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인생] 가곡 가요 동요 찬송가

[박성서 칼럼] 6.25 한국전쟁 70주년 특집: 전시 수도 ‘부산의 가요, 가요 속에 나타난 부산’

푸레택 2022. 3. 9. 10:39

뉴스메이커 (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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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6.25 한국전쟁 70주년 특집/전시 수도 ‘부산의 가요, 가요 속에 나타난 부산’[1] ‘굳세어라 금순아’에서 ‘이별의 부산정거장’까지 부산은 도시 천체가 노래 소재로 더없이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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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6.25 한국전쟁 70주년 특집/전시 수도 ‘부산의 가요, 가요 속에 나타난 부산’

‘굳세어라 금순아’에서 ‘이별의 부산정거장’까지

전시 수도이자 당시 우리나라 음악의 산실이었던 부산의 대중가요 활동은 우리나라 대중음악, 그 자체였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대한민국 가요의 맥을 이었던 것이다 이후 부산은 우리나라 제2도시로 면모를 갖춘다. 부산을 소재로 하여 전 국민에게 애창됐던 노래들을 살펴보며 부산의 가요, 가요 속에 나타난 부산, 부산사람의 모습을 살펴본다. 그 첫 번 째.

글 l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피난시절, 부산KBS 경음악단 지휘를 맡았던 작곡가 이재호와 가수 백난아

필자는 부산, 부산노래에 대한 애착이 큰 편이다. 부산MBC 라디오 ‘추억의 노래세상’에서 ‘박성서의 음악파일’을 매주 금요일마다 10년 넘게 진행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의 방송은 부산KBS TV의 ‘토크쇼, 가요1번지’, 그리고 WBS-FM 원음방송의 ‘박성서의 뮤레카’로 이어졌다. 근 20년을 함께 한 셈이다.


나름대로 시간과 거리를 감수하며 얻은 결과이기에 이따금씩 스스로 대견스럽기도 하지만 특히 부산MBC 프로그램에 대한 개인적인 의미가 각별한 것은 무엇보다 ‘대중음악평론가’로서 제2의 삶, 터닝 포인트’가 되어주었다는 점이다.

다소 난해한 부산사투리의 90% 이상 알아듣는 수준이 된 이즈음에서 그동안 방송을 준비하면서 프로그램 관계자 그리고 애청자들과 함께 찾아본 부산노래 이야기를 중심으로 부산노래여행을 떠나본다. 특히 올해 6.25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시수도 부산가요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한때 ‘부산에서 히트해야 서울서도 히트한다’ 는 말까지 생겨나

부산시민들이 ‘야구’ 못지않게 좋아하는 것이 바로 ‘노래’ 아닐까, 여겨질 정도로 부산은 노래와 잘 어울리는 도시다. 그동안 만나본 시민들 중에는 전문가 이상의 식견을 가진 애호가들도 많았고 또한 부산 관련노래가 전국적으로 가장 많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이들도 의외로 많았다. 심지어 서울보다도 많을 것으로 여기는 이들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실제로 부산을 테마로 만들어지고 불린 노래들은 수없이 많다. 또한 이 노래들을 살펴보면 제각각 그 시대를 대표하며 당시 사회상을 그대로 반영해왔다. 그렇듯 우리 대중음악사에 차지하는 부산노래가 차지하는 위상은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다.

특히 6.25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임시수도의 역할까지 담당했던 부산은 당시 피난민들의 제2의 삶의 터전이 되어주었다. 그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 시절 노래들은 우리 대중가요 속에서 ‘또 하나의 고향노래’로 깊이 각인되었다. 또한 일 년 내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즐비한 명소들은 노래의 훌륭한 소재가 된 동시에 또다시 대중들로부터 애창되면서 더더욱 전국적인 명소로 거듭났다.

