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자박 소읍탐방]상처를 감싸듯 바다 끼고 '놀멍 쉬멍' 걷다 (daum.net)
제주 올레7코스 ‘일강정 바당올레’의 하트 모양 물웅덩이에 검붉은 저녁놀이 내려앉았다. 수평선에는 제주해군기지 방파제가 걸려 있다. 서귀포=최흥수기자
[자박자박 소읍탐방] (6) 제주에서 가장 물 좋은 강정마을과 올레7코스
12일 오후 서귀포시 강정동 카페 ‘피스아일랜드’ 창으로 비치는 햇살에 고소한 커피 향이 번졌다. 손님이 거의 없어 넓은 실내는 이름처럼 고요하고 평화로웠지만, 안팎의 장식은 한껏 멋을 낸 제주의 다른 카페와 달랐다. 카페 입구에는 ‘칼을 쳐서 보습을’이라고 쓴 대형 장승이 서 있다. 내부에는 제주를 창조한 여신 설문대할망이 군함을 동강 내는 그림과 함께, ‘군함이랑 설러불랑’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판화 작품이 걸려 있다. ‘설르다’는 ‘설거지하다’ 또는 ‘벌여 놓은 것을 치우다’는 뜻의 제주어다. 카페 피스아일랜드의 다른 이름은 ‘강정 평화센터’다
◇ 제주에서 제일, 물 좋은 강정의 끝나지 않은 싸움
2016년 2월 제주해군기지가 공식 준공했고, 지난 10월에는 국제 관함식까지 열어 해군기지를 둘러싼 갈등은 끝났으리라 여기는 외부의 인식과 달리 강정마을에는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현수막이 아직도 곳곳에 펄럭이고 있다. 2007년 해군기지 건설이 확정된 후부터 이주하기 시작한 30여명의 활동가들은 아예 강정에 삶의 터전을 꾸리고 정착했다. 2013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내려온 ‘반디(활동가명)’씨는 다 끝난 일 아니냐는 질문에 할 일이 더 늘었다고 답했다. 강정마을을 군사기지가 아니라 평화의 땅으로 가꿔 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인식에서다. 지금도 매일 해군기지 앞에서 100배 올리기, 길거리 미사, 인간띠 잇기 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괌, 하와이, 오키나와의 시민단체와 문제를 공유하고 국제적인 연대를 지속해 나가는 것도 주요 활동 중 하나다.
제주해군기지에 반대하는 활동가들이 운영하는 강정 평화센터.
평화센터 내부는 ‘피스아일랜드’ 카페로 꾸몄다.
강정에 정착한 지 수년이 지났지만, 해군기지에 찬성하는 주민들에게 이들은 여전히 ‘외부인’이다. 서귀포시관광협회의회의 한 간부는 “외부 세력들이 추구리다(부추기다) 보니 마을이 갈갈이 갈라졌다”고 비판했다. 동창회, 종친회, 협의회 등 강정마을의 200여 단체가 해군기지 건설을 두고 찬반으로 갈라져 해체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강정은 물이 풍부한 곳이다. 물이 많다는 것은 대화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로 생각이 달라도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작은 마을에 이렇게 단체가 많은 것은 멀고 가까운 친척을 두루 일컫는 ‘궨당’ 문화 때문이다. 끼리끼리 뭉치는 것으로 인식돼 부정적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궨당’은 제주 특유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런 상황에서 이웃은 말할 것도 없고, 친척과 가족끼리 치고 받은 험악한 말들은 무엇보다 큰 상처로 남았다.
제주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제일강정’ 강정마을은 전형적인 제주 농촌 풍경이 남아 있다.
