영화사의 빛나는 걸작이다. 한 여자가 절친인 두 남자와 모두 관계를 맺는다. 중요한 건, 그렇다고 두 친구(둘 다 글을 쓰는 작가다)의 우정이 완전히 끝장나지는 않고 지속된다는 점이다. 게다가 첫 남편인 쥴은 아내의 불륜을 묵묵히 참아낸다. 진정 그녀 곁에 남아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한 여자를 두 남자가 공유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남자가 두 여자를 거느렸던 일이야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풍습이었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더 멀리 원시 모계사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 않을까?! 한 여자를 사랑한 예술가 남자들은 어떻게 사랑과 우정 사이를 조절했을까?

2009년 영국의 BBC에서 ‘Desperate Romantics’라는 드라마가 상영됐다. 19세기 빅토리아왕조 시대에 라파엘전파(르네상스 대표 화가인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화풍을 비판하고 자연을 섬세히 관찰해서 표현한 초기 르네상스와 중세 고딕시대 미술로 돌아가자는 주장) 작가들의 예술과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라파엘전파 집단의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와 윌리엄 모리스는 절친한 친구였다. 두 사람은 한 여자를 사랑했다. 제인 모리스. 1839년 마부의 딸로 태어나 극도의 빈곤 속에 성장한 그녀는 17세 때 우연히 라파엘전파의 화가들 눈에 띄어 모델 요청을 받는다. 특히 유복한 가문 자제로 옥스퍼드대 출신의 모리스는 제인을 스케치하다가 사랑에 빠진다. 그녀의 서늘한 침묵과 생각에 잠긴 아름다움에 매료된 것. 제인은 디자이너, 공예가, 시인, 사회주의 개혁가였던 모리스와 약혼한 뒤 상류층 부인이 되기 위한 교양과 매너 수업에 매진한다. 감각이 뛰어나 금세 귀부인의 자질을 갖추게 된 그녀는 남편이 운영하던 공예장식 사업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페르세포네(Proserpina)1874년, 런던 테이트갤러리,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친구의 부인 제인을 사랑한 로제티는 1년 중 4개월을 지하세계에서 살아야 했던 그리스 신화 속 페르세포네처럼 제인이 친구 부인으로서 잠시 동안 살고 있는 것으로 표현했다.

모리스는 결단성 있고 진지하며 성급하지만 좋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럼에도 부부 사이는 정서적 갈등으로 차츰 멀어져갔다. 평상시 제인의 외모를 예찬했던 로제티가 두 사람의 낌새를 눈치채고 끼어든다. 사실 제인의 외모는 당대 미의 기준과는 거리가 멀었다. 빅토리아왕조 시대에는 복숭아처럼 탐스럽고 앙증맞은 여자가 선호됐다. 그에 비해 제인은 투박하고 부담스러운 스타일이었다. 키가 크고 덩치도 컸으며, 짙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에 안색은 창백했다. 게다가 표정은 나른하고 침착하며 다소 우울한 분위기를 풍겼다. 예술가들은 늘 새로운 미의 기준을 찾아 나서는 존재들이었으니 그녀의 분위기가 기묘하게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시인이기도 했던 로제티는 그녀를 찬미하는 소네트(유럽의 정형시)를 줄기차게 써 보낸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미 라파엘전파에 전해졌고, 남편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모리스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다. 마음속은 흙탕물이었지만 선구적 지식인답게 자제력과 관용으로 수용했다. 제인은 남편의 동의 아래 두 딸과 함께 로제티와 여름철을 보내곤 했다. 로제티로서는 자신의 뮤즈(작가나 화가 등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를 공개적으로 찬미하고 형상화할 수 있는 꿈같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부적절한 관계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는 법. 1876년 이후 제인과 로제티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된다. 로제티는 전 부인의 죽음에서 받은 상처로 심한 신경쇠약에 시달려, 마취성이 강한 최면제에 빠져 지내게 된다. 제인 역시 딸의 건강 악화로 간호해야 할 처지에 놓였고, 남편 모리스와의 관계도 일부 회복된다.

당대의 바람둥이 로제티의 작품 속에서 제인은 매우 고혹적인 모습으로 현신한다. ‘페르세포네’는 제인을 그린 작품 중 으뜸이다. 그리스 신화 속 페르세포네는 농업과 계절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이다. 페르세포네에게 반한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는 그녀를 납치했고, 이에 격분한 데메테르는 딸을 돌려주지 않으면 곡물이 자라지 못하게 하겠다고 협박한다. 결국 페르세포네가 잡혀 있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풀어주겠다는 조건으로 협상이 성사됐다. 그러나 페르세포네는 애석하게도 석류씨 네 개를 먹어 매년 넉 달 동안을 하데스의 신부로서 지하세계에 머물러야만 했다.