이렇듯 부산은 우리 대중가요에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력이 무척 크다. 한국전쟁 당시 임시수도 부산은 당시 우리나라 문화의 중심지였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피난 내려온 많은 음악가들이 서로 가까이서 음악을 만들고 음반을 취입하고, 공연하는 메카로 자리했다.

1950년대 우리나라 음반시장은 최악의 침체기였지만 부산 가요계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특히 기존의 코로나레코드사와 태평레코드 외에 도미도, 미도파 등의 음반사가 부산에서 활동을 시작해 우리나라 가요의 맥을 이어주었다. 휴전 이후에는 가요계를 양분해 떠맡는 메이저음반사로 자리매김 되었다. 또한 김흥산은 부산 피난시절 제물포악기점을 차려 피난 음악인들의 사랑방을 제공했으며, 손영준과 합자해 스타레코드사를 설립, 운영했다.

전쟁가요의 못자리, 군가 및 민요 현상모집

1950년 9월, 경상남도비상사태위원회가 국방부 정훈국과 함께 조국통일을 내용으로 한 ‘백두산행진곡’의 가사를 현상모집한데 이어 10월에는 국방부정훈국이 ‘군가, 민요현상모집’을 했다. 입성가(入城歌), 출정군인가, 멸공승리가(滅共勝利歌)를 비롯해 삼팔선을 주제로 한 군가 가사를 모집했는데, 입상자에게는 12만원의 현상금과 부상이 수여되었다. 국민개창운동의 일환으로 한 이 군가 가사 모집을 통해 이듬해 1951년에는 ‘상이병의 노래’, ‘삼천만의 봄’ 등이 탄생했다.


또한 당시 정부는 국군과 국민들의 전의를 북돋우기 위해 1951년에는 ‘중공격멸의 노래’를 제정, 일간지 지면에 이 노래의 악보를 게재케 함으로써 보급을 장려했다. 2절로 된 이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1. 통일독립 되려는 우리 국민의 침략자 중공 오랑캐/떼가 징치고 피리 불며 밀려 나려왔네/아 대한의 아들딸들아 일어나거라/조국의 한 치 땅도 더러운 발아래 짓밟힐까 보냐/무찌르자 쳐부수자 중공 오랑캐.

2. 자유평등 지켜온 금수강산에 소련 앞잡이/오랑캐 떼가 굶주린 늑대처럼 밀려 나려왔네/아 대한의 아들딸들아 일어나거라/동포의 한사람도 추악한 창살에 희생될까 보냐/무찌르자 쳐부수자 중공 오랑캐.

이어 1952년, 삼일절 33주년을 맞아 결의문 ‘우리의 맹서’와 ‘통일행진곡’을 각각 제정, 의식이 있을 때마다 공식적으로 낭독과 가창을 의무화했다. 당시 ‘우리의 맹서’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
2. 우리는 강철같이 단결하여 공산침략자들은 쳐부수자.
3. 우리는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

또한 이때 함께 제정된 노래,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 나라’로 시작되는  ‘통일행진곡’을 널리 보급시키기 위해 1952년 2월 25일부터 29일까지 매일 저녁 라디오를 통해 가창 지도방송을 실시했다.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 나라/공산오랑캐들 침략을 받아 자유의 인민들 피를 흘린다/살거나 죽거나 이 땅의 겨레 무찌르고 넘어선 용사와 함께/이북은 부른다 눈물의 강토 이북은 부른다 눈물의 강토/민주통일독립을 싸와서 찾자/(후렴) 동포여 일어나자 나라를 위해 손잡고 백두산에 태극기 날리자/동포여 일어나자 나라를 위해 손잡고 백두산에 태극기 날리자’ -‘통일행진곡’

이렇듯 부산에서 새로운 군가와 전쟁가요가 연일 쏟아져 나오는 때에 발맞추어 부산지역 신문사들은 ‘음반 헌납운동’을 대규모로 펼쳤다. 노래를 현대전의 중요한 무기로 인식한 언론은 전파를 통한 ‘승전(勝戰)’을 목표로 일반 대중들로부터 음반을 기증 받아 방송국으로 보내 방송케 함으로써 국군의 사기와 국민들의 전의를 고취시켰다.

