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준한 월악이 어머니의 품.. 슬픈 공주 꼬옥 안았다 [자박자박 소읍탐방] (daum.net)
[자박자박 소읍탐방] 제천 한수면 월악산과 송계계곡
제천에 한수면이라는 곳이 있다. 험준한 월악산 골짜기에 통째로 안긴 지형이라 인구는 시에서 가장 적다. 고산에서 흐르는 계곡물이 차가워 ‘한수’라 이름했겠거니 여겼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기호학파의 적통을 잇는 권상하(1641~1721)의 호 ‘한수재(寒水齋)’에서 따왔다고 한다. 스승인 송시열이 지어준 이름이다. 소백산에서 속리산으로 연결되는 백두대간의 중간에 위치한 월악산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악산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가장 높은 영봉(1,097m)을 비롯해 만수봉, 금수산, 신선봉, 도락산 등 20여 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를 거느리고 있는데, 기암절벽이 치솟아 예로부터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 왔다.
덕주공주와 마의태자 남매의 애틋함 새긴 마애불
우락부락 근육질의 거대한 암벽이 하늘을 찌를 듯한데도 불구하고, 월악산은 ‘여성의 산’으로 불린다. 영봉을 중심으로 이어진 산 능선이 동남쪽에서 보면 여성의 풍만한 가슴과 닮았고, 북측 청풍호반 케이블카에서 보면 험준한 바위 능선이 갸름한 얼굴과 부드러운 가슴 굴곡으로 연결된다고 한다. 서쪽 한수면 소재지에서 본 모습은 아기를 품고 누워 있는 형상에 비유한다.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해석이지만, 월악산 영봉은 오랫동안 다산과 풍요로움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여기에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첫째 딸 덕주공주와 관련한 이야기까지 더해져 어머니의 품에 비유하기도 한다. 한수면 소재지 인근 덕주골 코스를 따라 약 2.6㎞를 올라가면 해발 570m 지점 산 중턱에 덕주사 마애불이 있다.
월악산 중턱의 덕주사 마애불. 인근 충주 수안보면 미륵대원의 미륵불과 마주 보고 있어 덕주공주와 마의태자 남매의 애틋함이 서린 불상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거대한 화강암에 조각한 불상의 높이가 13m나 된다. 얼굴 부분은 도드라지지만 신체를 표현한 선은 상대적으로 희미하다. 부처의 지혜로 여겨지는 머리 위 육계(인도식 머리 상투)는 별도의 조각으로 몸돌 위에 얹혀 있다. 얼굴을 과장되게 표현하고 하체로 내려갈수록 간략해진 조형 수법, 입체감이 거의 없는 평면적인 신체 등은 거대한 불상 조성이 유행했던 고려 초기의 특징을 담고 있다.
마애불 앞 덕주사는 바로 덕주공주가 머물렀던 곳이다. 왕건이 신라를 합병하면서 가뒀다고 전해지지만 확실치는 않다. 더불어 왕건은 공주의 동생 마의태자를 충주 미륵사(미륵대원)에 감금했다고 한다. 직선으로 약 5.5㎞ 떨어진 곳이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만날 수 없었던 남매는 불심으로 혈육의 정을 나누었다. 덕주공주는 동생을 그리며 남쪽 방향으로 마애불을 조각했고, 마의태자는 누이를 걱정하며 북쪽 방향으로 미륵불을 세웠다. 두 불상은 정확하게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나라 잃은 남매의 애틋한 혈육지정이 이야기 소재로 더없이 좋은 조건을 갖췄다.
덕주사는 1951년 한국전쟁 중 작전상의 이유로 소각됐고, 지금은 대웅보전과 스님의 처소만 갖춘 산중의 작은 절이다. 이곳으로 올라오는 계곡 초입에 같은 이름의 절이 하나 더 있다. 역시 한국전쟁 중 소실된 것을 근래에 복원했다. 그래서 위의 절을 상덕주사, 아래의 절을 하덕주사라고도 부른다.