마을 골목을 걸으면 돌담과 거목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린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최근의 갈등만 부각돼서 그렇지, 강정은 예부터 제주에서 살기 좋은 마을로 손꼽혔다. 강정마을은 제주에서 논농사가 가장 잘되는 곳이어서 ‘제일강정’이라 불렸다. 일부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고 있지만 마을 골목은 여전히 낮은 돌담과 귤밭을 품은 농가주택이 대세다. 내세울 만한 관광시설은 없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제주 농촌마을의 정겨움이 진하게 남아 있다.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을 꼽으라면 ‘말질식육식당’이다. 고기 굽는 큰 음식점 같지만, 자장면과 짬뽕이 주 메뉴인 소박한 식당이다. ‘말질’은 말이 다니는 길이라는 뜻으로, ‘말’의 모음은 ‘아래 아’로 표기한다. 도로명 주소 ‘말질로’는 길을 중복해 표현한 셈이다. 이 식당을 제외하면 강정마을에선 ‘통물도서관’이 그나마 들를 만한 곳이다. 양지바른 곳이라는 뜻의 ‘해차귀동’, 차분하다는 뜻의 ‘꼰다부니’ 등 2개의 서실을 갖춘 작은 도서관이다. 당연히 마을 주민과 아이들을 위한 시설이지만, 길손에게도 흔쾌히 자리를 내어 준다. 볕 좋은 창가에 앉아 책장을 넘기기 좋은 곳이다. 도서관 앞은 주민들의 휴식처이자 아이들의 놀이터인 ‘통물’이다. 용천수가 흘러 나오는 곳이지만 어쩐 이유에선지 지금은 흔적만 남았고 물기가 없다.
내세울만한 관광시설이 없는 강정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말질식육식당’의 짬뽕이다.
작고 아담한 통물도서관 내부.
통물도서관 앞 통물은 안타깝게도 메말라 있다.
물 좋은 곳 강정의 핵심은 마을 서쪽으로 흐르는 강정천이다. 제주의 하천이 대개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메마른 건천인 데 비해, 강정천은 사계절 맑은 물이 흐르는 하천이다. 때문에 지금도 서귀포 식수의 70%를 공급하는 생명수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푸른 물에 은어가 서식하고 원앙과 흰뺨검둥오리가 헤엄친다는 ‘냇길이소’가 최고의 풍광으로 꼽히는데, 상수원으로 보호하고 있어 출입이 통제된 상태다. 대신 강정천이 바다와 만나는 ‘냇깍’까지는 산책로가 나 있다. 울퉁불퉁한 현무암 바위 사이를 흐르기 때문에 수량에 비해 물소리가 제법 웅장하다. 1만5,889m(강정천 안내문에는 이렇게 단 단위까지 길이를 적어 놓았다)를 흘러온 강물이 바다로 떨어지는 모습은 의외로 소박하다. 육각형 주상절리의 흔적이 남은 바위에서 가볍게 짙푸른 바다로 쏟아진다. 하천 서편 해군기지와의 사이에는 화산 불덩이와 바닷물이 일전을 벌여 형성한 용암대지가 제법 넓게 형성돼 있다. 오랜 세월의 풍파에도 바위 결이 아직 날카롭고 뾰족하다. 바위 끝에서 낚시하는 주민에게 해군기지에 대해 물었다. 수심이 얕아져 낚시가 전만 못하다면서도 “원래 나쁜 점이 있으면 좋은 점도 있죠”라며 말을 아낀다.
강정천이 바다와 만나는 ‘냇깍’ 풍경.
강정천에 하류에서 왜가리 한 마리가 먹이를 기다리고 있다.
강정천이 바다로 떨어지는 모습.
강정천 끝자락은 거친 현무암 지대다. 바로 앞으로 서건도와 범섬이 보인다.
◇ 올레7코스, 상처를 치유하는 바다
강정마을은 올레7코스가 경유한다. 강정에서 동편으로 가면 법환포구, 서편으로 걸으면 월평포구로 이어진다. 한결같이 바다를 끼고 걷는 길이었지만, 해군기지가 들어서고 난 후 강정의 올레길은 마을 아래쪽 들판을 들락날락하는 코스로 수정됐다. 해군기지에 포함된 ‘구럼비’ 바위는 올레7코스의 자랑이자, 반대 투쟁의 상징이었다. ‘꾸불꾸불한 뇌에 거무스름한 물감을 입힌다. 그것을 수만 배 확대하고, 단단하게 굳혀 바닷가에 앉힌다. 구럼비는 딱 그렇게 생겼다’(이주빈 글, 노순택 사진 ‘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 중). 제주 바닷가에 흔하고 흔한 게 현무암이지만 길이 1.2km의 너럭바위는 구럼비 하나뿐이었다.
강정교에 걸어놓은 현수막 뒤로 눈 덮인 한라산이 보인다.
해군기지가 인접한 올레길에 ‘구럼비야 보고 싶다’라는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다.