더 많은 노래와 가수들이 필요, 신인가수선발 콩쿠르 활발

노래 보급의 활성화와 부산 레코드 산업의 활성화와 함께 신인가수모집 콩쿠르도 점차 성황을 이뤘다. 각 음반사와 악극단 등이 주축이 되어 주최한 이 등용문을 통해 신인가수들이 속속 배출되어 취입과 함께 무대로 진출했다.


1951년 8월, 부산극장에서 전국남녀신인가수 콩쿠르가 열렸다. 남인수, 김정구, 이인권, 이예성, 이난영, 백난아, 신카나리아, 황정자 등 당대 인기가수들의 공연도 함께 곁들인 이 대회에서는 자유곡과 함께 지정곡 한 곡을 반드시 불러야 했다. 이때 지정곡은 ‘자유의 종’, ‘전우야 잘자라’였고 심사위원은 작곡가 손목인 등이 맡았다.

1952년 4월, 상이장병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열린 남녀가수 콩쿠르의 지정곡 역시 ‘전우야 잘자라’와 ‘자유의 종’, 그리고 ‘통일행진곡’이었다. 출연 신청자의 참가 열기는 물론 구경하려는 부산시민들의 열기로 피난지 수도, 항도 부산이 출렁거렸다.

1953년 11월 은영극장에서 개최된 신태평레코드 문예부 주최 전속가수모집에서는 당선자에게 상장과 부상을 수여함은 물론 부산방송국 및 신태평레코드의 전속가수로 채용되는 기회를 부여했다. 남자부와 여자부로 나눠 치러진 이 콩쿠르에서 남성 참가자의 지정곡은 ‘물방아 도는 내력’, ‘굳세어라 금순아’, ‘무영탑 사랑’, ‘마음의 고향’, ‘전선야곡’, ‘인도의 향불’, ‘추야장 향수(秋夜長 鄕愁)’ 등이었고,  여성 참가자의 경우는 ‘임 계선 전선’, ‘여인애가’, ‘청춘 블루스’, ‘아내의 노래’ 등이 지정곡으로 주어졌다. 이 대회의 심사는 작곡가 이재호, 작사가 손로원이었다.

그런가하면 문화극장 옆에 있었던 코로나레코드사의 간이취입소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음반 취입을 대행해 주기도 했다. 성악, 기악, 유언, 훈화, 육성편지, 연설 등을 취입해주는 비용은 양면 각 3분 30초의 한 매 당 2만원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피난지에서 꽃피운 악극과 가극, 국민들의 슬픔을 달래다

아울러 피난시절 부산에서는 각종 공연과 연주회가 활발하게 펼쳐졌다. 당시 납북된 작곡가 김해송이 이끌던 KPK악단을 새롭게 이름 바꾼 김해송악단을 비롯해 대도회악극단, 무궁화가극단, 반도악극단, 백조가극단, 창공가극단, K.A.S(육군 군예대), 프린스악극단, 현대가극단, 호화선악극단, 희망가극단 외에도 10여 개 단체의 극단이 활동했다. 또한 육군정훈악대, 해군정훈악대, 육군교향악단, 국립경찰취주악대 등을 비롯해 미군악대의 연주활동도 두드러졌다. 이들은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부산시민과 피난민들, 상이군인들을 비롯해 UN군 위문공연도 활발히 펼쳐져 당시 부산극장, 부민관, 동아극장, 삼일극장, 남도극장 등의 공연장에는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 공연 형태는 1부 악극, 2부 버라이어티 공연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악극단원은 물론 많은 가수들이 공연에 참여했다. 이러한 공연은 일 년 내내 끊이지 않았고 부산을 비롯해 마산, 진해, 대구 등과 광주, 전주, 이리, 대전 등으로 이어졌다. 피난시절, 부산에서 펼쳐졌던 공연기록을 살펴보자.