하덕주사에서 상덕주사로 오르는 등산로 중간쯤에 덕주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덕주사 극락보전 처마에서 빗물이 쏟아지고 있다. 요란한 빗소리가 모든 소음을 삼켜 오히려 고요하다.
하덕주사에서 상덕주사까지는 약 1.7㎞, 슬근슬근 걸어 40분가량 걸린다. 등산로가 잘 정비돼 있지만 계단이 많고, 끊임없이 오르막이라 한여름에 오르자면 땀을 좀 흘려야 한다. 대신 계곡을 따라 물소리가 청량하고 나무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소나기 예보가 있었던 지난 15일 덕주사 계곡을 걸었다. 상덕주사에 닿을 때쯤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이 순식간에 빗줄기가 돼서 쏟아졌다. 대웅전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계곡 아래서부터 스멀스멀 구름이 기어오른다. 맞은편 산 능선과 코앞의 마애불까지 구름 속에 갇혔다 벗어나기를 반복한다. 대자연은 무궁무진한 변화에 휩싸이는데, 방문객 없는 절간은 한없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새로운 군주에 의해 강제로 유폐됐든, 나라 잃은 비운에 제 발로 숨어들었든, 덕주공주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듯 푸근한 위안을 받았을 듯하다. 미륵사에 머물던 마의태자는 권토중래를 다짐하며 금강산(혹은 오대산)으로 떠났지만, 덕주공주는 8년간 덕주사에 머물다 입적했다.
험준한 월악산 중턱에 자리 잡은 덕주사와 마애불. 이곳부터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된다. 단련된 몸이 아니면 무더위 속 산행은 엄두를 내기 어렵다.
마애불 바로 옆 바위틈에는 ‘감로수’라 이름한 샘물이 솟고 있다. 더위와 갈증을 씻을 정도로 시원하고 이름처럼 물맛이 달다. 영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이곳부터 가파른 암벽으로 이어진다. 지금까지의 등산은 몸풀기 수준에 불과하다. 아무리 경치가 좋다 해도 함부로 오를 엄두를 내지 못한다. 등산으로 단련된 몸이 아니라면, 이 삼복더위에 차마 권하기 어렵다.
월악산 자락에는 덕주사 말고도 산사의 평화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작고 조용한 절간이 여럿 있다. 덕주사에서 월악산 반대편 산자락에는 신륵사가 있다. 이곳도 등산로 입구지만 덕주사 코스에 비하면 찾는 이가 많지 않다. 나만을 위해 숨겨놓은 비밀의 공간처럼 고요하다. 색 바랜 극락전 전각 앞에 당간지주 한 쌍이 남아 있고, 텅 빈 마당에 3층 석탑만 덩그러니 서 있다.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고려 전기의 탑이다. 무게중심을 잡는 상층부 찰주에는 4개의 원반형 석재가 꽂혀 있다. 부드러운 곡선 장식 뒤로 우람한 월악산 능선이 묘하게 대비된다.
신륵사 마당에 홀로 선 석탑 뒤로 월악산의 험준한 능선이 겹친다. 신륵사는 등반객도 거의 들르지 않는 한적한 절이다.
보덕암 극락전 지붕이 잡풀과 이끼에 덮여 있다. 자연스러움이 위안을 주는 작은 절간이다.
보덕암 뒤편 보덕굴에서 보는 월악산 자락 풍광. 겨울에는 역고드름 현상으로 주목받는 곳이다.
인근의 보덕암은 절간보다 뒤편 석굴로 더 유명하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석굴 천장에서 끊임없이 물이 떨어져 겨울이면 바닥에서 석순처럼 고드름이 자란다. 여름이면 바깥으로 푸른 산자락이 펼쳐진다. 어두운 굴속에서 잠시나마 무더위를 식힐 수 있다. 전각 기와지붕에는 이끼와 풀이 잔뜩 덮여 있다. 산사의 자연스러움이 더없이 푸근하다. 절 마당에서는 충주호(청풍호) 귀퉁이의 푸른 물줄기가 잔잔하게 걸린다.