로제티는 이 신화를 자신의 상황과 동일시했다. 페르세포네가 지하세계에 갇혀 있는 시간을 제인이 남편과 보내는 시간에 비유했다. 로제티는 자신과 남편 사이에서 어쩌지 못하는 제인의 우유부단한 심리 상태를 한 손으로는 석류를 입으로 가져가고 있고, 다른 한 손으로 이를 저지하는 페르세포네를 통해 그려낸다. 이렇게 시와 그림으로 사랑을 보여준 로제티를 제인은 마음속 깊이 연인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진짜 사랑은 남편의 친구와 나누고, 결혼 생활은 자신을 여전히 매혹적으로 생각하는 남편과 유지했던 것은 아닐까. ‘절친’이었던 로제티와 모리스는 제인을 두고 경쟁했지만, 결국 우정까지 파탄 나지는 않았다.

‘블랙 브라운슈바이커(브라운슈바이크의 기병대)’, 캔버스에 유화, 영국 리버풀 레이디레버미술관, 존 에버렛 밀레이. 밀레이는 친구의 부인 에피가 친구와 자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문고리를 잡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사랑으로 인해 우정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던 또 다른 라파엘전파 화가들이 있다. 존 러스킨과 존 에버렛 밀레이가 그들이다. 당대 사회비평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존 러스킨은 라파엘전파의 이론적 수장이었다. 그는 탁월한 재능을 가졌지만 혹독한 비난을 받고 있던 밀레이를 위해 호평 기사를 두 번씩이나 신문에 게재한다. 밀레이가 러스킨에게 감사 편지를 쓴 것이 계기가 돼 저녁식사에 초대받는다. 그때 밀레이는 러스킨의 아내 에피 그레이를 보고 반해 모델을 청한다. 물론 러스킨의 허락 아래 모델을 서게 됐고, 그림을 가르쳐주고 가족 동반 여행을 함께 떠날 만큼 친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밀레이는 에피로부터 결혼 6년 동안 육체관계가 없었다는 고백을 듣게 된다. 행복한 부부인 척했지만, 에피의 우울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소심하고 논리적인 러스킨은 아이를 갖는 것도 싫지만, 아내의 건강이 상할까봐 두렵다는 핑계를 댔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러스킨의 성에 대한 병리학적 이유 때문이었다. 성교 시 그녀의 체모를 보게 될까봐 두려웠던 것. 자신이 그동안 찬탄해 마지않았던 우아한 고대 그리스로마 조각과 달리 체모가 있는 아내의 성기를 보는 것이 실망스러울 뿐 아니라 낯선 체험이었다는 고백이다.

어쨌거나 밀레이와 에피는 이런 은밀한 소통을 시작했을 만큼 사랑이 싹텄던 듯하다. 사랑을 고백하고 편지를 보내지만 화답을 받지 못한 밀레이는 에피의 집으로 가 청혼한다. 에피는 승낙하고 결혼 무효소송을 낸다. 에피와 이혼한 러스킨은 전처와 친구의 결혼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혼했고, 러스킨은 절망했다. 초창기 어려운 시절 자신을 도왔던 러스킨을 배반한 밀레이. 그는 결국 라파엘전파를 탈퇴했다. 이후 밀레이와 에피는 4남 4녀를 낳았고, 40년을 해후했다.

밀레이의 그림 ‘블랙 브라운슈바이커(브라운 슈바이크의 기병대)’는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병사의 귀환을 그린 작품이다. 그는 이 그림을 통해 에피와 자신의 관계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 속 패잔병으로서의 밀레이는 남자끼리의 전쟁에서 패하는 것, 즉 우정을 저버릴 각오가 돼 있음을 의미한다. 에피를 사랑하면서 이미 러스킨과의 우정은 물 건너갔다는 선언이다. 남자는 문을 열려 하고 여자는 문고리를 잡고 있어, 여전히 남자를 받아들이는 걸 망설이는 듯 보인다. 이런 갈등과 고민은 두 사람의 결합으로 해소됐지만, 우정은 끝장났다.

글=유경희 미술평론가ㅣ매경이코노미 2016.04.04

/ 2022.03.12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