‘눈물의 여왕’이라 불리는 배우 전옥이 이끌던 백조가극단은 1.4후퇴 때 부산으로 무대를 옮긴다. 1951년 3월5일 ‘최후의 밤(동아극장)을 시작으로 ‘어머니의 힘(동아극장)’, ‘잘 있거라 부산항(부산극장)’, ‘불사조(동아극장)’를 공연했다. 가수 백년설이 출연했고 윤부길의 코미디쇼 ‘요절복통 춘향전’도 곁들였다. 당시 백조가극단에는 전옥, 고복수, 윤부길, 황금심, 고향선 등이 특별 출연했다. 대표작 ‘눈 내리는 밤’에는 윤부길, 황금심, 고복수, 고향선, 송달협이 특별 출연하였고 그해 6월에 열린 ‘성웅 이순신’에는 남인수, 김정구, 송달협, 현인, 박단마, 신카나리아, 장세정, 이난영 등이 출연했다.

박노홍이 조직한 현대가극단은 1951년 3월, ‘두 남매(이사라 원작, 박시춘, 황문평 작곡)’를 무대에 올린데 이어 3월, ‘사라있는 사나히(살아있는 사나이)’, 8월에는 탐정악극 ‘그림자(부산극장)’를 공연했다. 김내성 원작, 황문평 작곡의 이 작품에는 이난영, 신카나리아, 김정구 등이 출연했다.

은방울악극단은 1951년 7월, 동아극장에서 박시춘, 신카나리아, 남인수 주연으로 ‘송아지 우는 마을’을 공연했고 1952년 1월에는 박시춘악극단과 함께 ‘내가 기다리는 사람’을 무대에 올렸다. 아울러 10월 부산극장에서 열린 ‘등잔불사랑’, ‘별 삼형제’에는 현인, 신카나리아, 황정자, 박단마, 김백희가 출연했다. ‘등잔불사랑’의 주제가는 오리엔트레코드사를 통해 황정자가 취입했다.

김해송악단은 작곡가 김해송이 이끌던 KPK악단의 후신으로 그가 납북된 뒤 가수 이난영에 의해 운영되었다. 1951년 5월에 가극 ‘모란공주’를 무대에 올렸는데 이때 신문광고에 ‘가요계의 큰 별, 현인 특별출연’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10월에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11월에는 그랜드쇼 ‘춘희’, 12월에 크리스마스 기념 음악시극 ‘컬멘환상곡’을 공연했다.

1951년 5월, 동아극장에서 창립공연 ‘마음의 정화’ 공연을 가진 창공가극단은 황문평 작곡, 허남진 연출의 ‘복수(復讐)’에 이어 1953년, ‘다섯 아가씨’를 백난아 특별출연으로 동아극장에서 공연했다.

영화감독 김화랑·가수 신카나리아 부부가 설립한 ‘호화선악극단’은 1953년 부산극장에서 ‘굳세어라 금순아’를 무대에 올린다. 흥남부두에 피난 내려온 주인공역은 황해가 맡았다. 같은 처지의 피난민들이 극장에 몰려 대성황을 이룬 이 공연에는 주선태, 전칠성, 왕숙랑, 백설희 등이 출연했다. 또한 1953년 신카나리아, 박옥초 주연으로 악극 ‘눈 나리는 마을’을 부산극장에서 공연했다.

그밖에 부산극장에서 막을 올린 프린스가극단의 ‘아라비안나이트’에는 김정구와 이예성이, 남국성악단의 음악극 ‘향수의 가희’에서는 토미악단과 함께 당시 최고의 라이벌인 남인수와 현인이 함께 무대에 올라 노래 대결을 펼쳤다. KAS악극단은 1952년 1월 부산극장에서 ‘우리들의 합창’을 공연했는데 이종철, 황정자, 황해, 백년설이 특별 출연했다. 또한 1952년 무대에 올린 ‘탈육도(脫陸島)의 비밀’에는 박시춘, 백년설, 최남용. 황정자가 무대에 올랐다.