강정교 인근 도로변에 세워 놓은 피켓 앞으로 한 주민이 개를 데리고 산책하고 있다.
강정교 부근 농성장에 세워진 ‘구럼비 설치예술 기억전’.
구럼비를 갈 수 없는 올레길은 마을의 농로를 따라간다. 월평포구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아직 따지 못한 귤이 노지와 비닐하우스에서 일손을 기다리고 있다. 물 맑은 강정을 자랑하듯 미나리꽝에는 싱그러운 기운이 푸릇푸릇하다. 아스라이 눈 덮인 한라산을 뒤로하고 마을을 벗어나면 다시 바다다. 제주에서는 드물게 일직선으로 뻗은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다. 그리고 500m 전방에서 ‘도로 끝’ 표지판, 차를 몰았으면 분명 당황스러운 길이다. 그곳에서 작은 모퉁이를 돌면 바로 월평포구다. 배가 드나드는 아주 작은 길목을 ‘포구’라고 한다면 그에 딱 들어맞는 규모다. 군더더기 없이 아담하다. 바위로 둘러진 좁은 물길을 통과할 크기의 작은 고깃배 네댓 척이 물 위에 동동 떠 있다. 포구 위 바위에는 바다로 길이 나 있다. 그 오른쪽 끝자락으로 짧은 겨울 해가 떨어진다.
강정마을 농로를 통과하는 올레7코스.
강정마을에서 월평포구로 연결되는 길.
아담한 규모의 월평포구.
월평포구 바위 위에 설치된 목재 산책로.
강정마을에서 법환포구 방향으로 걸으면 같은 바다를 끼는 올레길이라도 분위기가 다르다. 마을에서 강정교까지는 여전히 해군기지에 반대하는 깃발과 현수막의 아우성이 이어진다. 다리를 건너면 길은 주상절리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 켄싱턴리조트를 한 바퀴 돌아 약근교를 지난다. 약근천에서부터는 인공의 흔적이 덜한 진짜 올레길이다. 바다와 나란한 비포장 오솔길이다. 좁은 밭떼기엔 초록이 푸르고, 노란 들국화가 이 겨울에도 길섶에 화사하다.
올레7코스 한 리조트 화단에 동백이 화사하게 피어 있다.
약근천을 지나면 올레길은 비포장 오솔길로 이어진다. 파릇파릇한 초록을 보면 역시 제주다.
야자수와 들국화가 어울려 있는 올레7코스 강정~법환포구 사이 오솔길.
혹시나 구럼비와 비슷한 지형을 찾을 수 있을까 현무암 해변으로 내려선다. 더러 물을 담은 바위도 있지만, 사진에서 본 구럼비와는 느낌이 다르다. ‘놀멍 쉬멍’ 걷다 보니 어느덧 하늘이 어둑어둑하다. 결국 법환포구까지 가지 못하고, 하루 두 번 썰물 때 본 섬과 이어지는 서건도 앞 쉼터에서 걸음을 멈췄다. 수평선 위로 구름이 잔뜩 끼어 떨어지는 해는 보이지 않는데, 하늘의 붉은 기운이 바다에 비친다. 바람개비 장식 아래 검은 바위에 고인 바닷물이 평화의 날갯짓처럼 반짝인다. 2009년 올레길을 개설할 때 험한 바위 밭을 융단처럼 고르고, 제주에서 제일이라는 강정의 명성을 빌려 ‘일강정 바당올레’라고 별칭을 붙인 구간이다. 조금 더 어둑해지자 검붉은 기운이 ‘일강정 바다’에 하트를 그린다. 그 너머로 해군기지 방파제가 수평선을 대신해 길게 걸려 있다. 파괴돼 버린 구럼비의 아픔도, 거친 언사가 할퀸 강정의 상처도 평화로운 일몰처럼 그렇게 서서히 아물어갔으면.
올레7코스 ‘일강정 바당올레’ 부근의 쉼터 장식.
일강정 바당올레 부근 바람개비 장식 아래 바다에 노을이 비치고 있다. 언뜻 비둘기가 날아가는 모양이다.
일강정 바당올레의 하트 모양 물웅덩이에 노을이 지고 있다.
서귀포=글ㆍ사진 최흥수기자 한국일보 2018.12.25