덕주사 인근의 빈신사지에는 빈 절터에 석탑 하나만 남아 있다. 고려 시대 것으로 2층 기단에 4층으로 지붕 돌을 얹은 모습이지만, 정식 명칭은 사자빈신사지 구층석탑이다. 아래 기단에 있는 글을 통해 원래 9층이었음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탑신을 받치고 있는 네 마리 사자 안에는 특이하게도 두건을 쓴 불상이 들어앉았다. 언뜻 몽골이나 아랍에서 온 스님처럼 보인다. 곡선으로 묶은 두건 매듭까지 유려하게 표현한 조각이 예술이다. 머나먼 이국땅에 믿음을 설파하러 온 고승의 모습까지 더해 폐사지 특유의 쓸쓸함과 고즈넉함이 함께 전해진다.
사자빈신사지 구층석탑 안에 있는 불상의 뒷모습. 리본 매듭까지 정교하게 조각했다.
ㅣ깊은 골짜기서 내려온 차가운 계곡물
월악산의 가파른 산자락에서 흘러내린 물은 여러 곳에 맑고 차가운 계곡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곳이 능선 서쪽 송계계곡과 동쪽 용하계곡이다. 아쉽게도 용하계곡은 자연휴식년제로 전 구간 출입이 금지된 상태다.
송계계곡 역시 국립공원 관리 구역이어서 몇몇 곳에서만 계곡에 들어갈 수 있다. 대표적인 곳은 한수면 소재지 앞 ‘자연대’다. 송계구곡의 하나로, 자연 그대로 아름답다고 하여 붙은 명칭이다. 넓지도 깊지도 않은 계곡 가장자리로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물놀이하기에 적당하다. 상류 팔랑소는 송계구곡에서 최고의 절경으로 꼽힌다. 계곡물이 바위를 미끄러지며 깊고 얕은 8개의 소를 형성한 곳으로, 하늘나라의 여덟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물웅덩이가 파인 경사진 바위 지대는 안전을 위해 출입이 금지돼 있고, 바로 위 얕은 물에서 몸을 적시는 것만 가능하다. 이외에 송계구곡으로 수경대·망폭대·학소대·월광폭포 등이 있는데, 일부는 출입이 금지된 곳에 있어 그 절경을 확인하기 어렵다.
월악산 송계계곡에서 가족 여행객이 더위를 식히고 있다. 물이 얕아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계곡이다.
월악산 송계계곡 자연대 부근 풍경. 물이 얕아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계곡이다.
계곡 주변에는 덕주산성의 흔적도 남아 있다. 송계계곡은 문경에서 하늘재(계립령)을 넘어 남한강으로 통하는 가장 짧은 길목이어서 오래전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다. 통일신라 시대에 처음 쌓은 덕주산성은 이 길목을 차단하는 성이다. 대체로 험준한 자연 지형을 그대로 활용했지만, 돌로 쌓은 성벽만 9.8㎞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큰 성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조선 시대에 세운 남ㆍ동ㆍ북 3개 성문을 복원해 놓았다. 덕주사 가는 길에 학소대와 동문을 함께 볼 수 있고, 송계계곡 망폭대 옆에 남문이 있다. 곡선의 성문 사이로 월악산 바위 능선이 까마득하게 올려다 보인다.
근래에 복원한 덕주산성 남문 사이로 월악산 바위 능선이 보인다.
제천 최북단 백운산 자락의 덕동계곡은 지역 주민들이 주로 찾는 피서 명소다.
제천 남쪽에 송계계곡이 있다면 북쪽에는 덕동계곡이 있다. 월악산 다음으로 높은 백운산(1,087m)에서 흘러내리는 차가운 계곡이다. 지역 주민들만 아는 쉼터였지만, 요즘은 외지인도 심심찮게 찾는다. 계곡이 넓지 않지만 대부분 나무 그늘에 덮여 있어 발 담그고 더위를 식히기에 그만이다. 백운산 자락에 덕동생태숲이 조성돼 있어서 가볍게 산책을 즐겨도 좋다.
제천=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한국일보 2021.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