피난통에도 대한민국 가요의 맥을 잇다

다소 역설적이지만 부산의 대중음악은 전쟁으로 인해 더욱 꽃을 피웠다. 동시에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대중문화의 맥을 이어갔다는 점에서 부산은 우리 대중문화에 있어 매우 소중한 곳이다. 한 시대를 읽는 문화가, 그 숨결이 담겨진 도시인 것이다. 공연과 함께 음반 취입도 활발했다.


앞서 잠시 거론했듯 1950년대 우리나라 음반시장은 최악의 침체기였지만 부산 가요계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기존의 코로나레코드사 외에 도미도와 미도파 등이 피난시절 부산에서 탄생했다.

도미도는 ‘빈대떡 신사’, ‘엽전 열닷냥’의 가수 한복남이 부산으로 피난 와서 설립한 음반사다. 평안남도 안주에서 출생한 그는 처음 국제시장에서 축음기 부속품과 바늘장사를 시작했다. 이때 미군부대에서 나온 마그네틱 테입과 녹음기를 구해 부산 아미동 동사무소를 빌려 음반을 제작한다. 이전까지는 아스테트, 즉 원판에 직접 소리의 파장을 기록해 제작하는 방식이었지만 마그네틱 테입은 몇 번이고 다시 녹음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로써는 마법에 가까운 신기한 기계였다.

‘꿈에 본 내 고향(한정무)’, ‘물방아 도는 내력(박재홍)’, ‘한강(심연옥)’, ‘백마강(허민)’, ‘페르샤 왕자(허민)’, 그리고 휴전 이후에 ‘홍콩아가씨(금사향)’, ‘한 많은 대동강(손인호)’, ‘에레나가 된 순이(한정무)’, ‘오동동 타령(황정자)’, ‘앵두나무처녀(김정애)’ 같은 노래들이 도미도를 통해 탄생했다.

미도파레코드사 역시 이북에서 피난 내려온 임정수, 김능억에 의해 남부민동에서 설립된 회사다. ‘경상도아가씨(박재홍)’, ‘아네모네 탄식(송민도-백진주)’, ‘향수(박재홍)’에 이어 ‘향기품은 군사우편(유춘산)’, ‘추억의 소야곡(남인수)’, ‘부산행진곡(방운아)’, 그리고 60년대 들어 ‘동백아가씨(이미자)’가 크게 히트하면서 미도파는 임정수의 지구레코드와 김능억의 그랜드레코드사로 분리된다. 이 미도파가 바로 우리나라 최대 음반사인 지구레코드의 전신이다.

너나없이 힘들던 시절이었던 만큼 국민들을 독려하고 힘이 되어줄 노래가 더더욱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무엇보다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와 치유를, 그리고 희망을 갖게 했다. 실제로 전쟁 당시 많은 전쟁가요와 군가가 만들어져 전방과 후방에 울려 퍼졌다. ‘좋은 전쟁가요는 대포소리에도 지지 않는 예술적 무기’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이 노래들은 전쟁으로 상처 입은 국민들에게 힘과 용기, 희망을 심어주었다. 바로 이러한 노래들이 있어서 우리 국민들은 그 힘든 시기를 견뎌낼 수 있었다. (계속)

[참고 자료] ‘한국전쟁과 대중가요, 기록과 증언전(展)’ 도록(부산 40계단문화관, 2007년), 단행본 ‘한국전쟁과 대중가요, 기록과 증언(책이 있는 풍경, 박성서, 2010년)’

글=박성서 음악평론가ㅣ뉴스메이커 2020.09.09

/ 20220.03.09 옮겨 적음

https://youtu.be/gh3Z5CkS8A0

https://youtu.be/AO6ST_fJkD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